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로 가 침낭을 펴고 들어가 누에처럼 누웠다. 멍이나 물집을 케어할 여력도 없었다. 자고나면 좀 나아져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납덩이같은 몸과는 달리 정신은 점점 유리알처럼 맑아진다. 덜컹, 덜컹, 드르덕 덜컹.... 바람이 창문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방안 가득 쏟아져 들어온 바람이 침몰한 배에 밀려드는 파도처럼 거칠게 방안을 휘젓는다. 바로 옆 침대 머리맡의 쌍여닫이 창문(힌지드 도어)이 열려 있다. 설 닫은 창문이 바람의 패악질에 맥없이 옷고름을 풀어버린 듯했다. 옆 침대 주인은 이 와중에도 깊이 잠든 모양이다. 아직 잠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텐데도 아무도 창문을 닫지 않는다. 창문이 연신 비명을 질러댄다. 누군가는 바튼 기침을 하고, 누군가는 침낭지퍼를 한껏 끌어 올리고, 누군가는 몸을 웅크리면서 돌아 누울 뿐 아무도 창문을 닫는 이도, 닫아달라고 부탁하는 이도 없다. 일어나서 창문을 닫고 싶었으나 마음뿐이었다. 어쩌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누군가가 저 창문을 좀 닫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만 들 뿐이었다. 이날 밤 20여 명의 투숙객 중 아무도 창문을 닫는 사람은 없었다.바람은 열린 침낭 틈을 헤집고 우악살스럽게 파고 들었다. 20, 30분가량을 그렇게 버텨보았지만 도저히 이대로는 잠이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가뜩이나 평소에도 전전반측하기 일쑤인 터에 이런 환경이라면 단 10분도 잠들긴 틀렸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닫고 걸었다. 길이 막힌 바람들이 밖에서 아우성치며 창을 세차게 두드렸다. 한 무리는 지붕위에서 사정없이 발길질을 해댔다. 도대체 분지처럼 내려앉은 이 지형에 어떻게 이런 야생의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대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다시 침낭 속에 들어가 누웠다. 바람은 들개 떼처럼 거칠고 집요했다. 지붕을 공략하다가, 다시 창문을 공략하다가, 지붕과 창문을 동시에 공략했다. 끝장을 보자고 덤벼들었다. 바람의 거친 드잡이에 내가 닫아 잠근 창문이 다시 맥을 놓아 버렸는지 주먹 하나가 드나들 정도로 벌어졌다. 그 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은 황소 급이었고, 덜컹이는 소리는 화물열차 급이었다. 아무래도 다시 잠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때 다행히 창문 아래 침대 주인이 일어나더니 창문을 다시 닫아 잠갔다. 거세게 건물을 윽박지르는 바람의 난동도 그렇지만 잠자리에 안온한 맛이 없다. 세탁실에서 한동안 추위에 노출되었던 탓인지, 함부로 헤집고 든 바람이 실내에 가득 부려놓은 한기 탓인지 잠은 먼 곳을 배회한다. 칼사디야의 밤은 아름답지 못했다. 깊고, 붉고, 감미로웠던 팜플로나의 밤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래도 칼사디야로 오는 길은 아름답고 행복했다. 그 지루하고 고된 길을 충만한 마음으로 걸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칼사디야의 밤은 고약하고 형편없었으나 칼사디야로 오는 길 위에서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그러면 된 것이다. 다만 그날 밤 거칠게 건물을 유린하던 야생의 바람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왜 그래야 했는지, 왜 그렇게 해야만 했었는지. 마땅히 그런 광풍이 불어야 할 지형도 아닌 곳에서 왜 그토록 모질게 몰아쳐야 했는지 묻고 싶다고. 대답은 하지 않아도 좋다. 어쩌면 너도 모를 수 있으니까. 너는 그저 바람이니까.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그래도 눈을 떠 보니 머리맡에 아침이 정확히 배송되어 와 있다. 직원이 체크아웃 시간이라며 투숙객들을 깨우는 소리에 깨어난 잠이었다. 시계를 보니 8시가 넘었다. 몇 시간이나 이렇게 죽은 듯이 잤던 걸까. 간밤의 기억인지, 악몽인지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다. 밤새 그렇게 불량한 청소년들처럼 우루루 몰려다니던 바람은 오간 데 없고 두 친구 팀도 먼저 떠나고 없다. 