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분쟁과 갈등을 보면 거개가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 간의 싸움, 혹은 나쁜 사람과 나쁜 사람들 간의 싸움이다. 거의 모든 싸움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간의 싸움이 아니라는 점은 놀라운 사실이다.오늘도 지지고 볶는 저 부부, 부모의 유산을 놓고 소송전을 펼치는 저 형제들, 퇴근길에 멱살잡이를 하는 저 직장 동료들, 도로 중앙에 차를 세워놓고 마구 삿대를 휘두르고 육두문자를 내뱉는 저 운전자들의 분쟁의 대부분은 좋은 사람 간의 분쟁이거나 혹은 나쁜 사람들 간의 분쟁이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간의 분쟁은 아니다. 우리의 비극, 우리의 불행은 거기에 있다. 차라리 저 부부 중 하나가, 저 형제들 중 하나가, 저 동료들 중 하나가, 저 운전자들 중 하나가 명확하게 나쁜 사람이라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명쾌할까. ‘나쁜 놈’만 욕해버리면 되니까. 그런데 인간세계 대부분의 분쟁은 ‘명확하게 나쁜 사람들’과 ‘명확하게 좋은 사람들’간의 분쟁이 아니라 ‘불명확하게 좋은(혹은 나쁜) 사람들’간의 싸움이라는 게 함정이다.대부분의 분쟁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분쟁이 아니라면 이 싸움들은 무엇인가? 자녀들에게 저 부부의 싸움은 무엇이며, 늙은 부모에게 저 형제들의 분쟁은 무엇이며, 다른 직장 동료에게 저 두 동료의 멱살잡이는 무엇이며, 교통경관에게 저 두 운전자의 삿대질은 무엇인가. 선과 악의 구도도 아니고, 그저 왼손과 오른손이 싸우거나 엄지와 검지가 싸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우리는 너나없이 저런 부부이며, 저런 형제이며, 저런 동료이며, 저런 운전자면서 “내가 저런 ‘잉간’ 때문에 못 산다.”며 혀를 찬다. 누구도 상대방에게는 자신이 ‘저런 잉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 하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층간소음 피해자만 있고, 군대에서 괴롭힘 당한 졸병만 있고, 첫사랑 연인을 떠나보낸 사람만 있는 기괴한 현상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천사이자 동시에 누군가의 악마’라는 말은 요지경 속 인간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그런 모순에는 눈을 감고 사람들은 이렇게 엘레강스하게 자신을 표현한다,“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잉간’)을 경멸했으며, 인간을 그리워한 인간”이런 ‘우아한 개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현대인들이다. 실은 대부분 ‘인간을 그리워하고, ‘잉간’을 경멸하면서 인간을 그리워하는 ‘잉간’’이면서... 뭐, 아니면 말고.
그러다보니 인간세계의 저 지긋지긋한 위선에 신물이 나고 지칠 대로 지쳐 어느 날 까미노를 갔더니 세상에! 앞을 봐도 천사, 뒤를 봐도 천사, 까미노 800킬로미터에 천사들이 지천으로 널렸다. 하늘에서 금방 내려와서 발에 흙도 채 묻지 않았다. 입틀막! 감동이 한도초과다. 사람들이 까미노에서처럼 세상을 살아간다면 세상은 분명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바로 그런 세상이 석가모니와 예수가 구현하고자 한 세상일 것이고, 이 멀고 험한 길을 걸어간 야고보 사도가 꿈꾸었던 세상일 것이다. 그들의 꿈은 2천년, 2천5백년이 넘도록 여전히 미완이다. 겉으로는 자비와 사랑, 배려와 공감을 내세우지만 그조차도 조건부다. 여차하면 손바닥 뒤집듯 태세전환의 고퀄리티 스킬을 시전 해 준다. 터닝 포인트는 바로 손익분기점이다. 손실이 이익을 초과하는 순간 많은 인간들이 ‘잉간’으로 ‘페이스 오프’한다. 전날 부르고스~온타나스 구간에서 길벗인 베드로 신부님과의 대화에서 인간의 에고(ego)가 구원과 해탈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했던 바로 그 지점이다. 에고, 역시 ego가 말썽이다.정화 씨가 ‘까미노 매직’이라고 표현한 ‘사랑의 도미노’는 까미노 800킬로미터를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분명할 것이다. 까미노에 진심인 정화 씨는 까미노가 왜 아름다운지, 자신이 왜 매번 까미노를 다시 찾아오는지를 부연했다.“사람과 일상에 지치고 힘들면 내 안의 선함이 그리워질 때가 있잖아요. 