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분을 기다려 봐도 배는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신부님과 나는 다시 배낭을 둘러맸다. 운하를 따라 가는 길이니 지나온 길들보다는 한결 걷기가 수월하리라. 황량한 밀밭길에 비하면 이만해도 호사라면 호사다.4시 30분 운하의 수문이 나타났다. 운하의 끝, 마침내 프로미스타다. 우리가 아까 애타게 기다리던 유람선이 선착장에서 나 몰라라, 세상모르고 시에스타를 즐기고 있다. 수문 위로 운하를 건너고 철길 아래 굴다리를 지나 반 마장 쯤 갔을까. 어플로 예약한 알베르게(순례자 숙소)를 찾아 들었다.샤워와 빨래를 끝내고 나니 오후 6시다. 저녁 식사를 위해 산 텔모 광장의 레스토랑으로 갔다. 제법 큰 규모의 이 레스토랑 앞 작은 광장에 산 텔모 신부의 동상이 서 있다. 얕은 물 위에 세운 대리석 기단 위에는 파도를 가르며 가는 배 조형물이 올려져 있고 산 텔모 신부는 그 배에 서서 십자가를 들고 있다. 누군가 프로미스타라고 새겨진 흰 머플러를 신부의 목에 감아 놓았다. 프로미스타 주민들의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프로미스타 출신의 산 텔모 신부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해양의 수호신으로 여겨진다. 내륙지방인 프로미스타에서 태어난 산 텔모 신부는 갈리시아 해안에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한다. 스페인의 바닷사람들은 풍랑이 그치고 보이는 불빛을 ‘성 텔모의 불’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수호신인 산 텔모가 풍랑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 주었다고 믿는 것이다. 국왕의 신임도 두터웠던 그는 성인으로 추대 받아 스페인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역사적 인물이다.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먼저 온 신부님과 다른 한국인 순례자 한 분이 함께 앉아 있다. 우리와 같은 알베르게에 투숙했단다. 자그마한 체구에 나보다 연배가 조금 높아 보인다. 경북 선산이 고향이며 부산에 사는 ‘권씨’라고 소개하더니 ‘58개띠’라고 덧붙인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써내려온 베이비붐 1세대다. 몇 살이라거나, 몇 년생이라는 식의 통상적인 소개가 아니라 ‘58개띠’라는 표현이 영락없는 ‘58개띠’다. 대한민국에서 ‘58개띠’는 고유명사가 된지 오래다.그 파란(波瀾)의 흔적인지 작은 몸이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연신 힘든 까미노에 대한 푸념이 쏟아진다. ‘길가에 엉덩이 하나 붙일만한 곳도 없더라.’ ‘음식이 안 맞아 너무 힘든다.’ ‘아이고, 내가 왜 여기 왔나 하는 생각뿐이다.’...가톨릭 신자인 권 선생님은 프랑스라던가, 유럽 어디에 사는 따님에게 갔다가 따님의 권유로 까미노를 시작했단다. 그동안 중간 중간 점프를 해 가며 여기까지 왔다며 며칠 더 걷다가 레온에서는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기차로 이동하려고 한단다.전 생애를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서 살아오다보니 이제 너무 지쳐버린 것일까, 권 선생님의 말에는 까미노 순례를 권한 따님에 대한 가벼운 원망마저 묻어 있었다. 순례길을 프랑스 생장에서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단 1미터도 빼놓지 않고 걷고 싶어 하는 나와는 많이 달랐지만 꼭 내 방식이 더 가치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인생도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세우며 수도승처럼 엄격하게 사는 방식만이 지고의 선은 아닐 것이다. 그저 각자가 받아든 삶이라고 하는 텍스트를 열린 자세로 해석하고 그 해석대로 산 삶에 책임을 지는 것, 그리고 타인의 열린 자세를 존중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우리는 사실 매사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사소한 것에도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게 되면 결과에 따라 지나치게 일희일비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거시적이고 입체적인 삶을 살기 어려워진다.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면 악착같은 자세를 담보하게 되고, 이 ‘악착같음’은 필연적으로 좁은 시야와 편집(偏執)을 불러온다. 종내엔 불화와 갈등을 불러온다.공허한 다짐이 되고 말았지만 내가 까미노를 시작할 때 ‘악착같이 걷지 않겠다’고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퍽퍽한 것 보다 헐거운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매사에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면 여유가 없어 많은 것들을 놓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불교에서 말하는 공(空)과 노자가 말하는 허(虛)는 왜 우리가 악착같아서는 안 되는지, 왜 우리가 너무 심각하고 진지해서는 안 되는지를 잘 말해 준다.공과 허는 약동하는 생명에너지로 가득 찬 빈 공간을 말한다. 악착같이 공부하는 학생은 우등생은 될 수 있을지언정 ‘공부의 신’은 될 수 없다. 공부를 즐길 수 있는 여유, 공과 허가 없기 때문이다. 악착같이 인생을 사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공과 허가 없는 그의 삶에는 공허(空虛)만 깊을 가능성이 높다. 그 과정에서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실 자금 와서 생각해 보면 하루에 몇 킬로미터를 걸어야 한다는 그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너무 많은 것들을 놓쳤다는 아쉬움이 크다. 어떤 방식으로 걷느냐는 문제는 자신의 가치관에 따른 것이므로 어느 쪽이 낫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나처럼 경직된 방식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갖는 애초의 의미에 부합하는 방식인지 충분히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단지 조금 일찍 알베르게(순례자 숙소)에 도착하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차량을 이용하는 편이 낫고,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목적이라면 극기체험캠프를 찾는 편이 더 마땅하지 않을까.하다못해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까미노를 걷는다한들 그게 무슨 허물이겠는가. 목적 없는 까미노는 의미도 없는 것일까. 목적 없이 걷는 그 순례자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 것이다. 오온(五蘊)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다섯 단계의 인식 매카니즘은 순정(純正)한 무의미를 용납하지 않는다. 아무리 의미 없이 걸어도 그 길은 결코 무의미할 수 없다. 목표와 목적 없는 삶도 무의미 하지 않다. 색수상행식의 오온작용은 그에게도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므로 순정한 무의미는 가능하지도 않다. 설령 그 자신이 무의미 하다고 느끼면 어떤가. ‘그냥’ 살면 되는 거지. 목적 없는 무의미한 삶을 무가치한 삶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냥’ 까미노를 걸어도, ‘그냥’ 인생을 살아도 결코 그것은 무의미 하지 않으며, 무가치한 것도 아니다. 꼭 거창한 목표와 목적을 세우고 악착같이 살기 위해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일까. 다수가 선택한 그 방식이 과연 유일한 정답일까. 바쁜 사람에게 차(茶)는 뜨거운 물에 불과하다. 악착같이 걷는 사람에게 순례길은 ‘고난의 행군’에 불과하고, 악착같이 사는 사람에게 인생은 100년의 형벌일 뿐이다.악착같이 사는 사람에게 자비와 사랑, 용서와 관용이 깃들 공과 허가 있을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