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라리오 성 정문의 왕관 모양을 한 화려한 두 기둥에는 스페인 국기 로히구알다와 기사단 깃발이 힘차게 나부낀다. 상처 입은 영혼에도 저렇게 깃발 날리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성의 내부에는 템플기사단 관련 자료와 물품, 장비 등이 전시된 박물관도 있다고 하나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여유가 부족한 나그네의 여행은 이렇게 부실하다.폰페라다가 도시 기반을 확립한 시기는 11세기였다고 한다. 고대 로마가 지배하던 시기에는 금속과 광물을 채취해 로마제국으로 가져갔다. 아직도 도시 주변 곳곳에 폐광산이 산재해 있으며, 그 중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도 있다고 한다. 80년대 광산 폐광이후부터 관광업, 농업, 포도주 산업이 주산업이 되었다고 한다.
폰페라다는 내가 본 도시 중 가장 청초하고 기품 있는 도시 중 하나였다.
폰페라다에는 템플라리오 성 외에도 중세시대 건축물인 산 안드레스 교회. 시 청사 등이 관광명소로 꼽힌다.템플라리오 성을 지나 살짝 경사진 길을 조금 내려가자 다리 아래로 거울처럼 맑은 작은 강이 흐른다. 폰페라다에는 보에시 강과 실 강 등 두 개의 강이 도시의 젖줄역할을 한다. 이 강은 그 중 하나인 실 강이다. 실 강을 따라 길게 늘어선 아파트들이 강물과 함께 흐르는 듯 조화롭다.무더위가 절정으로 치닫는 2시 30분 경 도심을 살짝 지난 한적한 곳에 공원이 나타난다. 나무그늘 벤치에 앉아 남은 거리를 확인한다. 숙소까지 3킬로미터 정도 남았다. 27킬로미터를 7시간 30분간 걸어왔다. 심신을 추스른 후 다시 배낭을 둘러멘다. 예약을 하지 않고 가는 길이라 순번에 밀려 숙소 체크인을 못하는 불상사는 피해야 한다. 작은 마을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불길한 예감은 꼭 들어맞는다 했던가. 콜룸브리아노스의 알베르게가 문을 닫았단다. 숙소 바에서 일하는 중년남자의 말하는 품새가 난해하다. 오늘 영업이 끝났다는 건지 아예 폐업을 했다는 건지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다. 어느 쪽이건 의미가 없다. 이럴까봐 중반까지 꼬박꼬박 예약을 했다. 하지만 선착순에 밀려 투숙이 되지 않는 경우는 드물기도 했거니와 자유로움을 누리기 위해 중반 이후부터는 예약을 하지 않았다. 가끔 예약을 하다보면 난감할 때가 있어 은근히 기피하게 되기도 한다.나의 예약 매뉴얼은 간단하다. 숙소 직원이 전화를 받으면 ‘리세르바(예약)’라고 말하고 첫 번째 질문에는 이름을 말해주고 두 번째 질문에는 우노(하나), 세 번째엔 뜨레(셋)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경험상 첫 질문은 이름을 묻는 것이고, 두 번째는 몇 명이냐는 질문이고, 세 번째는 몇 시쯤 도착하느냐는 질문이다. 세 번째 질문에 무조건 뜨레(3시)라고 하는 건 조금 일찍 가거나 조금 늦게 가거나 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어림잡아 하는 대답이다.대개 이쯤에서 상대가 ‘오케이’ 하는데 가끔은 네 번째 질문을 던져 오는 경우도 있다. 질문도 가장 길다. 나는 아직도 그게 무슨 질문인지 정말 궁금하다. ‘당신은 어떤 가치관으로 인생을 살아왔으며, 스스로 생각하기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뭐 이런 걸 물어 볼 리도 없을텐데 말이다. 대답을 얼버무리면 몇 번 반복하다가 전화를 끊어버리는 걸 보면 나름 중요한 질문이긴 한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그 질문이.허탈한 마음으로 요깃거리를 주문하며 근처의 다른 알베르게를 물었다. 호스트가 ‘여기에는 없고 4킬로미터를 더 가면 캄포나라야에 두 개의 알베르게가 있다.’고 알려준다. 지금이 3시 20분이니 4시 30,40분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다시 길을 나선다. 여전히 아스팔트 포장도로다. 왼쪽 발바닥 종자골의 통증과 아치 부분의 작열감이 걸음을 무겁게 한다. 체력소모도 심하다. 통증을 줄이려 갓길 끄트머리의 잡초들을 밟으며 간다. ‘플라시보 효과’라도 그게 어딘가.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200여 킬로미터가 남았음을 알리는 까미노 이정표가 보인다. 점점 종착지가 가까워지고 있다. 