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야 알았지만 이 마을 가운데에는 특별한 기둥이 있다. 16세기에 건축되고 18세기 들어 재건된 르네상스 양식의 성모승천 성당(산타 마리아 성당) 앞에 7미터 높이로 우뚝 서 있는 이 돌기둥의 이름은 ‘심판의 기둥’다섯 겹의 원추형 기단은 인간세상을, 우뚝 솟은 기둥은 천국으로 가는 사다리를, 플랑드르 장식을 한 원형의 탑은 천국을 상징한다고 한다. 둥근 탑과 기둥의 연결부에 조각돼 있는 악마들은 천국으로 오르는 영혼을 심판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까미노의 프랑스 루트에서 만날 수 있는 ‘심판의 기둥’ 중 가장 아름답다는 이 마을의 돌기둥은 중세시대 공개재판 때 죄인을 묶어 사형시키던 사형대이다.심판관은 먼저 죄인의 인적 사항부터 확인하고 ‘네 죄를 알렷다’라고 심문을 시작할 것이다. 죄인은 죄를 시인하고 마지막으로 선처를 호소하거나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몸부림쳤을 것이다. 혹은 저주에 찬 악다구니를 쏟아 내거나.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이 기둥에 묶인 이상 다시는 이 돌기둥을 바라볼 수 없다. 이 ‘아름다운’ 돌기둥을 짊어지고 ‘아름답지 않게’ 생을 마감했을 그들이 지은 죄는 어떤 것이었을까? 살인죄? 반국가단체결성죄? 아니면 소크라테스처럼 신성을 모독하고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 그것도 아니라면 시인처럼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그 어떤 죄보다 빠져나가기 어려운 죄는 무엇일까. 인간에게 가장 무거운 죄는 무엇일까.판관이 묻는다. ―네 죄를 알렷다? 그러자 그가 결백을 주장한다. ―나는 무죄입니다. 나는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판관이 말한다, ―너의 죄는 그의 죽음과는 상관없다. 그러나 너의 죄는 인간이 범하는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다, 그가 묻는다. ―그래서 내 죄는 무엇입니까?’ 판관이 대답한다. ―너의 죄는 인생을 낭비한 죄다. 그러자 그가 힘없이 낮게 중얼거린다. ―그렇다면 나는 유죄군. 유죄, 유죄......살인죄는 부인했건만 ‘인생을 낭비한 죄’는 부인하지 못하고 유죄를 인정한 이 영화 속 사내의 이름은 앙리 샤리에르. 몸에 새겨진 나비 문신에서 따온 그의 별명은 빠삐용.불경에 ‘사람 몸 받아 태어나기 어렵다(人身難得)’ 하였는데 그 어려운 사람 몸 받기에 성공한 사람이 인생을 낭비한다면 미상불 그 죄가 어찌 크지 않다 할 것인가.내가 ‘인생을 낭비한 죄’로 저 아름다운 ‘심판의 기둥’에 묶여 있다면 당당하게 무죄를 주장할까, 아니면 깨끗이 유죄를 인정하고 아름다운 기둥에서 ‘아름다운 최후’를 맞이할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악에 받힌 저주를 퍼부으며 구질구질한 최후를 맞이할까. 만약 ‘증거불충분’ 같은 이유로, 혹은 ‘죄 없는 자, 저 자에게 돌을 던져라.’라며 길을 가던 어떤 성인이 나선 덕분에 극형을 면하게 된다면 형량은 얼마나 될까. 나이 60에 지난 59년 364일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나는 그래봤자 광복절 특사나 초파일 특사 대상도 되지 않는 종신형을 받지 않을지 심장이 쫄깃해진다. 석가세존께서도 ‘일체가 무상하니 부지런히 정진하라(諸行無常 不放逸精進)’ 하셨고, 수년전엔 프란치스코 교황도 ‘새해 불꽃놀이는 잠깐이다. 생의 유한함을 성찰하라’고 하였거늘 나는 짧은 청춘을 영원히 소유한 듯 방일하면서 60년을 낭비하고 말았으니 딱 봐도 이건 사면 없는 종신형 각이다. 제행이 무상한 줄도 모르고 ‘황홀한 착각’ 속에서 화려한 ‘불꽃놀이’를 즐길 때가 좋았지. 진즉에 젊은 베르테르도 이렇게 한탄하였거늘.‘신이시여! 어찌하여 제 정신을 차리기 전과 다시 제 정신을 잃어버린 후에야 행복하도록 인간을 설계하셨소?’그래도 판관에게 깨알 같은 최후진술 한 마디는 꼭 하련다.