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길을 따라 마을에 진입한 후 다리를 건너 바에 들어간다.야외 테이블에 앉아 고풍스런 다리와 강을 감상하며 배를 채우고 물병도 가득 채웠다. 막 출발하려는 참에 마침 ‘길 포식자’ 정 선생이 도착한다. ‘어떻게 이런 풍광 좋은 바를 찾으셨냐’고 감탄하며 내 앞에 앉는다. 잠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눈 후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또 어디선가 조우하게 될 순간을 기대하며.마을 골목을 통과해 한동안 아스팔트길을 가자 흙길이 나타났다. 멀리로는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안에는 마을과 밭들이 펼쳐져 있다. 군데군데 자그마한 산들도 겸손하게 엎드려 있다. 까미노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풍경이다. 영상을 촬영하며 걷는 걸음이 경쾌하다. 이날의 컨디션은 확실히 좋았던 모양이다. 불친절하게 흔들리는 영상너머로 불안하게 흔들리는 음정의 노랫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영상 속 풍경은 시시각각 바뀌건만 흔들리는 음정은 바뀌지도 않는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노래로 시작해 노래로 끝나버린다. 조잡한 뮤직비디오다. 리에고 데 암브로스에서 한 시간 쯤 갔을 무렵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물을 마시려 배낭 옆구리를 보니 물병이 없다. 어라? 이게 왜 없지? 기억을 더듬어 보니 리에고 데 암브로스의 바에서 출발 직전 물병을 가득 채우고 야외 테이블에 그냥 둔 채 떠나버렸다. 테이블에는 몇 가지 접시와 음료수 병과 컵이 놓여 있어서 그 일부로 생각하고 생각 없이 출발해 버린 것이다. 내가 출발하기 직전 정 선생이 도착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도 한몫했다.유럽의 수돗물에는 석회가 많이 함유되어 있다. 나처럼 민감한 사람들은 배탈을 피하기 어렵다. 고민 끝에 석회를 거르는 필터가 있는 특별한 물병을 준비해 왔는데 여기서 그만 손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조금 불편하지만 생수를 이용하면 되고, 누군가가 대신 잘 써주면 그것도 괜찮다. 그 ‘누군가’가 정 선생이라면 더욱 좋고.몰리나세카를 지나 아스팔트길을 7,8킬로미터 더 가자 멀리 폰페라다가 모습을 드러낸다. 규모도 크고 멀리로 보이는 도시미관도 빼어나다. 까미노는 시내를 향해 직진하지 않고 왼쪽으로 크게 돌아간다. 까미노를 따라 용도와 목적을 알 수 없는 철조망이 길게 쳐져 있다. 철조망 너머로는 잡초들 사이로 비포장도로가 폰페라다와 까미노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 그림 같은 풍경을 방해하는 뜬금없는 철조망이 흉물스럽다.한참을 돌아 시내에 진입했다. 인구 약 6만9천 여 명의 폰페라다는 정갈하다. 해발 540미터의 고지대에 들어앉은 이 도시는 1,500미터가 넘는 산지로 둘러 싸여있다.낮게 깔린 흰 구름 아래 펼쳐진 도시는 티끌 하나 없이 단정하다. 청초하고 싱싱한 풀잎 같다. 하늘에는 매연 한 줌도, 차도에는 콘크리트 조각 하나도 없다. 방금 큰 비가 내려 깨끗이 도시를 세척하고 난 직후 같다. 건물들은 막 면도를 끝낸 샐러리맨처럼 깔끔하고 핸섬하다. 쾌청한 날씨와 어울려 청결하다 못해 청아하기까지 하다. 이 도시가 소리로 환생한다면 산사의 풍경소리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마을에 진입하고 5분이나 지났을까. 1178년 페르디난드 2세가 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해 만든 템플기사단이 주둔하던 템플라리오 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작은 잔디언덕 위에 당당한 자태를 뽐내며 서있다. 투박한 돌로 조성되었음에도 외관은 수려하다. 특히 성의 입구는 질박함과 화려함이 잘 조화되어 보는 눈이 즐겁다. 성벽 중간 중간 색상이나 모양이 이질적인 부분이 보인다. 도시화 과정에서 이 성의 돌을 무단으로 채취해 건물을 짓기도 했다더니 그 흔적인 것 같다. 이렇게 하나를 죽이고 다른 하나를 살리는 것은 괜찮은 일일까. 