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겨울의 끝자락인 이월의 마지막 주말, 평소 가까이 지내는 선배 두 명과 경주 남산 역사문화 탐방로 산행을 즐겼다. 한 명은 게스트로 참석했고 한 명은 주말마다 같이 다니는 선배다. 겨울을 버텨낸 앙상한 나뭇가지의 새순에는 벌써 봄의 기운이 완연하게 느껴진다. 이월 첫주 남산을 찾았을 때는 봄의 전령사 복수초가 이미 봄을 알려주었다. 오전 9시, 포항을 출발해 9시40분 동남산자락에 자리잡은 통일전을 지나 마을을 따라 계속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남산동 공용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근처에 있는 카페 ‘늘人’에 들러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통창을 통해 남산의 전경을 잠시 감상한다. 마음씨 좋은 총각사장이 갓뽁아낸 구수한 커피를 마시고 동·서삼층석탑이 있는 염불사지, 묘목농장을 따라 걸으며 대안당, 칠불암, 신선암으로 향한다. 이후 봉화대능선, 이영재, 용장사곡, 임도를 따라 금오봉(468M)에 올랐다가 팔각정터, 남산부석, 지암곡마애여래좌상, 지암곡 제3사지 삼층석탑, 지암곡 제2사지, 제1사지, 동남산 탐방지원센터, 공용주차장에 도착하는 것이 오늘의 코스다. 칠불암을 오르는 코스는 편안하다. 이 길을 오를 때면 늘 드는 생각이지만 정말 걷기 좋은 길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좋은 길은 지루하지 않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어야 한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이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숨을 가다듬다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도 한다. 우수를 하루 앞둔 지난 둘째주 주말은 구룡포청소년수련원 뒷산에 봄마중놀이를 갔다. 일명 원데이 캠핑(One day camping)이다. 봄마중놀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특별한 것은 아니고, 가까운 선후배가 모여 전망좋은 편평한 산자락에 천막을 치고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거나 고요한 산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구룡포 바다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편히 쉬는 것이다. 높은 산을 오르며 숨을 헐떡이며, 심장이 요동치는 등산은 쉬고 하루쯤 뒤로 물러나 고요함을 즐기며 멍 때리는 시간을 보냈다.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솔숲길을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며 계곡길을 따라 쉬엄쉬엄 오르니 칠불암 아래 있는 크게 편안한 집, 대안당(大安堂)이다. 주차장에서 1.7Km의 거리다. 대안당 옆 계곡에는 약수터가 있다. 대안당 마루에 앉아 잠시 쉬면서 선배가 준비해온 영양 가득한 물을 한 잔씩 나눠 마신다. 날씨가 따뜻해서 칠불암을 오르는 신도들과 등산객들이 제법 많다. 일행은 인증샷을 누르고 일어나 돌계단을 올라 칠불암에 닿았다. 칠불암은 경주 남산에서 가장 큰 불상을 갖춘 사찰로서 신라 고승 원효(元曉)가 머물면서 대안(大安)의 가르침을 받았던 도량으로 전해진다. 칠불암이라는 이름은 절마당에 있는 바위에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을 비롯한 사방불(四方佛)이 조각돼 있기 때문이다. ‘경주남산칠불암마애불상군’(慶州南山七佛庵磨崖佛像群)이라는 이름으로 경주 남산의 유일한 국보다. 칠불암불상군은 토함산 석굴암을 향해 있고 석굴암은 문무대왕릉을 향해 있다. 경주의 불상들은 대체로 해뜨는 곳을 향해 있다. 등산객들이 부처님 앞에 업드려 큰절을 올린다. 칠불암 불상군터는 오랫동안 숲에 가려져 있다가 일제시대 들어서 지역민들이 찾아 낸 것이라고 한다.칠불암에 올 때면 체코에서 온 휴정스님(비구니승)이 늘 웃으며 맞아주었다. 오늘은 다른 비구니 스님이 낭랑하게 염불을 하고 계신다. 칠불암에는 앉을 자리를 많이 준비해 놓아 편히 쉬었다 갈 수 있다. 칠불암 우측 대숲을 지나 다소 가파른 계단을 따라 200m 정도 오르면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 나온다. 얼굴은 풍만하고, 지그시 감은 두 눈은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구름 위의 세계에서 중생을 살펴보고 있는 듯하다. 오른손에는 꽃을 잡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서 설법하는 모양을 표현하고 있다. 큰 바위에 올라 시원스럽게 펼쳐진 산야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슴이 확 트인다. 조금 걷다가 봉화대능선 입구에서 1.8Km의 거리에 있는 이영재로 발길을 옮긴다. 이영재에 도착 후 계속 걷다보니 용장사곡, 임도가 나온다. 삼화령, 비파골의 전설, 남산과 망산의 유래 안내판을 보며 임도를 따라 부지런히 가다가 비스듬한 산길을 오르니 금오봉(468m)이다. 금오봉은 매월당 김시습의 일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선배들과 인증샷도 남긴다.