―존경하는 재판장님, 2022년 봄 까미노를 걸었던 것을 정상 참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물집도 심했지만 점프도 하지 않았고, 동키 서비스도 받지 않았습니다. 아, 그리고 비록 기간제 비정규직이긴 하지만 까미노 천사가 된 적도 있습니다.그러고는 미세먼지 한 점 없는 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 세상과 하직하게 되겠지. 며칠 전 꿈에서처럼 ‘안녕,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아...’ 라는 고별사를 끝으로. 그리고 아무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시간이 곧 시작되겠지.마을을 빠져나와 40분쯤 가자 드디어 운하가 나타났다. 배는 보이지 않아도 저만치 작은 선착장도 보인다. 입간판에는 운하에 대한 설명인 듯한 스페인어가 적혀 있다. 틀림없는 선착장이었다.
모처럼 앞서 가던 내가 뒤돌아서서 드디어 운하가 나타났다고 신부님을 향해 소리 질렀다. 마침내 ‘밀밭의 형벌’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더 걷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보다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밀밭의 감옥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더 컸다. 나무들이 있고 물이 흘러가는 이 평범한 환경이 특별한 축복처럼 다가오는 놀라운 순간이었다.이 카스티야 운하는 18세기 후반부터 시작해서 19세기 초반까지 긴 세월 동안 조성됐다고 한다. 스페인 북부 지방인 부르고스 주와 팔렌시아 주, 바야돌리드 주의 총 45개 지방을 거쳐 프로미스타로 이어진다. 당시 지역 간 곡물운송의 주요한 수단이었으나 지금은 관개용수 공급용으로 이용된다고 한다. 전장 207킬로미터의 카스티야 운하는 근대 스페인 최대 토목 프로젝트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배낭을 내팽개치고 작은 입간판이 인색하게 내어주는 그림자에 몸을 우겨넣고 주저앉았다. 물집으로 쓰라린 발을 달래려 양말을 벗고 운하를 보여주었다. 오늘 너의 일과는 다 끝났다, 위로해 주면서.배가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배를 탈 수만 있다면 몇 시간이고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 주는 것만큼 안도감을 주는 일이 어디 있을까. 특히 지금처럼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는.때마침 멀리서 통통통통통...... 희미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엔진 소리 같은 기계음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배가 오는 모양이었다. 벌떡 일어서서 배를 영접할 준비를 했다. 일이 풀리려면 이렇게 풀리는구나. 그러나 5분, 10분이 지나도 기계음만 들릴 뿐 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집중해서 들어보니 기계음이 점점 더 커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가만히 보니 저쪽 밭에서 양수기로 운하의 물을 끌어가는 소리가 아닌가. ‘폭망’이다. 급 실망하며 나라 잃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양쪽 발이 더 아파오기 시작한다. 물집도 물집이지만 특히 왼쪽 엄지발가락과 연결된 종자골이 지속적으로 통증을 유발한다. 절뚝이며 걷다보니 언제부턴가 왼쪽 발목 윗부분에 손바닥 넓이의 검붉은 멍까지 들었다. 시계를 본다. 오후 3시 45분. 프로미스타까지 아직 한 시간을 더 가야 한다. 한껏 달아오른 태양을 온몸으로 안고 절뚝거리며 걷는 한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