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도 10여 년 전 처음 까미노를 계획했을 때는 산악자전거를 먼저 생각했었다. 당시만 해도 10여 년간 MTB를 즐기던 때여서 도보보다는 라이딩이 더 편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자전거로 세계여행’이라는 유명무실한 카페도 열었을 정도니까.그러나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미리 알아본 바에 의하면 내 라이딩 기술로는 통과하기 어려운 돌이 많은 오르막 내리막 구간이 많다는 점이었다. 이런 구간은 체력보다는 라이딩 기술이 더 필요하고, 때로는 ‘끌바(바이크를 끌고 간다는 바이크 족들의 은어)’도 불사할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바이크 족들에게 ‘끌바’는 상당한 굴욕감을 안겨 준다. 벨로라도에서 아헤스로 가던 길에 있었던 일이다. 저 앞쪽으로 막 내리막길이 시작되려는 지점에 반대쪽에서 ‘끌바’로 언덕을 오르던 50대쯤으로 보이는 한 라이더가 마지막 고비를 몇 발자국 남기고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자전거에는 여행용 가방 두 개가 자전거 뒷바퀴 좌우측으로 걸쳐져 있었다. 마치 당나귀가 짐을 싣고 있는 형상이었다. 나는 자전거 순례에 나선 자신을 보는 듯한 느낌에 인사라도 하려고 눈을 맞추려 했으나 그는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망설임 끝에 ‘부엔 까미노’라고 인사를 건네자 그제야 눈을 마주쳐 준 그 라이더. 그러나 끝내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쳐서라기보다는 굴욕감 탓이었으리라. 이런 굴욕감을 감내할 여유가 없으면 자전거 순례는 쉽지 않다.타이어 펑크를 비롯한 돌발 상황과 부상 등에 대한 대처 능력도 필요하다.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는 여유도 필수다. 낯선 곳에서의 ‘나홀로 장거리 라이딩’은 첫째도 여유, 둘째도 여유다. 그래서일까. 까미노에서 만난 라이더들의 십중팔구는 브라질리언들이었다. 노란 유니폼을 입고 브라질 국기 아 아우리베르지를 달고 5~10명 씩 무리지어 달리는 그들에겐 특유의 여유와 느긋함이 있었다.어디였더라. 까미노 후반에 접어든 어느 날 길가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 중에 한 남녀 라이더가 내 앞에서 자전거를 멈추더니 알콜과 붕대가 있느냐고 물었다. 여성 라이더가 넘어져 무릎을 다친 모양이었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내게는 일회용 밴드 밖에 없어서 미안하다는 말만 연발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들은 ‘괜찮아, 친구! 부엔 까미노’라며 손까지 흔들어 주며 떠났다. 그들도 브라질 사람들이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여유만큼은 확실히 만만(滿滿)했다. 암스텔담에서부터 2천 킬로미터 이상을 달려온 필립 또한 유쾌하고 여유가 넘쳤다. 나도 유럽에서 살고 있다면 필립처럼 자전거를 이용해서 나의 집에서부터 까미노를 시작해 보았으련만.유쾌하기로는 이 식당 주인도 필립에 뒤지지 않았다. 홀에서 연신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춤을 추는가 하면 손님인 내게도 알아듣지 못할 농담과 장난으로 웃음을 선사한다. 한참 분위기 맞춰 한데 어우러져 춤추고 있는 중에 두 친구 팀의 한 길벗이 들어온다. 담배를 구입하러 온 듯 했다. 식당주인과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촬영을 부탁하자 사진을 찍어 준다. 고맙다고 말하고 전화기를 돌려받아 사진을 본다. 사진 속 내 표정이 그로데스크하다.