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잠자리에 들 때면 늘 마음이 설렌다. 주말이면 산에 간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행준비물을 챙긴 후 계란프라이 2개와 과일 한 조각, 토마토 주스 한 잔으로 간단하게 조식을 하고 늘 만나던 장소에서 산벗 일행을 6시 50분에 만났다. 영하의 한파라 몹시 쌀쌀하다. 늘 가던 곳에 가서 꼬마김밥을 사고, 7시에 포항을 벗어난다. 사전에 산행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았기에 차를 타고 가면서 눈꽃산행을 할 수 있는 소백산 또는 덕유산으로 갈지를 정해야 했다. 운전을 하는 후배의 결정에 따라 덕유산을 오르기로 했다.필자는 2020년 12월, 덕유산 향적봉을 한 차례 오른 적이 있지만 후배는 그날 같이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차를 달리다가 논공휴게소에 잠시 들러 커피 한 잔과 호두과자 1봉지를 사서 차 안에서 나눠 먹었다. 달리는 차에서 산행대장인 선배는 덕유산 지도를 펼쳐놓고 산행코스를 설명해 준다. 2시간 이상을 달려 10시에 덕유산국립공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를 세우고 등산화를 고쳐 신고 핫팩 비닐을 따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겨울 산행에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핫팩은 필수다.오늘 산행은 주차장, 구천탐방지원센터, 구천동어사길, 백련사, 향적봉(덕유산 정상), 향적봉대피소, 중봉, 오수자굴, 백련사 입구, 구천동 계곡을 따라 내려와 주차장으로 복귀하는 코스다.주차장에서 백련사까지 가는 길은 특별히 어려운 길은 없이 완만하다. 일행이 ‘구천동어사길’을 따라 2Km정도 걷다 보니 우측, 인월암으로 향하는 팻말이 보였다. 구천동 탐방지원센터를 지나 백련사까지는 6㎞ 남짓한 호젓한 산책길이다. 찻길과 숲길, 계곡길을 넘나들며 백련사까지 가는 동안 구천동 게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계곡은 여름에 봐야 제대로지만 한적한 겨울에 보는 운치도 좋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등산객들의 무리에 섞여 걷다 보니 어느새 백련사다. 백련사는 신라 흥덕왕 5년(830년) 무염국사가 창건한 고찰이라고 한다. 대웅전 뒤편을 지나 삼성각 아랫길은 향적봉으로 향하는 본격적인 등산로다. 백련사 삼성각 마루에 앉아 바나나와 홍삼을 마시고 체력을 비축한다. 건너편 산을 보니, 푸른 산, 검푸른 산, 옅은 산, 뿌연 산이 중첩되어 그야말로 산 위에 산, 또 산 위에 산이 겹쳐지며 중첩된 아름다운 설경을 보여준다. 한 폭의 겨울 산수화를 직접 그리는 화공의 기분이 이보다 더할까 싶다. 아래로 눈을 돌리니 백설이 백련사 대웅전과 요사채 지붕과 마당을 가득히 덮어 신비로움을 더 한다.잠시 쉼을 멈추고 본격적으로 덕유산의 품으로 뛰어든다. 눈 쌓인 가파른 능선길을 따라 부지런히 걷는다. 이정표는 없지만 길은 하나로 되어 있어 능선을 따라 꾸준히 가기만 하면 된다. 오늘따라 눈꽃산행을 즐기러 온 산꾼들이 너무 많아 앞사람의 등만 쳐다보며 한 발 한 발 걸음을 딛는다. 세찬바람이 불면서 눈이 사방에서 흩날리기 시작한다. 정상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눈은 많이 내리고 바람은 거세다. 산을 오를수록 눈밭이 장관이다. 걷는 중간중간에 푸른 하늘과 설화를 배경으로 선배는 휴대폰 셔트를 누른다. 손이 시럽고 볼이 차고 입술이 얼었지만 설경에 도취 되어 추위도 도 잠시 잊어버렸다. 그나마 챙겨간 핫팩 덕을 톡톡히 보았다. 정상에 오를 때까지 계속해서 눈이 내리다 보니 주변을 조망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높이가 가늠이 안 되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앞서 오르던 일행은 흩날리는 눈발을 보고 “완전히 흥남부두네, 흥남부두야” 라고 말한다. 오르기가 벅찬 산꾼들은 군데군데 길가에 비스듬히 서서 숨을 고르는 모습도 보인다.   데크 계단이 나오는 걸 보니 정상에 거의 온 것 같다. 눈옷을 입은 철쭉군락과 주목, 구상나무숲의 눈꽃를 보고 산꾼들은 모두 탄성을 지른다. 활짝 핀 눈꽃에 황홀함을 느낀다. 산벗이 이 광경을 놓칠 리가 없다. 각자의 가슴과 휴대폰에 모두 담는다. 조금 더 오르니 너른 평지에다 주변 조망이 뛰어난 덕유산 정상 향적봉(1,614M)이다. 향적봉이 완전히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정상석 옆에서 인증샷을 찍고 싶었지만 많은 사람이 길게 줄을 서서 포기를 하고 정상석을 배경으로 조금 떨어져서 개인 사진을 찍고 단체 인증샷을 남긴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칼바람과 눈발 때문에 정상에서는 점심을 먹을 수 없어 향적봉 대피소로 걸음을 옮긴다. 