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내 앞에는 나의 최애 스페인 음식인 빠에야가 놓였다. 역시 한국인은 쌀을 먹어야 돼, 하면서 프라이팬 위에 펼쳐진 빠에야를 감격스럽게 영접하는 찰나 아뿔사! 이건 밥이 아니라 숫제 생쌀이다. 원래 조금은 설익은 듯한 식감이 특징이라는 말도 있긴 해도 이건 좀 심했다. 까미노 초반 수비리로 가던 중 에스삐나 마을에서 처음 먹어본 먹물빠에야도, 벨로라도의 알베르게에서 먹은 빠에야도 전혀 이렇지 않았다. 5일전 벨로라도 초입에 있는 한국의 황토방 같은 외관을 한 알베르게에 도착했을 때였다. 여직원에게 나는 ‘한국인이 먹기 좋을만한 메뉴를 달라.’고 별로 기대도 하지 않고 주문했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주문해 봐야 결과는 매번 기대이하였던 그 동안의 학습효과 탓이었다.그녀가 가져온 음식은 홍합과 조개가 통째로 들어간 발그레한 빛깔이 도는 밥이었다. 접시 테두리 쪽 여백에는 붉은 소스로 ‘Camino De Santiago’라고 레터링 한 센스도 만점이다.먹다보니 조금 퍽퍽해서 콜라의 조력을 받긴 했어도 맛은 일품이었다. 사실 유럽의 음식은 음료 없이 먹기는 쉽지 않다. 평소에는 입에 대지도 않는 콜라를 식사 때 마다 울며 겨자 먹듯 마셨던 데엔 이런 이유가 있었다.작은 콜라 두 병의 도움을 받아 접시를 싹 비우고 리셉션 여직원을 향해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고 엄지를 흔들어 보였다. 진심이었다. 오후 6시부터 주방이 가동되는데도 배고파하는 나를 위해 4시 30분에 주문을 받아준 고마움에 대한 답례이기도 했다. 내친김에 덤으로 한 마디 더 얹었다. ‘이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빠에야 보다 더 맛있다.’ 그러자 그녀가 활짝 웃으며 받는다. ‘(바보야,) 이거 빠에야야!’처음 먹어봤던 먹물빠에야와는 빛깔도, 맛도 달라 전혀 같은 음식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깜짝 놀랐다. 마을이름은 ‘벨로라도’ 빠에야는 결코 별로가 아니었다. 더하여 이틀 전 온타나스 알베르게에서 여러 순례자들과 함께 먹었던 노란 육류빠에야까지 그 어디에서도 이 정도 생쌀 수준의 빠에야는 없었다. 신부님과 길벗들도 ‘설마?’ 하는 표정으로 한 숟갈 씩 먹어보고는 기겁을 한다. 꾸역꾸역 몇 술이나 떴을까. 도저히 먹을 수 없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오늘은 제대로 된 밥을 먹을 복이 아닌가보다. 식사 중에 가희 씨가 며칠 전 한 알베르게에서 벨기에의 어느 순례자가 제이슨이라는 한국인을 아느냐고 한국인만 보이면 여기저기 물어보더란다. 그때 모른다고 대답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됐다면서 신기해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신부님이 ‘제네비이브와 정말 특별한 인연’이라고 탄복 한다. 가희 씨와 신부님이 며칠 전 온타나스로 향하던 길에 앞서가던 내가 까스텔라노스에서 미리 숙소를 잡아 준 후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던 제네비이브를 소환한다.가희 씨는 우리가 선착순에 밀려 투숙하지 못했던 산볼의 알베르게에서 그날 1박을 했었단다. 밤하늘이 아름답다는 산볼의 알베르게에서 다음 마을을 향해 하릴없이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던 제네비이브가 들었다면 만감이 교차할 것 같다. 놀라운 인연은 또 있었다. 나중 정화 씨의 말에 의하면 그날 정화 씨는 제네비이브 보다 먼저 까스텔라노스의 그 알베르게에 투숙해 있었다고 한다. 