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창고녕가야에 대한 사료는 우리나라 역사서 50여 곳에 수록돼 있다. 대표적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지명의 변천과정까지 시대별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고녕군은 본래 고녕가야국이다.
신라가 합병해서 고동람군을 삼았으며, 일명 고릉현이라고 불렀다. 다스리는 속현이 셋이 있으니 가선현, 문경현, 호계현이다.
가선현은 본래 가해현이었는데 경덕왕이 개명해 지금은 가은현이 됐다. 문경현은 본래 관현이었으며 경덕왕이 개명해 지금까지 문경현으로 남아있다. 호계현은 본래 호측현이었는데 경덕왕이 개명을 하여 호계현이 됐다“고 기술돼 있다. 또한 삼국유사 5가야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알은 부화하여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다. 나머지 다섯은 각자 땅을 찾아 왕이 되었으니, 아라가야는 지금의 함안이며, 고녕(령)가야는 지금의 함령(창)이며, 대가야는 지금의 고령이라고 했다.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삼국사기의 기록을 모태로 첨삭을 해서 기록하고 있다. 함창에는 현재 고녕가야 태조왕릉, 왕비릉, 오봉산 700기고분, 남산고성, 오봉산성혈석, 머리메머릿돌, 옥려봉천제터, 공갈못공검지 등 다양한 유적이 전해온다. 이에 대해 구한말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와 두계 이병도는 상이한 견해를 내놓으면서 고녕가야역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특히 단재 신채호는 공갈못을 매개로해서 고녕가야를 설명했다. 고대국가인 가야제국은 모두 인공의 거대한 저수지를 만들면서 건설됐다고 설명했다. 가라의 의미가 큰 호수며, 다른 가야(라)는 모두 호수가 사라지고, 고녕가야만이 공갈못의 형태를 구한말까지 전해왔다. 공갈못의 어원은 ‘고링가라’며 고링은 변하여 공이되고 가라는 갈로 변했다. 또한 단재는 고녕가야에 대하여 추호도 의심한 바 없으며 어문을 통해서 그것을 확실히 해두고자 했다. 공갈못은 둑의 길이가 현재 단위로 600m 못 둘레가 10km가 넘는다. 지금은 근대화 과정으로 많은 부분 농지로 전용됐으며 일부만 저수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에 이병도는“삼국유사에 고녕가야가 지금의 함창이라고 기록했지만, 다른 가야와의 거리가 너머 멀어서 잘못 비정된 것 같다”면서 함창을 지우고 진주고녕가야를 설정했다.
거리뿐 아니라 진주의 고명이 ‘거열’이므로 고녕과 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를 추가했다. 세 번째 지리상의 중요성인 웅주거목에 비춰보면 아마도 진주고녕가야일 것이다고 발표했다.필자는 이에 대해 이병도의 의견이 불가함을 여러 번 언론에 게재하고 주장한 바 있다. 가야는 낙동강을 축으로 이뤄진 고대국가이며, 낙동강은 물길로써 가야제국의 고속도로역할을 했음을 간과한 것이다. 낙동강을 축으로 상주, 선산, 성주, 의성, 창녕, 함안, 김해, 고성에는 모두 가야식 고분군이 형성돼 있다. 둘째로 거열은 진주의 고명이 아니라 거창의 고명임이 나중에 밝혀졌다. 설사 진주의 고명이 거열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고녕가야가 될 사유는 되지 않는다.셋째 웅주거목(雄州巨牧)은 상주의 별칭으로써 택리지 등에 기록돼 있으며 물자가 풍부한 큰 고을이라는 의미다. 행정개편으로 상주의 권역이 상당히 줄었지만 쌀 생산량은 현재 진주의 2배이며, 면적은 1.7배에 달한다. 이렇듯 이병도의 진주고녕가야설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이병도는 왜 이렇게 무리하게 우리의 대표적인 정사와 야사의 내용까지 부정하면서까지 진주고녕가야를 고집했는지 의구심을 갖지않을 수 없다. 이병도는 조선총독부 관리들에게 발탁된 인물이다. 조선의 통치를 목적으로 착수한 조선사편수회 식민사학자인 이마니시 류(金西龍)의 수사관보(조수)로 근무하면서 그들의 이론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쓰에마스 야쓰카즈를 비롯한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은 가야의 범위를 인위적으로 한반도 남부로 확정했다. 또한 건국연대를 4세기 이후로 설정했다. 그러나 함창고녕가야는 낙동강 중상류에 위치해 있으며, 3세기 후반에 이미 멸망단계에 접어들었다. 임나일본부를 정립시켜 조선병합의 정합성을 주장하려는 총독부의 논리에 함창고녕가야는 강력한 걸림돌이 됐다. 이에 이병도의 스승인 나가 미치오(那可通世)는 중국사서를 끌어들이면서 까지 함창고녕가야를 부인하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에 그들의 조수로서 조선학자들을 대신해 이병도를 앞세운 것이다. 두계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은 해방된 지 80년이 되는 지금까지 조선총독부주재 조선사편수회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에는 고녕가야를 주장하는 단체가 하나도 없다. 심지어 필자가 현 진주시문화원장(김길수)을 찾아갔을 때 그러한 논란이 있는지 조차 몰랐다면서 놀라워했다.단재(丹齋)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조선상고사를 저술하면서 한반도 뿐 아니라 만주벌판을 동분서주하다가 일제에게 체포돼 옥사를 당했다. 두계(斗溪)는 20대 초반에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20대 후반에 조선총독부 수사관보로 일한 사람이다. 그는 일제가 키운 인물로서 해방 후 작고할 때까지 총독부가 만들어놓은 ‘조선사’를 대한민국에 철저히 이식했다. 해방 후 친일학자로서 제재(制裁)는 커녕 1945년부터 서울대학교 사학과교수, 학술원장, 문교부장관, 국사편찬위원 등 인문학 계통에서 독보적 위치를 구축했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사를 저본으로 국사교과서를 편찬하고 있다. 그러면서 식민사학을 극복했다고 전 국민을 사맹화(史盲化) 시키면서 한국혼(魂)을 말살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멀쩡한 함창고녕가야 역사는 현재까지 흙더미 속에 묻혀 신음하고 있다.세계가 우경화 되면서 자국역사중심의 교육을 지향하는 시점에 우리는 세기말적 현상을 직시하면서 반드시 바로 잡아정립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