대피소 주변도 절경이다. 곳곳에서 셔트를 누르는 산꾼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덩달아 즐거워진다. 향적봉 대피소 마당에 라면 냄새가 코로 흘러들어 온다.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 먹는 특별한 점심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지만, 세찬 겨울바람 때문에 점심은 포기했다. ‘덕유산도 식후경’이 불필요한 말이 되었다. 대피소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리를 잡고 밥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겨울산의 백미는 뽀드득 뽀드득 밟는 소리, 눈꽃이 가득 핀 설경, 해발 1000m 이상에서 극한의 추위를 견뎌내야 핀다는 서리꽃. 이 모두는 자연이 만들어낸 예술작품이다. 커피 한 잔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일행은 중봉을 거쳐 바로 하산하기로 했다. 중봉을 지나다 보면 나무에 엉켜 붙은 흰보석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중봉에 서면 사방이 확 트인 덕유평전이다. 눈꽃이 핀 그 길을 걸으면 하늘을 걷는 기분이다. 중봉에서 향적봉을 바라보니 경이롭기까지 하다. 가파른 절벽 길을 조심조심 내려오다 보니 오수자굴에 다다랐다. 산도 인생도 내려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칫하면 헛디딜 수 있기 때문이다. 오수자굴을 보니 사람의 눈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입술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커다란 바위에 어찌 이런 구멍이 생겼나 신기할 따름이었다. 오수자굴은 조선 명종 때 광주 목사를 지냈던 갈천 임훈 선생이 〈향적봉기〉에 ‘계조굴’로 적은 곳이지만 오수자라는 스님이 이곳에서 득도했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은 오수자굴로 불리고 있다. 하산하는 등산로에는 산죽이 가득하다. 눈 덮인 산죽을 보니 푸르름이 더욱 돋보인다.중봉에서 오수자굴까지는 1시간 남짓이면 하산할 수 있지만 눈이 많이 쌓여 시간이 더 걸렸다. 무주구천동 계곡을 따라 하산을 하다 보면 경사가 거의 없어 힘들지 않다. 쉬지 않고 빠르게 걷다 보니 어느새 백련사 입구 삼거리다. 꽁꽁 얼어붙은 구천동 계곡을 따라 오르던 맞은편 산길로 내려오다 잠시 쉬며 준비해간 귤과 사과를 간식으로 먹는다. 아이젠을 벗고 한참을 걸어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후 5시 30분이었다. 점심도 거른 채 산행을 시작한 지 꼬박 7시간 30분이 지났다.주차장 근처에서 남은 김밥과 함께 따끈한 칼국수를 시켜 먹으려고 식당을 찾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일행은 얼마 전에 오도산에 올랐다가 들려 맛있게 먹은 가조면의 식당에 가서 저녁도 먹고, 마주보고 있는 백두산 온천에서 피로를 풀기로 했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목욕을 하고 나니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상쾌하다. 늦은 저녁 귀행길 영천휴게소에 들러 탄산수 한 모금을 마시고 나니 속까지 개운하다. 포항에 도착해 집에 오니 밤 10시다.덕유산은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 높은 산이다. 남한에서 한라산 1,950미터, 지리산 1,915m, 설악산 1708m 다음이다. 남쪽에 있는 산 치고는 눈이 많아서 겨울에는 설경을 즐기기 위해 많은 등산객이 찾는다. 3년전 겨울, 덕유산에 왔을 때는 무주구천동의 별미인 무전과 배추전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무를 삶아서 칼로 썰어 부치는 전은 어느 곳에서도 맛 볼 수 없는 구천동만의 맛이었다.눈꽃산행의 끝은 따스했다. 산은 항상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산을 찾는 사람에 따라 기쁨도 되고 아쉬움도 된다. 문득 각자 자기 맡은 분야에서 스스로 일하며 그 기쁨을 느끼며 좋아하는 취미 하나는 가지고 즐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삶의 매 순간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다. 그런데 일상적이어서 가볍게 생각하고 소중한 시간을 대부분 놓치고 산다. 하루하루를 허투루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또 한번 느끼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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