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24년 후 돈 수에로 최후의 결투는 또 다른 연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두 번 째 춤사위’였던 것은 아닌지 짓궂은 궁금증이 인다. 첫 번째 결투가 해피 엔딩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처음엔 뜨거웠던 사랑이 시간의 풍화에 못이겨 바스러져 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으니 괜한 궁금증은 아니다.하지만 이런 의문은 돈 수에로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으니 이쯤 해 두자. 게다가 그는 기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기사(騎士)가 아닌가. 무죄추정의 원칙은 그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인 두비오 프로레오(in dubio pro reo 애매한 것은 피고인의 이익으로)’다리는 돈 수에로의 사랑만큼 화려했다. 허리 높이의 난간까지 돌로 이루어진 이 석조다리는 자연미를 강조하기 위해 왼쪽으로 가볍게 휘어지면서 강 건너 집들 속으로 이어진다. 집들이 강가에 바투 들어서 있어서 다리는 다리 좌우의 집들 사이에서 끝이 났다.돈 수에로의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탄생한 소설 <돈키호테>의 유명한 대사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여전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불가능한 것을 손에 넣으려면 불가능한 것을 해야 한다,’‘더 나은 세상을 꿈꾸어야 한다. 꿈꾸는 자와 꿈꾸지 않는 자 누가 미친 건가?’‘나는 야망과 위선, 선물 받은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가장 어려운 길에서 나만의 영광을 찾고 있다. 이것이 어리석고 바보 같은가?’돈키호테는 니체의 말대로 ‘베수비오 화산의 언덕’에 ‘자신의 궁전’을 지은 사람이다. 평탄하고 안일한 길이 아닌 거칠고 험난한 길을 선택한, 전사(戰士)의 삶을 산 인물이다.그는 중세기사들에 관한 소설에 취해 환상과 과대망상에 빠져버린다. 엉뚱한 언행을 일삼아 미친 사람 취급받지만 가식과 위선에 찬 세상 사람들에게 ‘정작 미친 것은 당신들.’이라는 통쾌한 똥침을 날릴 줄 아는 ‘깨시민’이기도 했다. 그가 꿈꾸던 정의로운 세상은 아직도 미완이다. 여전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에게 ‘정신 나간 사람’이라거나 ‘돈키호테’라고 손가락질 한다. 정작 미친 것은 자신들이라는 사실은 새까맣게 모른 채.돈키호테는 단순히 허황된 꿈을 좇는 ‘미치광이’가 아니다. 돈키호테는 현실을 알면서도 꿈꾸기를 포기 하지 않는 자, 가식과 위선에 구역질을 느끼는 자, 비양심과 비도덕을 거침없이 공격하는, 행동하는 양심의 전형이다. 소설 <돈키호테>가 최고의 소설로 손꼽히고, 널리 사랑받고 있는 것을 보면 수많은 돈키호테들이 꿈꾸는 ‘사람 사는 세상’이 꼭 불가능하지만은 않겠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게 된다. 이 또한 허황한 꿈이라 비웃고 조롱하는 자 물론 있겠지만. 그런 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뮤지컬 노래 한 곡이 있다. 소설 <돈키호테>를 소재로 한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중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노래의 가사 일부다.불가능한 꿈을 꾸고/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견딜 수 없는 슬픔을 참으며/용사들도 감히 가려하지 않는 길을 달리고/바로잡을 수 없는 불의에 맞서고/…옳은 것을 위해 싸우리/…그리고 나는 아네/내가 이 영광스런 도전에서 진실 될 수 있을 때만/ 내 심장이 안식 속에서 평온할 수 있다는 것을/그리고 세상은 보다 나아지리니/조롱당하고 상처로 뒤덮인 한 남자가/여전히 마지막 용기 한 줌을 끌어내어/도저히 닿을 수 없는/그 별에 닿으려 기를 쓴 덕분에.닿을 수 없는 별에 닿으려는 돈키호테의 몸짓을 비웃고 조롱하는 자들이 넘치는 사회는 결코 ‘사람 사는 세상’이 될 수 없다. 함께 꿈꾸지 않는 자가 조롱받는 사회라야 희망이 있는 사회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희망이 있는 사회인가 아닌가.