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걸으니 백운재다. 오르막 구간이 이어지면서 조금 올라가니 남산의 최고봉인 고위봉(494m)에 다다랐다. 맑은 날이면 건너편 남산의 두 번째 봉우리 금오산(468m) 정상이 보이는데 오늘따라 운무로 보이지 않는다. 고위봉 정상에서 인증 샷을 찍고 용장마을 방향의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내려오면 전망바위가 나타나고, 이곳에서는 금오봉 정상과 용장사지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전망바위에서 다시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내려가면 울창한 솔숲과 함께 아름다운 조망들이 한눈에 펼쳐지며 천룡사와 관음사 길림길인 열반재에 도착한다.관음사로 내려가는 용장골 등산로 반대 방향으로 내려와 쭉쭉 뻗은 소나무 군락지를 따라 조금 걸으면 녹원정사다. 녹원정사 너른 마당의 높다란 감나무에는 아직까지 홍시들이 달려있다.지난가을에 왔을 때는 집주변에 심어진 감나무의 감을 주인이 직접 따서 건물 본채 처마에 가득 달아놓고 등산객들에게 익은 감을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산벗 일행도 추녀 아래 마루에 앉아 홍시를 몇 개씩 먹었다.녹원정사 사장은 40대로 부부가 함께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평일 주말에는 손님이 제법 있지만 오늘같이 비 오는 주말은 손님이 많지 않다고 한다. 한때는 손님을 1000명까지 받은 적이 있다고도 했다. 관광버스로 24대가 왔었다며 마당에 자리를 깔고 식사를 했다고 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여러 차례 이곳에 와서 점심을 먹다 보니 젊은 사장과 친해져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녹원정사를 잠시 소개하면, 본채 우측에는 사랑채가 있는데 외벽에는 사업자등록증이 붙어있다. 그 옆에 목판으로 서각된 “밥이 하늘입니다”라는 글귀가 있다. 그 아래에는 식단표가 있고, 식단표 밑에는 시와 산문 한 편이 붙어있다. 누가 쓴 글이냐고 물었더니 사장이 하는 말, “큰아버지가 쓴 글인데 붙여두라고 해서 붙여 놓았다”면서, 툭 던지는 말이 걸작이다. “글을 보면 효자라고 생각하지만 말과 행동이 완전히 달라 배울 게 없다”고 한다. 그 애기를 듣고 일행 모두가 웃었다.식단표에는 식사류와 주류로 나눠 표시되어 있는데 재밌는 것은 “공기밥 추가 8,000원입니다. 인원에 맞게 식사 주문 시에는 공짜입니다”라고 써놓은 하단에 글귀다.푸짐한 산채밥상 1인분이 8,000원인데 밥 한 공기 추가에 8,000원이라고 하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궁금해서 사장에게 물었더니, 손님들이 인원수대로 식사 주문을 하지 않고 밥값을 아끼려고 숫자를 줄여서 주문을 한 뒤 추가로 공짜 공기밥만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 그래서 공기밥 추가 시 8,000원이라고 써놓았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사장의 지혜가 눈에 보였다.지난번 이곳에 왔을 때는 사장이 머리에 두건을 쓰고 밥상을 배달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검은 모자를 쓰고 가운데 흰 글씨로 ‘사장님’이라고 새겨 놓았다.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하다가 속으로 짐작을 해보니, 젊은 사장이 음식을 나르다 보니 다양한 손님들이 아저씨, 총각, 삼촌, 종업원 등 부르는 호칭도 각각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일일이 사장이라고 대꾸하기도 그렇고 해서 모자에 써진 글씨를 보고 그렇게 불러 달라는 의미로 글씨를 새겼지 않을까 싶었다.날씨가 흐리고 비가 온 탓에 마당에 있는 탁자에서 먹으려던 점심계획을 포기하고 방에 들어가서 점심을 시켰다. 칼국수와 몇 가지 메뉴의 음식이 있지만 쌈배추, 김치, 고사리무침, 비지, 된장, 고추장, 물김치, 검은콩, 도라지, 콩나물, 무채무침으로 쓱쓱 비벼 먹는 산채비빔밥이 최고였다. 가격도 저렴하고 양도 많다. 거기에다 도토리묵과 파전까지 시켜 먹었더니 배가 잔뜩 불러 일어나기가 싫다. 후식으로 식당에서 제공하는 양촌리 커피에다 따뜻한 방에 앉아 있으니 한숨 자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평소에는 산행을 떠나기 전에 식당에 들러 꼬마김밥을 준비해서 가지만 오늘은 녹원정사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기 위해 각자 간식과 물만 준비해서 왔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던 길을 되짚어 출발지인 남산사주차장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산벗의 최고형님이 앞장서고 나머지는 뒤따라서 열반재, 고위봉, 백운재, 신선암, 칠불암을 거쳐 대안당에서 잠시 쉬고 하산하기로 했다. 일행은 대안당 앞마루에 앉아 카페 늘人에서 준비해간 커피를 맛있게 나눠마셨다. 간식으로 가져온 삶은 고구마와 달달한 귤도 맛있게 먹었다. 마침 행자스님 두 분과 비구스님 한 분이 힘들게 올라 오길래 삶은 고구마와 귤을 나눠드리고 빠른 걸음으로 남산사주차장에 도착하니 오후 4시30분이었다. 소요된 시간은 5시간 30분이었다. 산벗 일행은 주차장에 마련된 기구로 옷과 신발을 깨끗이 털고 산행을 기분 좋게 마무리한다.차를 타고 집으로 귀가하는 길, 갑자기 어제 신문에서 읽은 오늘의 운세가 생각났다. “추운 겨울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듯 바라던 일들이 술술 풀리는 날입니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면 오늘의 운세처럼,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하고 따뜻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날씨는 여전히 흐리고 겨울비가 조금씩 차창을 타고 내리고 있다.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휴대폰으로 찍어온 ‘타향살이와 어머니’라는 녹원정사 사장님 큰아버지(이원웅)의 글을 읽어보니 마지막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여인은 안고 싶은 존재지만, 어머니는 안기고 싶은 존재다. 그래서 명절 때면 아내와 아이들을 고향에 먼저 보내고 바쁜 일과를 마친 늦은 밤에라도 나는 어머니가 있는 고향으로 꼭 달려갔다. 효(孝)로서 효를 가르친다고 했던가. 내 아이들이 눈을 번득이고 나를 보고, 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하는 자세를 직시하고 있다. 현재 부모님의 상황이 이십, 삼십 년 후의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게 벌써 내 앞에 지금의 현실이구나. 부르기만 하여도 눈물이 나는 그 이름 어머니! 하늘나라에서 평안히 계시지요?”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마저 15년 전 세상을 떠난 필자에게 녹원정사 사장님의 큰아버지 글은 내 가슴을 한참 동안 먹먹하게 했다. 설 명절을 며칠 앞두고 부모님 생각을 떠올리니 살아생전 못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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