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면 힘들게 섰던 나무들이 퉁퉁 부은 다리를 들어 올려돌아온 새들을 데리고 그들의 집으로 떠났다누구나 쉴 집은 멀리에 있다초월과 무의식의 공간보이지 않는 산수의 경계에 둥지처럼 숨겨져 있다빈 공원에 혼자 선 나무가눈 먼 딱따구리를 기다리고 있다까치발을 들어 먼 길을 내다보는 눈빛이 초조하다저 나무가 밤늦도록 우듬지에 닿은 별을 야멸치게 흔드는 것은눈 먼 새의 귓속에 종을 울리는 것이다 제대로라면 나무가 흔들어대는 종소리는 새의 귀 속에 들어가지도가 되어야 할 것이었다공원의 나무들이 모두 가버린 줄을 모르고저녁이 익어 밤이 되었는지도 모르고딱따구리는 나무를 찾아다니며 점자를 새기고 있다저기는 껍질이 벗겨진 늙은 밤나무의 가슴이고여기는 뽀얀 백양나무의 매끄러운 어깨라고다른 짐승들을 위하여 지도를 그리는 것이다그래서 눈 먼 새를 기다리는 나무와집으로 가는 길을 기억하지 않는 새는몸 밖에 둥지를 만들지 않는다돌아가 쉴 집이 몸 안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아는 것이다<수필가가 본 시의 세상> 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성자처럼 보인다. 우리를 따뜻한 생각에 젖게 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그렇다. 선하고, 사려 깊고, 주변을 행복하게 해주는 거의 절대적 베품의 원천처럼 보인다. 초월과 무의식의 공간 속에서도 늘 서 있었다. 누울 수 있거나 쉴 수 있는 자세를 취해 본 적도 없다. 누군가를 배려하기 위해 늘 준비태세인 것이다. 딱따구리가 나무의 피부에 점자를 새기는 아픔을 견디고 그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상처를 내고 내면 깊숙이 메울 수 없는 큰 허공을 만들어도 그것을 받아들인다. 더 나아가 그들의 둥지로 품어 주기 까지 하는 포용의 끝자락을 보여주는 나무에게서 우리는 배운다. 우듬지에 닿는 별을 야멸찰 정도로 흔들었던 까닭은 눈 먼 새가 있기 때문이었다. 눈 먼 새의 귓속에 종소리로 울리라고 그런 것이었다. 그 종소리를 지도삼아 찾아오라고 그처럼 흔들었던 것을 눈 먼 새는 알기나 할까. 집으로 가는 길을 기억하지 못한 새들은 아무리 나무가 오라고 손짓을 하고 흔들어도 올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몸 밖에 둥지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쉴 집을 몸 안에 설계해 놓는 일을 새로이 터득하고 있다. 몸 안의 둥지를 만드는 것을 알고 있는 나무에게서 배웠던 것이다. 나무는 단지 서있을 뿐인데도 허허로운 인간을 가르치고 새들을 지도하고 있었었다. <수필가 박모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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