소설 <돈키호테>에 영감을 준 돈 수에로의 사랑과 죽음의 현장인 ‘명예로운 걸음의 다리’를 지나 얼마쯤 가자 황톳길이 시작된다.벨기에에서 온 43살의 돈 안토니오를 만나 동행하기 시작한 것은 황톳길이 시작되고 한 시간 쯤 지났을 때였다. 이날따라 까미노에 순례자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던 터라 안토니오도 내가 반가운 모양이었다. 국수 가락처럼 툭툭 끊기는 짧은 대화로도 안토니오의 배려와 인내심 덕분에 그럭저럭 소통은 가능했다.걷다보니 바지 뒷주머니의 휴대전화기에서 갑자기 한국가요가 흘러나온다. 저장해 둔 가요 하나가 우연히 재생이 된 듯 했다. 내가 음악을 중단하고 전화기를 집어넣자 안토니오가 ‘케이 팝이야?’ 한다. 그렇다고 하자 ‘조금 슬픈 느낌’이라는 감상평을 내놓는다. 한류를 타고 해외로 널리 퍼진 케이 팝은 대개 신나는 댄스곡들이라 안토니오에게 조금은 생소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잠깐 듣고도 비교적 정확한 평을 하는 걸 보니 역시 음악은 만국공통어라는 말이 실감난다. 에는 노래(음악)가 둘의 소통을 크게 도와주었다.안토니오가 ‘방금 그 노래 내가 좋아하는 아프리카 음악과 느낌이 비슷해.’하면서 자신의 휴대전화기를 꺼내 음악을 재생한다. 영상과 함께 나오는 음악의 분위기가 그의 얘기처럼 정말 비슷한 느낌이다. 특히 중간에 흐느끼는 색소폰 선율도 비슷한 느낌을 내는데 한 몫을 하는 듯 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안토니오가 ‘색소폰을 벨기에가 처음 만든 거 알아?’ 한다. 내가 깜짝 놀라 ‘정말이야?’ 하자 그가 미소로 답한다. 벨지움 엄지 척!내가 ‘한국인들과 아프리카인들은 아픔이 많으면서도 흥도 많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면서 ‘음악적으로도 비슷한 정서를 담고 있는 것 같다.’고 하자 안토니오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가 한국의 역사와 정서를 잘 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노래(음악) 한 곡에도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지는 그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나의 까미노에 노래가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했을까. 10년 이상 요양원에 계시는 늙은 어머니를 두고 이역만리 떠나온 터여서 홀로 걸을 때는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물밀 듯이 밀려올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병들어 누우신/우리 엄마 드리러/약수 뜨러 가는 이 길은/왜 이리도 추우냐/……. 새벽마다 이슬을 모아/약수 떠다 드려도/우리 엄마 아프신 엄마/병은 점점 더하고/봄이 와야 나물 뜯어다/죽을 끓여 드리지…….’ 노래를 하며 미안함과 그리움을 다독였다.천국에는 엄마와 아기, 웃음소리와 꽃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 적이 있다. 여기에 또 하나를 추가해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노래(음악)를 선택하겠다. 내 천국의 목록에 종교와 문학은 없다. 천국이니까 종교가 없는 것은 당연하고, 문학은 노래 속에 더부살이 할 것 같다. 행복할 때 인간은 가장 먼저 웃고 그 다음은 노래를 한다. 이어서 춤을 추기도 한다. 누구도 노래 대신 가장 먼저 시를 읊거나 소설을 쓰지는 않는다. 문학은 고작해야 웃음과 음악과 무용 다음 순위 쯤 될까.노래(음악)는 슬플 때도, 기쁠 때도 가장 먼저 달려와 그 사람을 어루만져 준다. 평범한 사람들이 삶의 ‘빌드 업’을 시도할 때 노래의 지분은 놀라울 정도로 크다. 그때 시와 소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고작해야 경찰처럼 5분 늦게 나타난 시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감탄사와 느낌표를 앞세워 뒷북이나 칠 것이다. 종교는 ‘빌드 업’을 시도할 때는 노래 보다 앞자리에 잠시 서 있기는 하겠지만 ‘빌드 업’이 완성된 이후에는 자의반타의반으로 슬며시 뒤로 물러날 것이다. 종교에도 그 정도의 센스는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의 종교에 대한 믿음의 절반 정도는 바로 이 믿음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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