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째로 자주 불렀던 노래는 아마 ‘목련꽃 그늘 아래서’였을 것이다.‘목련꽃 그늘 아래서/그대를 생각하노라/목련꽃 그늘 아래서/그대를 기다리노라/그대가 목련을 닮아/어쩌다 목련을 닮아/내 가슴에 시들지 않는/목련꽃 피게 하느뇨/그리워 그리워서/나 그대 그리워서/목련꽃 그늘 아래서/한 마리 학이 되었네’기다림의 정서는 애처롭다. 대개 저런 기다림의 끝에는 기다림만 있다. 대체 저 목련꽃이 몇 번을 피었다 져야 저 이의 기다림에 끝이 보일까. 그리운 이를 기약없이 기다리는 일은 가장 잔인한 형벌이다.언젠가는 내려놓아야 할 감정임을 예감하며 기다리는 자의 노래를 부르다 보면 가슴 속 한 줄기 알싸한 바람에 목련향이 실려 오는 듯하다.다음 생을 예약할 수 있다면 나는 무명이라도 좋으니 싱어송라이터를 예약하고 싶다. 저렇게 애절히 그리워하는 사람, 저렇게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의 아린 가슴에 단 3분만이라도 위안을 줄 수 있다면 무명이면 어떻고 2류 인들 또 어떠리.안토니오와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며 교감하다보니 역시 소통은 언어가 아닌 마음으로 하는 것이구나 싶다. 까미노에서 친구, 부부, 남매, 모자, 부녀끼리 어깨를 맞대고 대화하며 걷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그들 중에는 틀어져 버린 관계복원을 목적으로 까미노를 찾은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통을 기대하며 걸었던 까미노에서 서로의 차이만 확인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안타까운 공회전만 거듭하다 둘의 거리가 크레바스처럼 벌어지는 것을 애 터지게 바라보아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소통이 쉽지 않은 것은 생각의 적확한 개념화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언어로 변환시키는 과정에서 이미 오염은 발생한다. 설령 이 단계에서의 오염은 용케 피한다 해도 타자의 개념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오염은 또 어찌 할 것인가. 두 번의 개념화 과정은 오염과 왜곡을 심화시켜 양자의 거리를 더 벌려 놓는다.‘그 때 네가 그랬잖아’ ‘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이런 흔하디흔한 대화가 바로 개념화가 가져오는 불가피한 오염의 결과이다. 이렇게 대화로도 표면화 되지 않은 내면의 ‘섭섭함’과 ‘오해’도 대개 개념화에서 온다. 화자와 청자 간에 운명처럼 가로놓인 강에는 다리가 없다. 그 다리는 언어가 아닌 마음으로 놓아야 한다.그렇다면 서로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듯한 현상은 무엇일가?타자와의 주고받은 영향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원인으로부터 발생한 영향 탓이라는 라이프니츠의 말에서 해답을 구해 볼 수 있겠다. 일찍이 라이프니츠는 ‘모나드(monad)에는 창이 없다.’고 했다. 그는 모나드(만유를 조직하는 단일한 개체, 단자單子)들 간에 어떤 영향을 주고받을 수 없고, 오직 세계는 무수한 단독자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모나드들의 변화는 내적인 원리로부터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변화일 뿐 외부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자신의 내면에서 타자에 대한 이해의 필요와 욕구가 발흥되었을 때 소위 소통이 이루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 또한 이미 ‘주름’속에 예정되어 있던 현상이 우연히 나타난 것에 불과하므로 외부의 작용에 의한 변화와 소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타자와의 소통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거개의 소통이란 기껏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두루뭉술 일단 오케이.’일 뿐이다. 일종의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잠정적 합의)인 셈이다.왜 석가세존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 말과 문자가 아닌 이심전심으로 가섭존자에게로 가게 되었는지 이해가 된다. 창이 없는 모나드 간의 소통은 개념화의 과정을 과감히 걷어낸 상태, 즉 불립문자(不立文字),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글과 말이 끊어진 바로 그 자리가 소통이 가능한 유일한 통로인 셈이다.
이러한 소통을 충격요법으로 즐기는 ‘선승들의 놀이’가 바로 선문답이다. 답변자(제자)는 질문자(스승)의 말을 뛰어넘는 곳에 있는 본질을 볼 수 있어야 답을 할 수 있다. 둘 사이의 완벽한 소통은 이때 비로소 이루어지게 된다.모나드들은 그래서 본질적으로 고독하다. 이 세계의 질료가 고독이므로, 그대의 질료 또한 고독이므로, 고독을 두려워하지 말고 더 큰 고독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라. 그때 그대는 비로소 자신과, 세계와, 우주와 소통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니련선하 강가의 보리수 아래 고오타마 싯다르타가 그랬던 것처럼.몰데라 다리를 건너 왼쪽을 조금 가자 철로를 넘어가는 철제다리가 나타난다. 녹색 철제 다리는 가파른 계단 대신 긴 갈지자를 그리며 완만하게 올라간다. 바이크를 탄 순례자들을 위한 배려인 듯 했다. 쿵쾅거리는 철제다리를 건너자 곧 아스트로가가 나타났다. 번잡한 큰 도시는 관심 밖이라 그냥 통과만 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아스트로가에서 묵을 것이다. 그러면 4킬로미터 앞에 있는 작은 마을 무리아스는 한산하고 호젓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과 부대끼며 불편해 하느니 차라리 사람이 그리운 곳에서 몸이 조금 불편하게 지내는 게 훨씬 낫다.한껏 달구어진 태양이 기승을 부리던 2시 40분쯤, 예약한 무리아스의 무니시팔 알베르게(공립 순례자 숙소)에 도착했다. 공립인데도 아주 소박한 규모다. 한적해서 더 좋다. 1층 건물에 침대도 1층 침대만 띄엄띄엄 놓여있고 투숙객도 몇 없다. 기대한 대로다. 한데 와이파이가 안 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리 봐도 공립 같지는 않은데 그날의 메모가 흔들림 없이 무니시팔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런 줄로 안다.리셉션에 식사가 가능하냐고 물었다. 여기서는 안 된다며 길 건너 알베르게에 식당을 알려준다.
길 건너 알베르게로 간다. 밖에서 볼 때 보다 규모가 크다. 뒤쪽엔 잔디로 덮인 정원에 일산(日傘)과 테이블까지 놓여 있다. 식사는 6시에 모여서 한단다. 음식을 예약해 놓고 정원에 앉아 간단한 요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숙소로 돌아와 큰 소나무 그늘아래 벤치에 앉아 쉬면서 손발톱을 잘랐다. 성스러운 순례길에서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손발톱을 깎는 건 ‘비추’다. 아무리 보는 눈이 없기로 먼 곳에 있는 오랜 친구에게 엽서는 쓰지 못할지언정 쪼그리고 앉아 손발톱이나 깎는 건 성스럽지 않고 상스럽다. 그나마 ‘목련꽃 그늘 아래’가 아니길 망정이지.(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