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 롯데백화점 계단을 오르면서
문득 괴테를 생각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생각한다 베르테르가 그토록 사랑한 롯데가 백화점이 되어 있다 그 백화점에서 바겐세일하는 실크옷 한 벌을 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친구의 승용차 소나타 3를 타면서 문득 베토벤을 생각한다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3악장을 생각한다 그가 그토록 사랑한 소나타가 자동차가 되어 있다 그 자동차로 강변을 달렸다 비가 오고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여자 고흐의 그림 [슬픔]을 생각한다 내가 그토록 사랑한 [슬픔]이 어느새 내 슬픔이 되어 있다 그 슬픔으로 하루를 견뎠다 비가 오고 있었다 <수필가가 본 시의 세상>
살다 보면 뜻이 다르고 의미도 전혀 다른데 같은 언어가 있다. 처음 썼던 사람의 고유한 사유(思惟)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가벼운 어감만을 인용하여 대충 써 버린다. 그런 경우 깊이는 사라지고 얕은 감각만 팔랑거린다. 그럴 때 슬퍼진다. 씁쓸해진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가 사랑한 롯데가 롯데 백화점으로 의미 전환이 되어 시인을 씁쓸하게 한다. 시인이 즐겨 듣기도 했던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3악장 소나타가 자동차 이름으로 변신되어 어디 건 상관없이 달리고 있다. 왠지 허무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예술적으로 고귀한 이름들이 상술에 이용되고 있다는 느낌이 견딜 수 없어진다.고흐의 그림 [슬픔]-<울고 있는 노인>이거나 <자화상>등을 바라보고 있으면 말할 수 없는 서글픔의 덩어리가 가슴을 치밀어 오른다. 그 그림 속의 느낌이 시인의 슬픔으로 밀려온다.깊은 상심으로 다가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세상은 왜 깊은 사유를 얕은 생각으로 일격에 끌어내려버리는가. 왜 상대방이 긴 시간 할애하고 깊이 더 깊이 다지고 다져서 맑디맑아진 영혼을 상술로 파괴해 버리고 마는 것일까. 내게도 늘 겪는 슬픔이 시인에게도 있었음에 승화된 위로를 받는다. 공감하며 동해의 푸른 바다의 푸른 바람에 가슴 속 빈 터를 채워 본다. 격려하듯 투둑 빗방울 몇 개, 우울해진 마음 위에 앉는다<박모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