파김치가 다 된 제네비이브는 투숙 직후부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기만 하더라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제이슨이라고 하는 한국인을 아느냐고 묻더라고 했다. 그땐 정화 씨가 나를 만나기 전이라 당연히 모른다고 대답했었단다. 나보다 뒤쳐져 오던 정화 씨는 그 후에도 제네비이브를 한 차례 더 알베르게에서 만났다며 함께 찍은 사진을 ‘톡’으로 보내오기도 했었다.엄청난 체력을 과시라도 하듯 길가에서 잠깐 휴식할 때조차도 배낭을 짊어진 채 서 있던 제네비이브는 아마 그날 ‘고난의 행군’ 이후 하루 걷는 거리도 줄이고, 속도도 줄였을 것이다. 나는 신문사와 약속한 원고 마감을 지키기 위해 하루라도 더 일정을 단축해야 하는 입장이라 아마 우리 두 사람의 거리는 점 점 더 벌어질 것이다. 멀어지는 둘의 거리만큼 서로의 기억 속에서도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전생의 기억처럼 아스라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담소 중에 신부님이 프랑스 생장에서 나와 함께 까미노를 출발했던 길벗들의 소식을 전해 준다. 신부님과 나를 포함한 길벗들은 수비리에서 처음 만난 이후 팜플로나 등에서도 수차례 조우하면서 친분이 쌓였기에 서로 안부를 주고받고 있었다. 까미노에서 이런 현상은 자연스런 문화다.프랑스 생장에서 출발 당시 네 명이었던 우리는 팜플로나에서 두 팀으로 나뉘었다. 두 친구로 구성된 한 팀, 그리고 몸이 불편한 청년과 내가 한 팀. 두 친구들은 내게 청년을 두고 자신들과 함께 먼저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몸이 불편한 사람을 두고 가는 게 걸려, 청년과 함께 천천히 가겠다며 완곡히 거절했다. 두 친구 팀과 동행하게 되면 나는 필경 민폐를 끼치는 입장이 될 것이었다. 까미노 출발지 생장에서부터 나는 그들에게 ‘손이 많이 가는 민폐러’였다. 그러느니 무릎이 성치 않은 청년과 함께 하면서 내가 민폐를 입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두 친구는 아쉬워했고, 청년은 고마워했다. 두 친구 팀은 팜플로나에서 1박 후 떠났고, 우리는 좀 더 편하게 쉴 요량으로 작은 호텔에서 하루를 더 묵었다. 그러나 나는 다음날 청년을 남겨두고 혼자 먼저 길을 떠나야 했다. 청년은 밤새 나를 불편해 했다. 무릎이 좋지 않은 청년을 위한 선택이 민폐를 입히는 쪽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청년은 쿨하게 말했다. ‘우리 따로 가죠.’ 그렇게 해서 두 친구 팀, 나, 청년 순으로 까미노를 걷고 있는 중이었다. 중간 중간 서로의 안부와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따로 또 함께’ 걷는 동행들이었다. 신부님에 따르면 가장 앞서가던 두 친구 팀 중 한 친구가 감기몸살로 드러누웠다고 했다. 지금은 우리가 내일 도착하게 될 칼사디야의 알베르게에 투숙 중이라고 했다. 민간구호단체의 일원으로 아프리카에서 자원봉사를 했다는 젊은이였다.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에 가벼운 샌들을 신고 소풍 나온 아이처럼 걷던 길벗이었다. 까미노 출발지 생장의 알베르게에서 출발 직전 내 배낭을 꾸려주고, 혼자가지 말고 자신들과 함께 가자며 선뜻 동행을 제안해 주기도 했었다. 팜플로나에서는 무릎이 불편한 청년과의 동행을 선택했지만 그 마음은 항상 마음 한 편에 간직하고 있던 터였다.네 사람의 동행을 마무리하던 날 팜플로나의 밤은 깊고, 붉고, 감미로웠다. 얼떨결에 마셨던 붉은 마티니 한 모금처럼.(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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