하나를 죽이고 둘이나 셋을 살리는 일은 더 괜찮은 일일까. 아니다. 열을 살릴 수 있어도 하나를 죽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설령 열이 죽더라도 억울한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은 반인륜적인 최악의 전체주의다. 다른 하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은 고귀하지만 열을 위해 한 명의 타자를 희생시키는 것은 죄악이다.저 흔적은 오래 갈 것이고, 볼 때 마다 아픈 상처는 덧날 것이다. 건물이나 사람이나 이렇게 입지 않아도 될 상처를 입는 일만은 없어야 하건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다만 그 상처가 자기연민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고, 상처마저 자신의 일부로 여기며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상처를 딛고 새로운 ‘빌드 업’을 즐길 때 상처를 입힌 자에 대한 최고의 복수는 완성된다.‘들개’ 생활 5년차 무렵 뜻하지 않게 또 하나의 생채기를 입는 사건이 찾아 왔다.영구집권을 꿈꾸다 몇 몇 주구들의 배신으로 연임에 실패한 ‘십진필’은 권토중래를 노리며 주구세력들을 앞세워 매표(買票)작업에 들어갔다. 37명으로 구성된 의회도 협잡과 회유, 내 편 밀어 넣기 등으로 ‘개체 수 조절’을 해왔던 그와 주구들은 종권탈환에 혈안이 돼 있었다. 그때 자칭 ‘배부른 집개’는 감찰기관인 사감원의 부장이면서도 종의회 의원으로서 행정부 수장 선출의 선거권을 갖고 있었다. 삼권분립의 원칙은 ‘구시대의 유물’이 된지 오래였다. ‘십진필’의 충견이었던 그는 이번 선거에서 자신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은밀히 가까운 동료들을 포섭해 나가고 있었다. ‘십진필’ 진영의 유권자 중 선거 때 ‘집개’와 한 몸처럼 움직여 줄 ‘졸개’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십진필’로서는 구미에 맞는 인물들을 의회에 밀어 넣어 왔다고는 해도 자신의 표 3~4장이 반기를 들고 상대후보에게 ‘귀순’해 버린다면 치명적인 타격이 불가피해진다. ‘거털먼’의 연임을 저지하고 종권을 잡았던 ‘십진필’이 연임에 실패한 것도 믿었던 ‘홍위병’ 출신의 주구들 몇 몇이 작당하여 상대후보 지지로 돌아서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십진필’로서는 같은 악몽을 두 번 겪어야 할 수도 있다. 반면 ‘집개’는 ‘십진필’과의 거래 테이블에 다리를 꼬고 앉을 수 있게 된다.그 무렵 나는 조용히 한 후배를 불러 종교지도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매우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그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더니 결국 ‘노 코멘트 하겠다.’며 버텼다. 얼마 후 감찰기관의 부장 직을 맡고 있던 ‘집개’의 전화가 왔다. 불길했다.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더라.’면서 내가 진원지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당사자만 불러 조용히 말한 게 전부’라고 대답했다. 그는 불문곡직 결론부터 내렸다. ‘다친다.’고 경고했다. 나는 뻔히 결과가 보이는 싸움을 준비해야 할 상황이 왔음을 직감했다. 그렇다고 백기투항 후 덤터기 쓰는 건 ‘자살’이다. 결말이 뻔한 이 싸움에서의 결과는 ‘타살’이다. 나는 ‘자살’과 ‘타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처지였다. 비라리 칠 곳도, 도움을 청할 대상도 없었다. 햄릿 식의 ‘죽느냐, 사느냐’가 아닌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잠시 고심하던 순간부터 나는 이미 유령이었다. 산 채로 죽어 있었고, 죽은 채로 살아 있는 반생반사(半生半死)의 상태였다. 느낌이 딱 그랬다. ‘자살’보다는 ‘전사’가 낫다는 결론은 쉽게 났다. 내 생애 가장 힘든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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