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야고보 사도는 서기 44년 파스카 축일 전날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에 의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예수의 12제자 중 최초의 순교였다. 그의 나이 39세. 생애는 굴곡졌으나 정신은 올곧았던 한 젊은 성자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스스로 형장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던 야고보 사도. 나로서는 감히 가늠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선택이다.그를 우러르게 하는 대목은 또 있다. 형장으로 향하는 야고보에게 그를 고발한 사람이 뒤따르며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그때 야고보는 그를 안아주면서 ‘평화가 그대와 함께 하기를 바란다.’며 용서했다고 한다. 용서란 상대의 잘못을 덮어주고 잊어 주는 정도를 넘어선 곳에 있다. 진정한 용서란 ‘이러한 삶을 살게 해준 당신에게 감사한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야고보 성인은 형장으로 가면서도 밀고자에게 축복의 말을 건넸다.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무외시(無畏施.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마음의 보시)이다.순례길 초반 팜플로나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24킬로미터 구간 중간쯤 지점에 ‘페르돈(Perdon) 봉(峰)’이 있었다. 우리말로 ‘용서의 언덕’이라 불리는 곳이다.원래 이 페르돈 봉에는 성모를 기리는 낡은 성당이 있었다고 한다. 이 지역의 풍력발전회사는 까미노 관련단체와 뜻을 모아 1996년 낡은 성당을 허문 자리에 청동 순례자 조형물을 세웠다. 당나귀를 몰고 가거나 말을 탄 중세의 순례자부터 배낭을 짊어진 현대의 순례자까지 일렬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있는 서쪽을 향해 걷는 형상이다. 까미노의 ‘프랑스 길’에 있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한 순례자가 타고 가는 말의 옆구리에는 ‘바람의 길과 별의 길이 교차하는 곳’이라고 새겨져 있다. ‘바람의 길’과 ‘별의 길’의 의미는 무엇일까. ‘바람의 길’은 미움과 원망을 안고 가는 길이며, ‘별의 길’은 사랑과 자비를 안고 가는 길일까. 그 두 길을 가르는 키워드가 용서라는 의미일까. 용서 하지 못하면 ‘바람의 길’을 가는 것이고 용서하면 ‘별의 길’을 가게 되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글귀일까......나는 사실 처음엔 이 조형물을 보고 ‘용서의 언덕’보다는 ‘용사의 언덕’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조형물이 도무지 용서와 맥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말, 개, 당나귀 등의 동물형상과 긴 창을 세워 들고 있는 듯한 사람들의 형상은 얼핏 병사들의 행렬을 연상케 했다. 무어인들과 맞서 싸운 스페인 병사들을 기림과 동시에 침략자인 무어인들을 용서한다는 의미쯤으로 받아들여졌다.그러나 이곳은 엄연한 ‘용서의 언덕’이다. 청동 순례자 조형물이 있는 정상에서 살짝 벗어난 경사지에 있는 돌기둥들이 이 언덕의 주인공이다. 열대여섯 개의 돌기둥들이 사람 키 정도 높이로 빙 둘러서서 4,5미터 정도 되는 큰 돌기둥을 에워싸고 있는 기념 조형물은 흡사 선사시대 고대인들의 유적을 떠올리게 했다.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근처에 서 있는 안내문을 읽어본다. ‘인권침해에 대한 모든 과정에 대한 비판적 기억,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 프랑코니즘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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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이 조형물은 독재자 프랑코의 철권통치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프랑코는 1936년 스페인 내전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 죽을 때까지 30년 가까이 독재자로 군림하며 20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스페인 전역에 걸쳐 여기저기 암매장됐다. 이곳에서도 100여구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가운데 우뚝 선 돌은 프랑코 독재 치하의 희생자를 상징한다. 돌기둥을 둥글게 에워싼 작은 돌들은 희생자들의 출신지역을 상징한다. 작은 돌들에는 희생자들이 살았던 마을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그러니까 이 돌기둥 기념물이 이곳이 ‘용서의 언덕’인 이유이다.기왕 이곳을 ‘용서의 언덕’으로 명명했다면 프랑코니즘의 희생자를 기리는 이 기념물이 더 주목받을 수 있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아쉽다. 많은 순례자들은 청동 순례자 조형물 앞에서 잠시 쉬면서 사진 촬영만 하고 떠난다. 이곳이 왜 뜬금없이 ‘용서의 언덕’인지, 저 돌기둥 기념물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심지어 돌기둥 기념물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이 ‘용서의 언덕’의 취지는 수십만 명을 학살한 독재자를 불과 수십 년 만에 용서해 주자는 것이다. 모든 희생자 가족들이 동의했는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쉽게 용서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가해자로 인해 뒤틀려 버린 자신의 운명마저도 사랑(아모르 파티)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용서가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과연 몇 명이나 용서를 했을지 의문이다. 불교적으로 보면 10법계(十法界) 중의 연각세계(緣覺世界)급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야 진정한 용서가 가능하다. 인간세계를 살아가는 평범한 중생들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천상세계, 성문세계에서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보살세계 바로 아래에 있는 연각세계는 12연기(十二緣起)를 깨달은 높은 경지에 오른 성자들의 세계이다. 12단계의 인과의 메카니즘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안으로는 참회, 밖으로는 용서가 가능한 것이다. 용서를 구하며 뒤따라오는 밀고자를 안아주고 ‘평화가 그대와 함께 하기를 바란다.’고 위로한 후 형장으로 향한 야고보 사도는 연각세계의 아라한(수행의 경지가 높은 성자)이 분명할 것이다. 모르긴 해도 밀고자는 가까운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평소에 잘 따르던 신자였거나 최소한 이웃이었을 것이다. 그의 스승인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일렀지만 사람은 적(敵)보다 친구를 용서하기 더 어렵다. 가까운 사람의 배신이 주는 상처가 더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무방비 상태에서 친구에게 입은 상처는 적과 싸우다 입은 상처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는 매우 설득력 있다.‘신이시여, 친구로부터 저를 지켜주소서. 적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