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경남 합천군에 있는 미녀봉과 오도산(吾道山)을 올랐다. 아침 7시, 포항을 출발하면서 차창 밖으로 내다본 하늘은 미세먼지 때문인지, 눈비가 오려는지 온통 회색빛이었다. 함께 동행한 일행은 주말마다 시간을 같이하는 선후배 산벗이다. 논공휴게소에 들러 커피와 호두빵을 사서 차 안에서 나눠 먹고, 가조IC를 지나 황강을 따라 가는 도로에는 눈이 제법 쌓여 있었다. 새해 첫 산행지를 태백산으로 하지 않고 오도산으로 정한 것은 번잡한 곳보다 조용하고 가보지 못한 처녀 산이었기 때문이다. 오도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해 관리사무소 직원의 산행 안내를 받고,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준비물을 챙겼다. 그런데 나 혼자 눈 산행에 필수인 아이젠을 챙겨오지 않았다. 마침 산행대장인 선배가 여분으로 챙겨 와서 전해주어 고마웠다. 처음 온 오도산 자연휴양림에는 산막, 평상, 매점, 쉼터 등 시설이 좋아보였다. 하지만 등산객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오전 10시,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했다. 흐리던 하늘이 맑아지면서 날씨가 청명하다. 산행 초입 좌측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고 데크 계단을 따라 올라 눈 덮인 낙엽을 밟으며 완만한 산길을 30여 분 걷다보니 전망이 확트인 삼거리 산등성(말목재)에 올라선다. 겨울 날씨인데도 바람 한 점 없이 포근하고 올라가는 등산로도 가파르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선바위, 유방봉, 눈썹바위, 893봉, 미녀봉(美女峰·933M), 전망봉, 오도재, 오도산 정상(해발1,120M)에 올랐다가 오도재로 다시 내려와 휴양림 주차장으로, 산을  한 바퀴 돌아서 내려가야 한다. 산행 거리는 10km 정도, 약 5시간 이상을 미녀봉과 오도산을 동시에 정복하는 산행이다.말목재에서 능선을 바라보니 좌측으로 미녀봉의 유방봉, 눈썹바위와 아이를 잉태한 것 같은 배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높은 오도산이 머리에 뿔(중계탑)을 달고 미녀봉과 나란히 곡선을 그리고 있다. 산벗 일행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봉우리를 지나고, 키가 큰 선바위(입석)을 지나 로프도 타고 바위를 타는 아기자기한 산행을 이어갔다. 유방봉에 도착하니, 괴석사이에서 자라는 소나무가 바위에 쌓인 눈을 이불삼아 도도하게 서 있다. 주위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마치 내가 신선이 된 느낌이 든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소나무 아래 납작 붙은 이끼(지의류)는 암석을 녹이는 작용을 한다. 규산염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흙과 솔씨가 공생하면서 뿌리를 내려 암석 밑으로 들어가 비바람을 맞으며 견디는 것이다. 오늘도 견디며, 참아내며 공생하는 삶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위대한 자연의 스승에게 한 수 배운다. 일전에 보았던 조선일보 <장유정의 음악정류장>이라는 코너에서 "인생이란 것은 지도에 없는 길을 가는 여행이라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이 시작되곤 한다. 어떤 길이 우리를 기다릴지 알 수 없다. 그래도 가보기로 한다"고 했다. 무척 공감이 가는 글이어서 메모를 해두었다. 산이 좋아서 주말마다 산에 가지만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등산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즐거운 날보다 힘들고 어려운 날이 많지만 산에 오면 긍정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용기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며 느끼는 즐거움은 무엇보다도 힘들지만 스스로 해냈다는 성취감과 자신감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유방봉을 지나자 기암괴석의 눈썹바위가 보인다. 이곳에서 바라본 조망은 형용할 수 없이 황홀하다. 동서남북 모든 조망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곳, 그 아름다움은 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눈썹바위에서 조금 내려오니 삼거리가 나타난다. 좌측은 유방샘으로 가는 길이다. 가보려고 하다가 미련을 남겨두고 일행을 따라 가던 길을 계속 걷는다.삼거리에서 2기의 분묘를 만나고 또 한 차례의 묘를 지나고 나니 헬기장이다. 