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전언은 너무 커서계곡에 담을 수 없다그저 온몸으로 맞을 뿐홍가시나무도 황조롱이도 온몸을 맡길 뿐나는 육신에 너무 오래 끌려 다녔다몸의 언어를오독한 탓이다발정 난 수캐처럼이 술집 저 술집 떠돌아도숙취의 다음 페이지는 읽히지 않는다그럴 때마다 / 시를 오래 잊었다는 생각을 한다허공을 킁킁대며너무 멀리 걸어왔으므로내가 겪은 난독도그저 주어진 것이려니 생각한다파계사 골짜기에서쏟아져 내리는 저 폭넓은 음역일제히귀 기울이는 느릅나무들제 귀퉁이로 응답하는 집들사람의 귀만/ 알 듯 말 듯 발화점 근처에서 맴돈다카페 밖에 놓인흔들의자가 제 이름으로 흔들린다<수필가가 본 시의 세상>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가. 글을 쓰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태도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지나 않은지, 자신의 이기(利己)와 타협하는 데만 익숙해 있지나 않은지 냉철하게 살펴 볼 일이다.어딘가를 향해있는 눈의 초점이 내면을 살피고 점검하는 데 맞춰져 있지 않으면 ’그 글은 죽어있는 글이 된다. 읽기 싫어진다. 성찰은 자신 안의 냇물을 새롭게 정화하는 지킴이라고 본다. 거듭나게 한다. 깎여지고 다듬으며 아픔을 견디는 일이다. 늘 나에게도 당부하는 말이기도 하다. ‘파계사 계곡에서’ 시인은 바람의‘ ’폭넓은 음역‘을 들으며 그동안 겪은 세상 이치에 대한 난독’의 이유를 ‘알 듯 말 듯 발화점 근처’까지 왔음을 깨닫는다. 잡히지도 잡을 수도 없는‘바람의 음역’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 글 쓰는 사람들의 자세일 것만 같다.<박모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