대신 곤히 잠든 나를 깨우지 않고 먼저 떠났다는 지흔 씨의 ‘톡’이 와 있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투숙객 중 가장 늦게 체크아웃을 하고 나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오늘은 레디고스와 테라디요스, 모라티노스, 산 니콜라스를 거쳐 사아군까지 22킬로미터를 가기로 한다. 큰 도시를 피해 상대적으로 순례자들이 적게 몰리는 직전 마을이나 다음 마을에 투숙하는 쪽을 선호해 왔지만 이번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직전 마을은 너무 가까웠고 다음 마을은 너무 멀었다. 무엇보다 어제 이틀 치를 걸었으니 오늘은 좀 짧게 걷고 싶기도 했거니와 마음이 무거워 걷는 재미도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길은 120번 도로 왼쪽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간다. 길들의 동행이다. 결국은 나뭇가지처럼 갈라지는 순간이 곧 오겠지만 그때까지의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잠정 합의)는 그것대로 아름답다.이날부터 나의 순례 메모는 급격히 불성실해졌다. 어쩌다 마음먹고 메모한 날도 고작 한 줄. 그나마도 예약한 숙소 명이거나 지역 명 뿐.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걸었는지 관련 기록이 전혀 없다. 기록하기조차 싫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기록은 남기지 못했지만 기억은 남아 있다. 그날 내가 했던 생각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 생각난다.이 무렵 메모를 대신한 육성 녹음이 있어 약간의 손질을 거쳐 여기 옮겨본다.‘한 걸음만 떨어져서 보면 모든 것이 희극이다. 주관과 객관 사이...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들... 한 발짝만 떨어져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인간은 객관적 진실을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을까. 어떠한 현상, 즉 색(色)이 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受)의 작용은 천차만별이다, 수의 작용이 다르면 다음 단계인 상(想) 또한 완전히 다르게 형성된다. 수의 메카니즘이 다른 이유는 각자의 카르마(業)가 다르기 때문이다. 주관은 카르마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객관적 진실은 주관적인 수(受)와 상(想)에 의해서 손상당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부분의 객관적 진실, 실체적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엄격히 말하면 각자의 카르마에 의한 주관적 판단일 뿐이다. 객관적인 사실과 진실을 카르마의 지배를 당하고 있는 주관을 통해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일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가지고 대상을 재단하고 도색한다. 동일한 피사체를 찍어도 각도와 명암은 카메라에 따라 다르다. 피사체를 받아들이는 카메라의 작용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촬영자의 의도와 이념을 철저히 배제한다 해도 카메라 자체의 속성이 다르므로 완벽한 리얼리즘의 구현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여기서 카메라의 속성이 바로 카르마, 즉 업이다. 객관적 진실은 하나지만 주관적 진실은 인류의 수만큼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앞에서 세상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싸움터라기보다는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 혹은 나쁜 사람과 나쁜 사람간의 싸움터라고 얘기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안방의 시어머니와 부엌의 며느리가 갈등하는 이유는 둘 중 하나가 나빠서가 아니라 한 가지 사실을 놓고 주관이라고 하는, 사이즈가 다른 각자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주관을 지배하는 카르마가 동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방에 가서 들으면 시어머니 말이 맞고 부엌에 가서 들으면 며느리 말이 맞다.’는 말은 객관과 주관의 거리가 얼마나 멀며, 각자의 주관과 주관 또한 서로 얼마나 다른가를 잘 보여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