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위에는 먹구름이 아까부터 하늘을 뒤덮고 있는 가운데 저 산 아래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둥글고 환한 빛이 세상을 비추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그 광경을 보자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해 불안하던 마음이 먹구름 걷히듯 걷힌다.
순례길에 비가 오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우선 탄력 받아 가던 길을 멈추고 판초우의를 꺼내 배낭과 함께 둘러써야 한다. 옆에서 도와주는 이가 없으면 혼자 둘러쓰기도 쉽지 않다. 금세 비가 잦아들라치면 벗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도 생긴다. 갈등 끝에 우의를 벗어 넣고 나면 또 다시 떨어지는 빗방울에 갈팡질팡하기 일쑤다. 무엇보다도 비가 오면 사위가 어두워지고 시야가 좁아져 발밑만 보며 걷기 십상이다.내 앞을 걷고 있는 저 순례자는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질 때부터 판초우의를 둘러쓰고 내내 저렇게 걷고 있다. 힘들게 둘러쓴 우의를 벗었다가는 금방 다시 입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어 저러는 것이다. ‘귀차니즘’의 거장인 나는 우의를 꺼내는 번거로움이 싫어 고집스럽게 내처 걷기만 하고 있다. 저 앞에 보이는 새 하늘의 개벽이 그래서 더 반갑다. 헛수고를 덜어서 기쁘고 내가 가는 곳이 새로 열린 하늘 아래라는 것도 반갑다.조금 더 내려가자 산 중턱에 집집마다 검은 색 석판지붕이 이채로운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어제 처음 목표로 잡았던 엘 아세보다. 위에서 내려다본 엘 아세보 마을이 고요와 평온 속에 잠겨있다. 출발한지 2시간 20분만에 11킬로미터를 왔다. 여유 있는 걸음으로 충분히 즐기면서 걸었다 싶은데도 생각보다 빨리 왔다. 그래도 어제 당초 목표로 잡았던 이곳을 포기하고 폰세바돈에서 묵은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어제 그 컨디션으로 11킬로미터를 더 걸었다면 4시간 가까이 걸렸을 테고,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이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눈앞에서 새 하늘이 열리는 저 광경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엘 아세보는 돌과 석판지붕을 얹은 전통방식의 건물들로 조성된 마을이다. 테라스는 목재로 만들어 자연과의 조화에 신경을 썼다. 오래전 엘 아세보 마을은 겨울에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들이 눈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해마다 ‘이라고 골짜기’에 길을 표시하는 말뚝 수 백 개를 박았다고 한다. 대신 수 백 년 동안 세금과 군대징집을 면제받았다고 한다. 마을에는 자전거로 까미노를 가다 이곳에서 생을 마친 독일인을 기리는 철로 조성된 자전거 모형의 기념물이 있다. ‘이라고 골짜기’를 내려오다 사고라도 당했던 것일까. 까미노 상에서는 이렇게 종종 순례길에서 생을 다한 순례자들을 추모하는 십자가 상을 만나기도 한다. 이렇게 까미노에서 한 생애를 마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중환자실에서 주렁주렁 연명줄을 달고 심장제세동기의 전송을 받으며 떠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순례길에서 가지는 이 정갈한 마음, 온전한 인간에게 다가 서려는 마음,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장엄한가. 한 송이 들꽃이나 들풀이 지듯이 소리 없이…….그들의 명복을 빌어본다. ‘또다 라 수아르떼!’엘 아세보를 지나도 아름다운 산길은 계속되었다. 나무가 크지 않아 시야가 트인 상태로 걸어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다. 수시로 뒤를 돌아 지나온 길을 바라보는 맛도 여간 아니다.내가 가야 할 길은 아니지만 저쪽 산허리를 휘감아 돌아가는 붉은 길도 매력적이다. 봉긋한 산에는 키 작은 나무들 몇 그루만 옹기종기 서 있을 뿐이다. 나머지 공간은 들풀들이 뒤덮고 있다. 나는 저런 산이 좋다.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산에 들어가면 나는 사라져버리고 숲만 남게 된다. 산은 나를 삼켜 버리고 나는 숲에 압도당해 버린다. 저런 민둥산 같은 산에 오르면 내가 산에 묻혀버리지 않는다. 나는 산의 일부가 되고, 산은 나의 일부가 되는 느낌이다. 이 호혜적인 관계가 나는 좋다. 인간관계도 이런 호혜평등의 관계가 최상일 것이다.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압도하거나 지배하지 않고, 갑과 을을 따지지 않는 관계, 나는 그런 관계가 좋고 그런 산이 좋다.
어렸을 적 내 고운 어머니 손잡고 해목재를 넘어 찾아가는 외갓집 뒷산이 그랬다. 붉은 황토로 뒤덮인 나지막한 산에는 내 키보다 훨씬 작은 어린 소나무들이 배추처럼 가지를 땅에 드리우고 서 있었다. 그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는 몇 가닥 좁은 길과 몇 종류의 들꽃과 들풀과 억새가 산의 전부였다. 나는 까미노를 시작한지 이틀 만에 내가 왜 평소에도 유독 개울처럼 휘돌아가는 호젓하고 아름다운 길에 집착하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해목재를 넘어, 저수지 둑길 아래를 지나 외갓집으로 가던 길, 작은 소나무 몇 그루 사이로 휘돌아가던 외갓집 뒷산 길이 내 무의식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이유였다.내 외갓집 뒷산이 울창한 숲으로 뒤덮이기 전 그 산의 소나무와 들꽃과 들풀과 억새 등 개체 하나하나의 가치는 동일했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들풀하나도 소외되지 않았다. 그 중 어느 하나만 없어져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면 과장이 될까.나는 대도시와 군중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도시에는 개개인은 없고 시민과 군중만 있다. 나는 가난한 이도, 병든 이도, 못난 이도 국민이나 시민이라는 말로 ‘퉁쳐’지지 않는 작은 지방이 좋다. 개개인의 존엄성이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좋다. 내 외갓집 뒷산 같은, 애틋하게 그리운,저 건너 나지막한 산허리를 돌아가는 길이 나를 향해 자꾸 손짓한다. MTB로 하는 순례라면 잠시 ‘외도(外道)’를 즐기고 싶은 유혹을 피하기 어려울 듯하다.멀찍이 앉아 건너편 봉긋한 산을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젖는다. 사람도 저렇게 속내를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며 살 수는 없는 걸까. 꼭 철갑처럼 숲을 둘러쓴 채 속내를 꽁꽁 감추고 표리부동하게 살아야 하는 걸까. 아무리 속내를 감추고 위장에 능한 사람이 유리한 곳이 인간세계라지만 더 나은 세상인 천상세계를 구현하려면, 이 몸 이대로 구원받고 해탈하려면 우리도 조금은 저렇게 민둥산에 가깝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 자신을 더 자유롭게 해 주는 길이 아닐까.다시 부지런히 산길을 내려간다. 가지 못한 길은 가슴에 품은 채.엘 아세보에서 한 시간을 내려가자 리에고 데 암브로스 마을이 기다리고 있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아늑하게 들어앉은 모습이 목가적이다, 가옥의 구조나 검은 지붕,목재 테라스 등은 앞서 지나온 엘 아세보 마을과 똑같다. 엘 아세보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반면 리에고 데 암브로스는 오목한 분지에 들어 앉아 있는 좀 더 큰 마을이라는 차이 뿐이다. 정갈하면서도 평온한 분위기까지도 흡사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