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레스토랑에서 한국인 청년이 포함된 7,8명의 순례자들과 저녁을 먹고 왔다. 일찍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옆 침대의 스페인 남자가 계속 기침을 해댄다. 심한 감기에 걸린 듯하다. 투숙자가 3명뿐이어서 쾌적한 밤을 기대했건만 이건 또 뭔가. 가뜩이나 잠으로 가는 진입로가 긴 나로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별로 참으려는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다. 배낭을 뒤져 감기약을 꺼내 건넸다. 이거 먹어. 괜찮아 쿨럭. 감기약이야 먹어. 괜찮다고 쿨럭쿨럭. 먹으라니까. 괜찮다니까 쿨럭쿨럭 쿠울럭. 그는 끝까지 내 호의를 거절했다. 사실 그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위한 것이었으니 호의가 아닌 부탁이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쿨럭 거리던 그가 그제야 약간 미안했는지 어딘가로 나간다. 낮에 본 그는 배낭도 없고, 차림새도 일상복이었다. 동년배쯤으로 보이는 리셉션 직원과의 친근한 대화 분위기로 보아 마을주민이거나 알베르게 자원봉사자일지도 몰랐다. 그런 그는 왜 약을 거부했을까. 아마 낯선 외국인이 주는 약에 대한 불신 탓이 아니었을까 싶다. 의심하는 자에게 반복적인 권유는 더 큰 의심을 낳는다. 이럴 때는 백약이 무효다. 조용히 약을 쟁여 넣었다. 무리아스의 씁쓸한 밤이 깊어갔다. 얄망궂게도 까미노에서 내가 가진 감기약은 두 번이나 불신과 오해를 불러오는 매개물이 되고 말았다. 사람을 살리는 약이 관계를 죽여 버리는 독이 되고 만 것이다.다음 날인 18일, 어느새 까미노 22일째다. 5시 10분 산 미구엘로 향했다. 32킬로미터를 걸어야 한다. 발밑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조심스럽게 발을 내밀었다. 풀숲을 가로지르는 까미노에 이정표가 불빛을 받으며 서 있다. 하단에 남은 거리 258.7킬로미터가 새겨져 있다. 542킬로미터 이상을 걸어왔다는 얘기다. 까미노 800킬로미터가 한 사람의 일생이라면 지금 이 곳은 50대 중반쯤 되는 지점이다. 인생의 황금기인 40대 중반부터 50대 중반까지 나는 지옥에서 ‘장기체류’하고 있었다. 아니구나. 그냥 내던져져 있었구나. 나는 입구가 어딘지, 출구가 어딘지도 모른 채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 외롭고 어두운 길 위에서 50대 너머로 얼핏얼핏 보이기 시작하는 60을 바라보는 심경은 참혹하였다. ‘길을 잃었을 때는 처음 길을 잃었던 그 장소로 다시 돌아가라.’ 어린 시절 어머니는 내게 그렇게 가르쳐 주셨다. 하지만 유감이게도 나는 길을 잃은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함께 외눈박이가 될 수는 없다는 마음이 더 컸다. 잠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는 비굴해지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만 커져버렸다. ㅡ우리는 모두 본심(本心)을 잃고 있다.ㅡ이 길은 공멸로 가는 길이다.ㅡ줄 세우지 마라. 줄 서지 마라.ㅡ‘절대권력’의 끝은 절대 불행하다.ㅡ도대체 당신들은 신도들에게 뭐라고 설법하는가.ㅡ지하에서 종조(宗祖)께서 울고 계신다. 내 글과 말에 돌아오는 메아리는 딱 한 사람의 귀엣말이었다. ‘이것은 자폭테러다.’모두가 내 말을 들었지만 아무도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사랑이 없으면 지옥도 없다.’던가. 자의식이 약하면 지옥 할애비도 없다. 감찰기관인 사감원의 출두요청이 왔다. 창과 창을 부딪치고 칼과 칼을 부딪치며 버텨냈다. 간신히 형틀에 매이는 일은 피했으나 집행부가 휘두르는 보복의 칼날은 피하지 못했다. 활짝 지옥문이 열렸다. 어디선가 ‘웰컴 투 헬, 모든 희망을 버려라.’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인사보복보다 ‘집단 이지메’가 더 치명적이었다. 나에게는 세상 한 쪽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었고, 사람들에겐 등 뒤에서 가랑잎 하나 지는 일이었다. 나는 곧 끝나리라 위무했다. 이 미친 듯이 날뛰는 바람이 잠들고, 그들만의 잔치가 끝나고 나면 그때 그들은 한 점 부끄러움과 마주서리라, 만유인력의 법칙만큼 확실한 만유인과의 법칙이 있으므로 결국은 사필귀정하리라, 그리 믿었다.아무리 인간세계를 위선과 거짓이 지배한다 해도 악이 압도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아니, 그때만 해도 위선과 거짓이 인간세계를 지배하는 줄 몰랐다. 