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冠을 쓰고의젓하게 앉아 있더라.수많은 풍상이할퀴고 지나갔지만산은 꿈쩍도 아니한 채잔기침 몇 번으로꼿꼿하게 앉아 있더라.기슭에 가득크고 작은 생명들을 놓아 기르며수염 쓰다듬고앉아 있더라.긴 장죽에담배 연기 피워 올리며스르르 눈 감고깊은 생각에 잠겨 있더라.<수필가가 본 시의 세상>
지리산 천왕봉을 형상화한 표현이 실감지다.때때로 산봉우리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절도(節度)있는 산 등어리의 획으로부터 엄격함을 본다. 수염을 쓰다듬고 앉아 있는 모습처럼 보이는 산 정상만의 위엄을 느끼게 한다. 우리나라 산 중에서도 지리산은 만만치가 않은데 지리산의 맨 위 ‘천왕봉’은 그 위용이 천하를 호령할 만큼 당당하다. ‘긴 장죽에 담배 연기 피워 올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천왕봉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한가득 차오른다. 섭생들의 생장을 다스리는 지리산의 두텁한 손바닥은 온기가 가득해서 한 번 쓸어내릴 때마다 한 계절이 오고 간다. 그 온기로 ‘크고 작은 생명’들이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것이다. 청춘의 가닥들을 접으며 지리산을 오르내린 시간이 무수했음에도 지리산은 여전하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 된 주목도 여전하고 천왕봉의 수염을 쓸어내리는 바람도 여전한데 오고 가는 인간들의 모습은 여전하지가 않다. 달라지고 변한다. 그래서 드는 생각, 문득 서글퍼진다. 지리산의 위엄은 닮지 못할지라도 늘 그 자리에 그대로인 나무들의 모습만이라도 닮을 수는 없었을까. 천왕봉의 ‘깊은 생각’만이라도 알아챌 수 없었을까. -알 수 없으니 그저 뚜벅거리며 고개 숙인 채 하산하는 수밖에… 뒤돌아보니 천왕봉을 둘러싼 구름이 평온하기만 하다.<박모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