잠시 후 893봉에 도착을 했다. 893봉이 정상인줄 알았는데 조금 걸어가니 더 높아 보이는 미녀봉이 나타난다.미녀봉 정상에서 개별로 사진 한 컷과 단체 사진을 촬영했다. 미녀봉은 지명상 경남 거창군 가조면이다. 가조 인터체인지 부근에서 동남쪽을 자세히 보면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반듯이 누워있는 미녀 모양의 산이 보인다. 황강의 지류인 가천에 긴 머리칼을 풀어 담그고 단아한 이마, 까만 눈썹, 오뚝한 콧날, 벌린 입, 또렷한 턱과 목을 거쳐 솟은 젖가슴 아래로 아기를 잉태한 듯 불룩한 배의 모습은 자연미를 갖춘 미녀라 부를 만하다.미녀봉 정상에서 내려오니 또 헬기장이 나타났다. 다시 고갯길을 오르니 마지막 봉우리가 나타나고, 여기서부터 오도재까지 가파른 경사의 내리막길이다. 조심조심 내리막길을 걷는다. 낙엽과 눈이 뒤섞여 매우 미끄럽다. 산행대장은 조심해서 내려오라고 안내한다.오도재에 내려와서 직진하면 오도산, 우측으로 방향을 잡으면 자연휴양림이다. 그런데 오도산을 오르는 산비탈이 장난이 아니다. 표고차가 200M 이상은 족히 될 듯했다. 눈과 낙엽이 푹푹 빠지는 산길을 오르려니 숨이 가프고 힘이 많이 든다. 그래도 일행들과 떨어지기 싫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올랐다. 가파른 피탈길을 30여 분을 올라가니 임도가 나타났다. 임도에 올라서니 오도산 정상이 코앞에 보였다. 금방 정상인 중계탑에 도착할 것 같은데 포장된 도로를 따라 한참동안 걸었다. 드디어 중계탑 정문이 나오고 그 안에 들어서니 CCTV를 철망으로 둘러놓았다. 그리고 흰 천으로 ‘오도산 정상 해발 1120M` 라고 적혀있다. 정상석도 없는 정상이다. 각자 사진과 단체사진으로 인증샷 남긴다. 정문옆 관리실은 산행자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산행대장이 준비해 간 코펠을 꺼내 물을 붓고 불을 붙여 준비해 간 라면을 끓인다. 김치와 김밥을 라면과 같이 먹으니 힘들었던 몸이 모두 녹아내리는 것 같다. 점심을 먹고 양촌리 커피까지 끓여 마시고 하산을 서둔다. 오도산은 대한민국 야생에서 멸종한 것으로 여겨지는 아무르표범이 1962년 최후로 생포된 곳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도선국사가 깨달음을 얻고 오도송을 읊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오도산의 원래 이름은 `하늘의 촛불` 이라는 뜻의 천촉산 또는 까마귀 머리처럼 산꼭대기가 검다고 해서 오두산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러던 것을 한훤당 김굉필 선생과 일두 정여창 선생이 오도산 산하 계곡을 소요하면서 우리나라 유도(儒道)를 진작시킬 목적으로 유도는 우리의 도(道)라는 뜻에서 오도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정상에서 내려오다 전망대에 서서 바라본 조망은 거의 환상적이었다. 합천호가 훤히 보이고 눈앞에 펼쳐진 산 사이에 쌓인 백설은 겨울 한국화 그 자체였다. 임도를 따라 내려오다가 올라왔던 산 아래로 다시 내려간다. 봉우리가 가팔라서 힘들게 올랐던 눈밭 등산로가 내려가는 길은 순탄치가 않아 바위 릿지를 해가며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오도재에 도착해서 10여 분 쯤 내려오니 계곡이 나타나고, 소나무가 가득한 넓은 자연 휴양림 솔숲쉼터에는 의자와 평상 등이 많이 만들어져 있어서 휴식을 취하기에는 좋아보였다. 아름다운 오도산 자연 휴양림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걸어 내려오니 주차장에 세워둔 차가 보인다. 어느덧 오후 5시다. 산벗 일행은 등산화에 붙어있는 눈을 털어내면서 한주 동안 찌들었던 마음의 먼지도 같이 털어낸다. 차를 타고 나오는데 멀리 산능선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검붉은 석양이 참 곱다. 해가 진 저녁, 보름달이 환하게 떴다. 달빛의 정기를 가득 받으며 가조읍내에 들러 온천욕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고, 식당에 들러 삼겹살과 된장찌개, 밥 한 공기에 일행들은 세상 모든 것을 얻은 행복감을 느낀다. 산을 오를 때마다 정상에 올랐다는 신념과 의지에서 오는 감격을 오늘도 기꺼이 맛보는 하루였다. 식당을 나와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을 보면서 문득 부학산에서 새해 첫날 일출을 보며 `올해는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행동하자`는 각오를 떠올렸다.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인 만큼 그 약속이 지켜지는 한해가 되기를 바라며 늦은 귀갓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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