인간세계 선과 악의 지분은 반반씩이니까 어느 한쪽이 압도할 일은 없다고 여겼다. 누구였던가. 그런 점에서 이 무렵 내게 ‘순진하다.’고 말해 준 ‘발랑 까진’ 그의 말은 옳았다. 가까운 한 동료가 ‘지금이라도 우리와 함께 가자.’며 내 안위를 걱정해 주었을 때 처음으로 사람의 진심을 느끼고 위안을 얻은 적은 있었다. 서로 다른 입장을 떠나 유일하게 인간적 감정을 느끼게 해 준 그는 나의 인간에 대한 마지막 희망이기도 했다.그러나 도둑떼의 ‘칼춤’에 마침내 주인이 피눈물을 흘리며 내몰리는 현장을 지켜보며 나는 절망했다. ‘정의’와 ‘진리’ 따위의 단어들을 경멸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였다. 도둑떼는 ‘거털먼’(거꾸로 매달아 놓고 털어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을 사람)으로 공인받는 사람을 도둑으로 몰았다. 그는 전임 집행부 수장으로서의 공적뿐만 아니라 금도 넓은 마음그릇, 언행일치에 의한 명확한 태도, 수행력, 포교능력, 위아래를 아우르는 친화력, 애종심 등을 두루 갖춘 독보적 인물로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오랜 도반으로서 경쟁심과 열등감에 시달리던 ‘도둑떼의 수령’에게는 종권(宗權) 최대 장애물이었다. 그는 ‘거털먼’과는 다르게 ‘십진필(10미터 앞에서 진공청소기를 돌려도 1분 만에 필터가 막힐 사람)’이었다. 그에겐 항상 비릿한 냄새가 풍겼고, 은밀한 얘기들이 따라 다녔다. 주위엔 하이에나들이 몰려 들었다.‘거털먼’의 후임 행정수장인 ‘십진필’은 법원에서조차 증거 없다고 무혐의 처분했음에도 ‘거털먼’과 측근들을 온갖 추악한 방법으로 덮어씌운 후 축출해 버렸다. 깨끗한 옷을 내다버리면 더러운 옷이 깨끗해진다고 믿는 듯 했다. 어떤 이들은 도둑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어떤 이들은 알면서도 ‘이것도 인연’이라며 받아들이거나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더 사악한 이는 ‘나도 실은 이쪽이야.’라며 ‘수상한 커밍아웃’을 하기도 했다.더욱 가관인 이는 ‘양다리’를 걸치고 지켜보다 전세가 기울자 해괴한 논리로 한 쪽 발을 거두어들인 후 ‘인민재판’을 자처했다. 그는 대중 앞에서 ‘(부역으로 오해받을만한 행동을 한 것을) 참회한다.’고 읍소해 ‘면죄부’를 받아내기도 했다. 역겨운 행동을 보는 일은 역겨웠다. 나는 내부 매체를 통해 에둘러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드러냈다. ‘십진필’을 비롯한 ‘홍위병’들과 ‘완장’들에게도 신문, 잡지 등을 통해 비유와 ‘돌려까기’로 ‘소심한 저항’을 이어갔다. 이 일은 후일 부메랑이 돼 돌아온다.절대권력인 ‘십진필’에 빌붙어 연옹지치와 호가호위를 일삼다 십 수 년 후 ‘절대권력’이 붕괴하기 시작하자 가장 앞서 침을 뱉고 돌아서서 그 자리를 탐하는 자들도 있었다. 경쟁자를 실각시키려 동료의 비위사실을 침소봉대해 방송국에 허위제보 했다가 제 발등을 찍은 자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부끄러움이 없었다. 단연코 인격의 척도는 부끄러움이다. 오직 짐승과 사악한 자만이 부끄러움을 모른다. 나는 쥐와 바퀴벌레가 부끄러워서 쥐구멍과 싱크대 밑으로 숨어들어간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없고, TV카메라 앞에선 사이코패스, 오시오패스가 부끄러워서 모자와 마스크를 둘러쓰고 있다는 신문방송을 접한 적도 없다. 부끄러움은 인격의 최후저지선이다. 하여 ‘유사인간(類似人間)에 대한 최고의 경멸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다.참회와 개전의 정은 부끄러움을 느낄 때라야만 가능하다. 지금도 그들은 어디선가 자기도취에 빠져 ‘명 법문’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자의식이 없으니 수오지심도 없다. ‘황홀한 도취’에 빠져 있으니 법문에 자신감도 넘친다. 침단(針端)의 부끄러움만 있어도 결코 할 수 없는 ‘자신을 똑바로 보라.’는 말을 하는 신공(神功)은 경이로울 지경이다. 해리성정체장애가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에게 ‘바른 사람이 사법을 설하면 사법도 정법이 되지만, 그릇된 자가 정법을 설하면 정법도 사법이 된다.’는 야부 스님의 일침을 들려주면 우이독경이 될까.내 경멸의 대상이 ‘정의’와 ‘진리’에서 ‘잉간’으로 전이되어 갔다.내게 ‘순진하다’ ‘종단 정서를 모른다.’고 말하는 그들보다도 그런 단어들이 ‘허물’이 되어 버린 현실이 더 원망스러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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