끝이 다가온다는 것은 언제나 묘한 감정을 불러온다. ‘끝’의 기본 정조(情調)는 ‘아쉬움’이나 ‘비애감’이다. 심지어 ‘불행의 끝’에도 묘한 비애감은 조용히 깃들어 있다. 이 800킬로미터의 까미노가 끝나는 순간 어떤 정조를 느끼게 될지 조금씩 궁금해지기 시작한다.캄포나라야로 가는 걸음에 조급함이 느껴진다. 발은 불편하고, 계획과는 다르게 추가로 더 걸어야 하고, 다음 마을에서의 투숙여부도 불투명한 탓이었다. 여행길도, 인생길도 계획대로만 되지 않는다. 그럴 때 조급함은 금물이다. 성급한 ‘빌드 업’을 시도하다가는 운명의 역습에 무방비로 당할 수 있다.고난의 시간을 ‘버리는 시간’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이 고비만 넘기면 진짜 내 인생이 시작되겠지.’ 하며 등 떠밀어 보낸 그 시간들이 고스란히 내 인생이었음을 깨닫게 될 때는 너무 늦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가치관에 복무하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 단연코 가장 좋은 방법은 청경우독(淸耕雨讀)의 자세다. 복숭아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날 정도로 집필에 몰두했던 저 초당(草堂)의 다산(茶山)처럼 담백하게, 혹은 처절하게. 이 무렵 다산을 만나기는 했으나 그의 정신까지 본받지 못했던 것은 온전히 조급함과 어리석은 내 성정 탓이었음을 통렬히 인정한다.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문제의 그 후배는 양쪽 진영으로부터 서로 상대방 표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몸값’을 올리려 ‘졸개’들 확보에 혈안인 ‘집개’에게 이만한 먹잇감이 따로 없었다. 그 후배와 ‘집개’의 이익이 서로 맞아떨어졌다.연임을 꿈꾸던 집행부의 몇 몇도 선거에 이용하기 위해 나를 불렀다. 집행부의 조사가 시작되자 ‘집개’가 ‘즉시 사감원으로 이첩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먹잇감을 빼앗길 수 없었던 것이다. 조사에 임하고 있는 내 귀에까지 들려오는 ‘그 놈 목소리’에서 나는 ‘다친다.’는 그의 경고가, 경고가 아닌 예고였음을 깨달았다. ‘집개’의 예고대로 선거권이 없는 나만 다치는 최악의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비굴하지만 집행부에 중재를 요청했다. 이즈음 ‘집개’는 자신이 포섭해 있던 한 끄나풀을 내게 보내 ‘스모킹 건’이 무엇인지 넌지시 탐지해 갔다. 이런 상황에서 ‘집개’의 송치 요구가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나 하나를 죽이고 후배와 그 후배와 관련된 상대방(배우자가 선거권을 갖고 있었다)을 살려서 ‘졸개’ 둘을 추가로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휘청대는 ‘들개’ 한 마리를 ‘집개’들이 떼로 몰려와 에워싸고 있었다.나의 절박하고 비굴한 중재 요청에 집행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문이 너무 많이 퍼져 버렸다.’는 황당한 이유를 댔다. 나는 아직도 내 시선을 피하던 그들의 눈빛을 잊지 않고 있다. 소문은 자신들이 정략적으로 퍼뜨린 것이었다. 집행부측도, ‘십진필’측도 선거권이 없는 나 따위는 ‘꿈에 네뚜리’였다. 반면 ‘들개’는 아직도 ‘순진’했고, 여전히 ‘종단 정서’를 모르고 있었다. 법계는 아무도 특별히 편애하지 않는다. 법계는 인간의 일에 일일이 참견할 겨를이 없고, 신은 이미 오래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지 않았던가. 나는 인간에 대한 절망으로 왕배야덕배야 진저리쳤다. 인간이 왜 이렇게 비인간적인지, 종교집단이 왜 이렇게 비도덕적인지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어떤 사회에서도 문제가 있는 당사자를 불러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주의를 준 것이 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가장 먼저 알게 된 내가 침묵하는 것은 공동체 파괴의 공범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집단은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침묵을 깨는 순간 위험해 지는 곳임을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