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해 운영한 ‘부패ㆍ공익신고 상담’ 통계를 분석한 결과 가장 부패·공익신고가 많았다고 밝혔다. 2022년에 비해 무려 5배나 증가했다.
각 지자체는 공직자에 대한 공무원 비리 부패행위에 대해서는 일벌백계의 원칙으로 단호히 대처할 것이고, 부정부패나 비리 등을 차단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펼쳐나가고 있다고 한다.하지만 공무원의 비리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납품업체 계약을 돕고 뇌물을 받아 구속되는가 하면, 공사를 주겠다면서 금품을 요구하고, 인사청탁 또는 도박, 음주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부정부패행위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공직자의 부정부패, 비리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하다. 이는 전국의 지자체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한다.안동시 길안면에는 보백당 김계행을 모시는 묵계서원이 있다. 서원 맞은편 산 아래는 그가 공부하며 만년을 보냈던 만휴정이 있다.그곳에는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이라는 글귀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오, 보물이라면 오직 청백 뿐”이라는 뜻이다.김계행은 안동 풍산읍 사람으로 고려 개국 공신 삼태사(三太師)중 한 명인 金宣平의 후예다. 1447년에 진사가 되었고, 성균관에 들어가 김종직과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하며, 40대 중반에는 고향집에 머물며 김종직과 우의를 다졌다고 한다. 49세에 大科에 급제하고, 성종 11년인 1480년 50세의 늦은 나이에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사헌부 감찰을 시작으로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 등의 요직을 두루 맡았다. 그는 벼슬살이를 하면서 조정과 왕실의 병폐에 대하여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여러 번 사직과 복직을 반복했다고 전한다. 김종직과의 인연으로 1498년 무오사화 때 태장을 맞고 70세 되던 해에 연산군이 다시 지난 사건을 들추어 5개월 동안 옥살이를 겪기도 했다. 71세 때 만휴정을 짓고 당시의 정치적 문란과 폐단을 버리고 낙향한다.이후 임봉산 북쪽 자락, 맑은 물소리 나는 송암폭포를 내려다보며 바람과 달을 가슴에 담고, 맑은 물소리 들으며, 앞 시내에 깔린 돌과 벗하며, 만년을 즐기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곳이 지금은 널리 알려져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하니, 세월은 흘러도 보백당의 삶은 더욱 빛난다. 보물이라면 오직 청백뿐이라는 김계행의 청빈한 삶은 오늘의 공직자들이 본받아야 할 표본이다. 공무원에 대한 처우개선도 과거에 비해 많이 나아졌고 직업선호도 순위도 최고다. 공직자는 보백당 김계행의 삶을 배우며 청렴의 의무를 지켰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