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선생님이 부스럭부스럭 뭔가를 끄집어내어 놓는다. 청국장 가루다. 함께 꺼낸 요거트에 섞더니 먹어보란다. 아직은 한국음식이 간절한 정도는 아니지만 자신에게는 ‘마법의 가루’일 청국장을 보시하는 성의에 못 이겨 한 숟갈 먹어보니 구수한 요거트 가 입맛을 돋워 준다.음식이 나왔다. 한국 순례자들이 즐겨 찾는 집이라더니 소문대로 주문한 음식이 우리 입에 착 감긴다. 식사 중에 ‘소식좌’ 권 선생님이 자신이 주문한 생선 요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배부르다며 생선 한 마리를 통째로 넘겨준다. 나는 거대한 돼지등갈비 바비큐 폭립으로 포식을 하고도 신부님과 사이좋게 생선요리를 나누어 먹으며 모처럼 식도락을 즐겼다.저녁을 먹고 베드로 신부님과 셋이 함께 근처 성당으로 갔다. 저녁 미사를 마치면서 성당의 신부님이 까미노 순례자들을 앞으로 불러내어 일일이 국적을 묻고는 특별한 덕담과 축복의 말씀을 내려 준다.다음날 아침 베드로 신부님의 침대가 비어있다. 다시 혼자다. 갑자기 길벗이 없어지니 허전하다. 그러나 여행자가 이별을 두려워하랴. 순례자가 혼자됨을 싫어하랴.8시를 넘겨 느지막이 출발했다. 혼자이기에 가능한 여유다. 오늘은 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까지 19킬로미터를 걷기로 한다. 마을을 빠져 나와 N980도로 옆으로 난 흙길을 걷는 오늘은 어제보다 한결 수월하다. N980도로를 벗 삼아 다리도 건너고, 노란 꽃들이 흐드러진 길도 지나고 거대한 자작나무 숲 단지도 지나고, 순례자 조형물도 지나고, 길 따라 제법 길게 조성된 소박한 숲도 지난다. 단조롭고 지루한 길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두 시간 쯤 걷다보니 허기가 밀려온다. 발도 어제보다 더 아프다. 주저앉아 양말까지 벗고 물집 투성이 발을 주물러 준다, 배낭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내 ‘순삭’하고 어디선가 구입해 먹다 남겨 뒀던 주전부리 몇 점도 가루까지 탈탈 털어가며 먹어치운다. 이게 아침 겸 점심이다. 나중에 까리온에서 이른 저녁을 먹을 때까지 더 이상 아무것도 먹지 못할 수도 있다. 운이 좋아 마을을 통과할 때 눈에 띄는 바가 있으면 또르띠야와 오렌지 주스를 위장에 ‘공급’해 줄 수도 있지만 이 메세타(고원지대) 구간에서는 기대난망이다.여전히 메세타 구간이긴 해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황량하지 않아서 살 것 같긴 한데 오늘따라 심한 허기가 괴롭힌다. 오늘이라고 특별히 먹지 못한 것도 아니건만 허기는 스페인 파리보다 집요하다.까미노를 걷다보면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된다. 모처럼 배가 든든해지면 잘 견뎌주던 발바닥 물집이 애를 먹인다. 발의 고통이 조금 잦아드는가 하면 이번엔 가만히 있던 배낭이 갑자기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배낭 무게를 잊을 만하면 갑자기 더위가 찾아오거나 지금처럼 허기가 덮쳐온다. 허기를 해결하고 나면 다시 발바닥에 통증이 엄습한다. 돌고 도는 고통의 뫼비우스 띠다.아마 어제처럼 황량한 벌판길을 걷는다면 이 허기와 통증은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제는 빨리 이 황량한 ‘밀밭의 사막’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다른 게 깃들 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오늘 한결 나은 길을 걷게 되자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허기와 통증이 일제히 소리치며 들고일어나게 됐을 터이다.어머니로부터 어릴 때부터 자주 듣던 말씀이 떠오른다.‘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 걱정거리는 다 가지고 있단다.’돈 걱정 없는 사람에게는 사람 걱정이 있고, 사람 걱정이 없는 사람에게는 건강 걱정이 있고, 건강 걱정이 없는 사람에게는 돈 걱정이 있다. 없다고 없는 게 아니고, 있다고 있는 게 아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아무 걱정거리 없을 것 같아도 이게 해결되면 저게 문제로 부각한다. 저게 해결되면 다시 그게 문제로 다가온다. 어쩌면 걱정거리나 문제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없는지도 모른다, 단지 걱정거리, 문젯거리로 받아들이는 인식체계가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석가세존의 말씀대로 이 세상이 고해(苦海)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필연적인 현상인지도 모르겠다.1시 조금 넘어 오늘의 목적지 까리온에 도착했다. 중세시대부터 많은 순례자들이 머물다 가면서 도시로 번성한 지역이라 곳곳에 야고보 성인의 동상과 벽화가 눈에 띈다.
중세 십자군 시대의 템플기사단이 세웠다는 산타마리아성당이 넓은 터를 잡고 서 있다. 성당 뒤편의 마을광장에는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순례의 노독을 푸는 야고보 사도의 동상이 있다고 한다. 야고보 성인은 템플기사단이 잠들어 있는 산타마리아성당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나는 야고보 성인 동상은 보지 못하고 성당과 마요르 광장. 성모상 탑을 차례로 지나 산타 클라라 알베르게에 도착했다.수녀원을 개조한 ㄷ자 형태의 2층 알베르게는 큰 마당을 품고 있었다. 마당을 덮고 있는 시멘트 바닥에 금이 가 있고 오랫동안 물이 고인 흔적인지 곳곳이 검은 물때로 덮여있다. 큰 마당이 휑하다 했더니 왼쪽 건물 앞 그늘 벤치에 너 댓 명의 순례자들이 앉아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한국어로 뭐라 뭐라 하면서 안절부절 한다. 프로미스타에서 만났던 ‘58개띠’ 권 선생님이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오늘 묵을 알베르게에 택시로 미리 부친 짐이 행방불명이란다. 숙소에 도착해 보니 숙소는 문을 닫았고 택시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경찰에 신고를 하고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한다. 함께 짐을 부친 어느 나라 여자 순례자는 짐 안에 중요한 것이 있다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울더라며 노심초사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