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때 우리들에게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다른 곳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여러 유적지를 들러 보면서 중세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 보는 기회를 가져보지 않았을까. 그런 후 복귀해서 비빔밥을 먹고 오후에 출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닌가? 마음의 여유가 아니라 체력의 여유가 있었어야 가능한 일이었나? 아무튼.
가뜩이나 무거운 배낭에 아쉬움까지 우겨넣고 우리는 발길을 돌렸다. 마을을 관통하는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골목 왼쪽의 작은 바에 들러 간단히 요기를 했다. 샌드위치, 바나나, 주스... 그렇고 그런 것들로 배를 채웠다. 먹다보니 정화 씨가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 바나나를 권해도 한사코 사양한다. 화장실로 가 세면대 수도꼭지에서 물병 가득 물을 채우고 나와 결제를 하려 하니 정화 씨가 이미 지불했단다. 까미노 천사가 가까이 있었다. 까미노에서는 더치페이가 일상이라 한국식 결제가 살짝 낯설면서 고맙다.한 시간 30분 쯤 더 가자 멀리 모스텔라레스 언덕이 보인다. 그다지 높아 보이지는 않아도 산은 산이건만 초목이 없는 민둥돌산이라 허연 암석이 흉하게 드러나 있다. 길은 개울처럼 굽이치며 왼쪽으로 비스듬히 산 정상으로 드리워져 있다.나무다리 위로 오드리야라고 하는 작은 강을 건너 본격적으로 모스텔라레스 고개를 오르기 시작했다. 길도 넓고 경사도 심하지 않건만 힘이 드는 건 숨길 수 없다. 신부님, 나, 정화 씨의 간격이 점점 벌어진다.
산 정상의 제법 그럴싸한 쉼터에 도착하자마자 배낭을 패대기친 후 뒤를 돌아본다. 저 아래에서 정화 씨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등반가처럼 천천히 한 발 한 발 정상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세 번째 까미노라 노련해진 덕분인지 그녀의 한갓진 걸음이 까미노와 참 잘 어울린다. 한참 뒤쳐져 보이던 그녀가 정상 쉼터까지 오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카메라로 주변 풍경 몇 컷 찍고 나서 보니 어느새 정화 씨가 코앞까지 올라와 있었다. 까미노를 걷다보면 느끼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이런 것이다. 거리가 꽤 벌어졌다 싶어도 뒷 사람이 주저앉지만 않고 느리게라도 한 발 한 발 내딛기만 하면 의외로 금세 뒤따라온다는 것이다. 며칠 전 벨로라도에서 아헤스로 가던 중에 만난 프랑스 부부가 생각난다. 프랑스 집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젊은 부부는 각각 유모차를 밀고 있었다. 아내는 배낭 없는 맨몸으로 두 살 쯤 돼 보이는 아기가 탄 유모차를, 남편은 묵직한 배낭을 짊어진 채 갓 태어난 신생아가 탄 유모차를 밀고 있었다. 서너 발짝 뒤에는 너 댓살 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가 막대기로 장난을 치면서 뒤따르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나선 길인 듯 했다. 부부는 간간이 뒤돌아 큰 아이를 챙기며 묵묵히 유모차를 밀었다. 울퉁불퉁한 비포장길에서 유모차를 미는 일이 여간 힘에 부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이제부터는 급경사다. 나는 부부를 뒤로 하고 먼저 경사지를 오르기 시작했다. 발가락 근처에 난 물집 탓에 내리막은 부담스러워도 오르막은 상대적으로 편하게 걸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빠르게 언덕을 오르고도 제법 먼 거리를 가서 길가에 앉아 잠시 양말을 벗고 물집 상태를 살폈다. 지금쯤 부부는 급경사 끝에서 기진맥진 상태로 쉬고 있겠지 하며 뒤를 돌아보니 놀랍게도 그들은 아까와 똑 같은 속도로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나의 거친 호흡이 채 가라앉기도 전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내 짐작과는 달리 쉬지도 않고 그대로 걸어온 듯했다. 느리지만 쉬지 않는 한 발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 부부였다.한참 뒤쳐져서 느리게 걸어 올라오던 정화 씨가 물 한 모금 마시는 틈에 정상에 도착하는 모습을 보니 인생에서도 조금 앞섰다고 우쭐하거나 조금 뒤쳐졌다고 조바심 내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알겠다. 주저앉아 버리지만 않는다면 ‘한 발의 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길은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다만, 한 발 다가가면 한 발 줄어든 것이고, 한 발 물러서면 한 발 늘어난 것이다. 인생의 어떤 고비에서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 발을 앞으로 내딛는 것이다. 기어코 내디딘 그 한 발이 마침내 천릿길을 등 뒤에 있게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쉼터에 도착한 정화 씨와 가벼운 덕담을 주고받으며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걸어온 길이 저 아래로 펼쳐져 있다. 멀리 신라왕릉 같은 산 위로 허물어진 성이 가물가물 보이고 아래로 까스뜨로해리스 마을이 보인다. 마을을 거쳐 넓은 들판사이로 구비 돌아 이어진 길이 내 발 밑까지 와 깔려 있다. 저 아름다운 길을 힘들게 걸어왔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는다. 모든 길은 지나고 나서 보면 이렇게 아름답다. 이제 보니 푸르던 밀밭이 어느새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걷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푸르던 밀이 노랗게 익어 가는지도 몰랐다. 하긴, 정신없이 살다 어느 날 문득 푸르던 청년이 백발성성한 노인으로 바뀐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 일에 비하면 뭐 이쯤이야.(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