잔디 정원에서 쉬는 동안 비가 오락가락한다. 사정없이 쏟아지더니 이내 뚝 그치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퍼붓기도 한다.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인생이나 날씨나 그게 그건가 보다.이튿날 아침 8시 언저리, 쌀쌀한 아침 공기 속에서 게으른 순례자 하나가 휘적휘적 알베르게를 나선다. 어쩐지 허둥대는 모습이다. 알베르게 건물 앞을 몇 번 오가다 휴대 전화기를 꺼내 뭔가를 확인하는가 하면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가며 걸어본다. 언제나 처음 출발할 때 길에 잘 오르는 것이 중요하다. 출발 직후에 몇 번 방향을 잘못 잡아 ‘경로이탈’후 까미노에 오르기까지 시간을 허비한 적이 있었다. 이날도 알베르게를 나서는 순간 그만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제 투숙할 때 들어간 입구와 아침에 나오는 문이 달랐던 탓이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모든 것이 꼬여버린다. 까미노건 인생이건.겨우 방향을 잡아 걷는 발걸음이 무겁다. 성치 못한 발 탓이다.오늘은 베가 데 발카르세까지 31킬로미터다. 중간에 7개의 마을이 있어 부담이 적다. 날씨도 우호적이다. 하늘엔 연속 사흘째 구름이 많다. 유난히 쌀쌀한 아침 기온이 걷기엔 최적이다. 포장도로를 따라 한 시간 쯤 가자 카카벨로스가 반긴다. 바에 들러 그랑데 또르띠야 2개와 오렌지 주스로 아침 식사를 한다. 배고픔이야 음식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건만 문제는 발의 통증이다. 1시간 남짓 걸었는데도 하루치를 다 걸은 듯 통증이 밀려온다. 어제 무리했던 모양이다. 문득 발이 아플 때 여성용 패드를 붙이면 도움이 된다던 ‘길 포식자’ 정진규 선생의 얘기가 떠오른다.까미노는 카카벨로스 도심을 가로질러 간다. 마침 약국이 보인다. 출입문 옆 작은 벤치에 배낭을 내려놓고 들어간다. 여 약사가 마스크를 착용하고 들어오란다. 유럽은 약국을 비롯한 특별한 몇 곳을 제외하고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마스크 착용을 잘 하지 않아서 깜빡했다. 마스크를 쓰고 다시 들어가 여성용 패드를 찾으니 약사가 몇 가지 제품을 가리키며 선택하란다. 아픈 발에 부착하려고 하니 적당한 걸로 달라고 하자 하나를 건넨다. 추가로 비염약 까지 구입하고 의자에 앉아 패드를 붙여준다. 발을 불편해 하는 순례자가 걱정됐는지 약사가 나와서 지켜보며 괜찮겠냐고 묻는다. 나는 패드를 붙인 발바닥을 툭툭 치며 문제없다고 웃어 보인다. 다른 손님도 많은데 약국 밖에까지 나와 이국의 순례자를 신경 써주는 국경 없는 친절이 고맙다.포장도로를 1시간가량 걷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좁은 갓길에 퍼질러 앉았다. 길은 멀고 기온은 점점 오르는데 발이 버텨주지 못하면 그보다 더한 낭패는 없다. 추가로 패드 한 장을 덧대 붙인다.거기가 비야프랑카였을까, 제법 큰 도시였다. 점심때도 다가오고, 발도 아파서 눈에 띄는 작은 바에 들어간다. 노상 테이블에 앉아 빵과 콜라를 먹는다. 길 건너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고풍스런 옛 건물이 보인다. 성(城) 같기도 하고. 까닭 없이 아는 얼굴을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했더니 ‘길 포식자’ 정진규 선생이 불쑥 나타난다. 어제 리에고 데 암브로스의 바에 두고 온 물병의 ‘안부’를 묻자 자신도 물병을 봤다면서 혹시 내가 빠뜨리고 갔나 생각만하고 그냥 두고 왔다며 안타까워한다. 다음 날 이렇게 다시 만날 줄 몰랐으니 당연한 일이다.정 선생은 오늘 여기서 묵는단다. 아직 12시도 되지 않았는데 많이 힘이 드는 모양이다. 프랑스 아레스에서부터 1,400여 킬로미터를 걸어왔으니 지칠 만도 하다. 꼭 지치지 않았더라도 여유가 있으면 이렇게 오전에만 걷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오후의 무더위도 피할 수 있고, 체력도 세이브 할 수 있다. 느긋한 점심을 즐긴 후 ‘행군 모드’에서 ‘여행 모드’로 전환해 천천히 마을을 구경할 수 있는 것은 최고의 수확이다.나중 알고 봤더니 정 선생이 여기서 묵은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몇 년 전 모 방송국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며 한식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촬영한 곳으로 유명세를 탄 지역이 바로 이 비야프랑카라고 한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도시여서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을 듯 했다. 아주 크지는 않아도 까미노 상에서 만나는 도시 중에서는 꽤 규모 있는 축에 드는 곳이라 볼거리도 많을 것이다.