금오봉에서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헬기장을 지나 우측 작은 산봉우리, 지암골 팔각정터 방향으로 들어선다. 입구 산꼭대기 암반에는 ‘남산관광일주도로준공비’가 우뚝 서 있다. 드디어 팔각정터에 도착. 팔각정이 있던 자리에는 여덟 개의 돌기둥 자국만 남아있다.시간을 보니 오후 2시가 지났다. 따스한 볕이 드는 곳에 자리를 깔고 배낭에 든 도시락과 먹을 것을 꺼내 늦은 점심을 먹는다.
걷기 처방을 하는 김종우 한의사는 "걷고 보고 먹는 것이 곧 삶이다"고 했다. 살면서 중요한 것은 쉬어감일 것이다. 전망좋은 곳에서 대화를 나누며 먹는 오찬은 부족함이 없다. 게다가 선배의 낭만적인 노래 한자락과 후식까지 곁들이니 모든 게 넉넉하다. 근처 나무위에 앉은 까마귀 몇 마리는 먹을 것을 달라고 말을 건넨다. 선배는 까마귀들에게 먹을 것은 푸짐하게 나눠준다.
산정에는 추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땅을 뚫고 고개를 내미는 새싹에서 봄의 기운이 느껴진다. 팻말을 보니 통일전주차장까지는 2.55Km, 지암곡 3사지 삼층석탑까지는 0.45Km다. 편안하게 쉬다가 하산을 하기로 한다. 하산을 할 때는 올라갈 때보다 더 천천히 걷고, 보폭을 줄이면서 스틱으로 무릎의 하중을 줄이며 걸어야 한다. 선배가 앞서고 뒤를 따라 가파른 길을 조심해서 내려가다 고개를 들어 위쪽을 보니 남산부석(南山浮石)이다. 남산부석은 큰 바위 위에 부처님 머리처럼 생긴 바위가 얹혀 있어 마치 커다란 좌불처럼 보이는 바위이다. 바위가 허공에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하여 부석이라 부르고 있으며, 버선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과 같아서 버선바위라고도 부른다. 이 바위는 경주 팔괴의 하나로 생김새가 괴상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앙하고 있다. 남산부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고 하산하다보니 암벽에 지암곡마애여래좌상, 마애여래보살상이 새겨져 있고, 지암곡 제3사지삼층석탑, 지암곡 제2사지, 제1사지 삼층석탑이 차례로 나온다.
지암곡 3층석탑은 경주 남산의 사자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해발 310m의 완만한 능선 사면(斜面)에 있다. 이 석탑은 무너져서 1층의 탑신(塔身)받침을 제외한 나머지 탑재가 능선과 계곡에 흩어져 있었는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0년에 발굴조사하고, 2003년 1월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고 한다.3층석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고 지암곡으로 곧장 내려오니 동남산화장실에 이어 탐방지원센터다. 탐방센터에서 남산동 공용주차장에 도착하니 5시 가까이 되었다. 오늘 산행은 남산 솔숲길을 천천히 걸으며 일상속에서 당연히 여겼던 소중한 것들에 대한 사랑과 감사로 보낸 일정이었다. 인생의 쉼표는 걷기라는 말이 실감나는 하루다. 내일을 위한 풍성한 에너지가 가득 충전되었음을 느끼며 이른 귀가를 서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