바를 나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 시원한 물이 쏟아지는 수도꼭지가 있다. 물을 몇 모금 마신다. 벤치에 앉아 앱으로 내일 묵을 알베르게를 찾는다. 길벗이 담배를 피우며 숙소 쪽으로 간다. 샤워할 때 연신 잔기침을 하더니 지금은 괜찮은 듯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총총 사라진다.잠시 후 숙소 쪽으로 간다. 지흔 씨가 입구에서 서성이다가 ‘10시가 되면 알베르게 문을 닫으니 빨리 입장하시라.’한다. 깜짝 놀라 시계를 본다. 10시가 살짝 넘었다. 유럽은 10시가 돼도 석래불사석(夕來不似夕)이다. 저녁이 돼도 저녁 같지 않아서 시간관념이 흐려진 탓이었다. 알베르게에 내가 보이지 않자 매사가 허술한 늙은이가 염려돼서 나와 본 모양이었다. 따뜻한 마음이 고맙다. 칼사디야의 악몽 이후 나의 까미노는 혼란스러웠다. 이 아름다운 길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악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혼란하자 매일 빼놓지 않고 하던 순례 관련 메모도 하기 싫었다. 다음날 렐리에고스에서 레온으로 가는 길에 대한 기록이라고는 달랑 산타마리아 데 카바할 알베르게 이름 하나. 그나마 기계적으로 찍어 둔 사진들이 기억들을 소환해 줄 유일한 자료이긴 하지만 레온으로 가던 이날의 기억은 사진을 봐도 그닥 떠오르는 그림이 없다. 새벽 6시 전에 출발해 어두운 길을 가는 도중 깜짝 놀랐던 기억이 유일한 기억이다. 어둠 속에 펼쳐진 농토를 가르며 뻗어있는 까미노를 걷는 중이었다. 갑작스런 한 발의 포악한 총성이 새벽 공기를 찢어버렸다. 타앙―움찔하며 본능적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농토 가운데 여명 속에 외딴 집 한 채가 보인다. 혹시 저 집에 강도가 든 것일까. 아니면 어린 아이가 장난감으로 여기고 만지다가 사고를 낸 것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험난한 인생길에서 그만 내려서기 위해 스스로 방아쇠를 당겨버린 것일까.
어제 저녁을 먹었던 그 바의 파란 벽은 ‘고통 없이는 영광도 없다(NO PAIN NO GRORY)’고 했었는데 그를 짓눌렀던 고통은 죽음보다 무거웠고, 영광은 저승보다 멀리 있었던 것일까. 빛은 금이 간 바로 그곳으로 들어온다는데 그의 마음에 생긴 금에는 왜 빛이 아닌 캄캄한 죽음이 비집고 들어야 했을까. 그의 생애는 ‘용서의 언덕’이 말한 ‘별의 길’이 아닌 ‘바람의 길’을 향했던 것일까. 끝내 ‘별의 길’을 놓쳐버린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일까.인구 100명 당 7.5정의 총기(최근 스페인의 소형 총기류 보유 비율 통계)를 소유하고 있는 스페인임을 감안하면 괜한 걱정은 아니다. 까미노에서 본 들짐승이라고는 딱 한 번 포도밭에서 놀던 토끼새끼 네 마리가 전부였다. 그 흔한 뱀 한 마리 본 적 없을 정도였다. 숲이 없는 탓일 것이다. 그래도 애써 농산물 도둑인 짐승들을 쫓기 위한 총격음이겠지 위안하며 걸음을 재촉했다.25킬로미터를 걸어 오후 1시 조금 넘어 예약해 둔 레온의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마침내 그 힘들다는 메세타 구간이 끝났다. 그런데 사실 나의 경우 메세타 구간이 딱히 더 힘들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아스팔트로 덮인 지방도로를 걷는 구간보다 훨씬 나았다. 길도 메세타 구간이 다른 구간들보다 더 예뻤던 것 같다. 만약 점프를 했다면 지금쯤 크게 후회했을 게 분명하다. 얼떨결에 메세타 구간에 접어들고 난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 차라리 잘 된 셈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