비야프랑카는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침공으로 시작된 반도전쟁 때 치열한 격전지로도 유명하다. 이로 인해 수많은 청동기 시대 유물과 유적지들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정부는 1965년부터 도시 전체를 스페인역사문화유산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비야프랑카는 12세기부터 18세기 사이에 지어진 성당이 많아 순례자들에게 인기 있는 지역이다. 순례자들은 오늘날에도 발급해 주는 면죄부를 받아가기도 한단다.면죄부는 종교가 발명한 최고, 최대, 불세출의 ‘히트 아이디어 상품’이다. 중세말기 재정압박에 시달리던 교황청은 면죄부라는 기발한 상품을 개발해 ‘죽은 사람에게도 유효하다.’며 판매에 열을 올렸다. 이 희대의 상품은 단박에 부실기업이 상종가를 치게 하는 반전을 안겨준 ‘효자상품’이 되었다. 죄인에게 그 죄를 사하여 없던 것으로 해 준다는 것만큼 ‘죄 많은 중생’들에게 매혹적인 게 또 있을까.‘너의 죄는 너다!’나의 죄가 ‘나’라면, 죄인인 내가 ‘면죄부’를 받으려면 ‘나’를 포기해야 한다. 함께 외눈박이가 되지 않겠다는 ‘나’를, 인과와 참회를 팔면서도 스스로는 그것들을 믿지 않고 행하지 않는 자들을 비판하는 ‘나’를, 인간이 인간으로, 종교집단이 종교집단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호소하는 ‘나’를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면죄부의 ‘ㅁ’이라도 받아 들 수 있다. ‘순진하다’ ‘종단정서를 모른다’ ‘화합하지 않는 독불장군이다.’ 등의 비난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찬달라(부정 타는 자, 불가촉천민)에서 수드라까지 ‘신분상승’을 꾀할 수도 있게 된다.장기체류하던 지옥에서도 나를 돕겠다며 나선 이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나의 ‘5비 잉간’(비겁, 비굴, 비열, 비정, 비루한 인간) 비판의 대상이기도 했던 당시 한 인물은 나를 도와주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면죄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드라로 ‘계층이동’할 수 있는 사다리를 오를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마웠다. 미안했다. 믿었다. 그러나 이곳은 믿는 순간 속기 시작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또 망기하고 있었다. 나는 줄기차게 ‘순진’했으며 ‘종단정서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충분히 폼 나게, 우아하게 천천히 보복을 즐겼다. 그는 이미 ‘가식의 끝판 왕’으로 정평 난 인물이었다. 나는 한참 뒤에야 그걸 알았다. 공적이고 대의적 차원에서 가한 나의 비판을 사적 감정으로 치환해서 보복한 그에게 분노보다는 비민심(悲愍心)이 일었다. 저열하고 조야한 그의 근본이 그를 그렇게 이끈 것이니 노여워할 일은 아니다. 흙덩이를 던지면 사자는 사람(본질)을 물지만 한로(韓盧)는 날아온 흙덩이(비본질적인 것)를 쫓아간다. 이때 한로를 탓하면 안 된다. 본성이 그런 것을 한로인들 어찌할까. 정당하고 공적인 비판을 접하고 부끄러운 자신을 보았다면 그는 본질을 바로 본 사자다. 그러나 던져진 비판에 분노했다면 그는 흙덩이를 쫓아간 한로가 아니겠는가. 한로가 한로 본성대로 한 것을 한로 탓으로 돌리고 미워하면 똑 같은 한로가 돼버린다.경조부박했던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한 그에게 개전의 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부끄러움은 더 나은 자신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계속 한로로 살 것이다. 자신이 한로라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나는 그의 의도와 행동은 미워하지만 그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저 그의 위선과 가식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오묘한 교언영색은 땅의 이치를 깨우쳤으니 부디 타인을 현혹한 후 상처 입히는 일은 이제 그만 두기를, 나를 끝으로 더 이상 야비다리치는 그의 천부적인 재주에 넘어가 상처받는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