내 안의 선함을 다시 꺼내보고 싶어질 때,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해 주고, 나도 그것을 받고 싶어질 때 그럴 때 까미노를 걷고 싶어져요.”그녀는 그것을 요약해서 ‘내 안의 착함을 만나고 싶어질 때’라고 정리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예쁘고 아름다운 말이 또 있을까. 듣는 사람의 영혼까지도 아름답게 물들여 주는 이 눈물겹도록 놀라운 한 마디. 그녀의 이 말 보다 더 훌륭한 복음, 더 신박한 법문이 또 있을까. 까미노 천사들도 순례를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곧장 성격 까다로운 동료, 꼰대 상사, 잔소리 꾼 부모가 될 것이다. 때로는 길 한복판에서 삿대질하며 육두문자를 쏟아내기도 할 것이다. 나도, 상대도 전직 까미노 천사였다는 것도 모른 채. 설령 그럴지언정 ‘기간제 천사’도 충분히 아름답고 의미 있다. 이렇게 천년이 흐르고 나면 지금보다는 조금은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어 있을 테니까.사람들은 인생길에서의 모든 좌절의 순간들을 배낭에 담아 온다. 원망과 분노도 담아 온다. 그것들을 까미노에 풀어 놓아버리기 위해서. 사람들은 또 상처 난 영혼을 부둥켜안고 온다. 까미노의 밀밭을 지나는 푸른 바람에 영혼을 헹구기 위해서.귀국길에 그것들을 죄다 주워 담아 가게 될지라도 한순간만이라도 우리는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잠시잠깐만이라도 ‘잉간’이 아닌 인간으로 살고 싶고, ‘잉간’이 아닌 인간 속에서 살고 싶은 것이다. 인간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잉간’이라니. 이 얼마나 인간적인가. 비록 구원을 받아야 하고, 해탈을 해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면서도 완전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그 몸짓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잉간’으로 살면서도 인간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그 몸짓은 또 얼마나 숭고한가.까미노를 두 번 가는 사람들은 정말, 정말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고, 정화 씨처럼 세 번 가는 사람들은 정말, 정말, 정말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들일 것이다.물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까미노에도 인생사에 있는 온갖 오물들이 다 있긴 하지만 십법계 중 인간계보다는 나은 천상세계 급은 되는 곳이 바로 까미노이다. 내가 신부님 같은 분을 통해 ‘제네비이브가 정말 고마워하더라.’는 말을 전해들을 선행을 하게 되는 것처럼 누구나 자연스럽게 마법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은 까미노가 인간세계 보다 천상세계와 더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이쯤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까미노를 많이 찾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까미노에서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에게 건네는 질문이 있다. 나도 두어 번 정도 그 질문을 받았다. 한국인들이 왜 이렇게 많이 까미노를 찾느냐고. 지금은 코로나19로 한국인 순례자 수가 급감한 상태지만 2019년까지만 해도 한국인 순례자 수가 전 세계 10위권 내, 아시아에서는 단연 1위였다고 하니 궁금해 할 만도 하다.그 질문을 접할 때마다 ‘경쟁에 지쳐서...’ 라고 해 주었지만 까미노를 걸으면서 내내 생각해 보니 두어 가지 이유가 따로 있긴 있었다. 물론 일반적인 시각과는 조금 다른 한국인의 기질적인 측면에서.첫째, 한국인은 목표 지향적인 특성, 혹은, 강한 도전정신을 갖고 있다. 근현대사만 보더라도 대한제국 독립, 수출 100억불 달성, 경제개발5개년 계획, 민주주의 실현, IMF 극복 등 구체적인 목표와 목적이 제시되면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속된 말로 ‘미친 듯이’ 매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나라 보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지지율을 높이기 쉽다. 비전제시와 동기부여만 잘 해주면 지지율은 저절로 오른다.외국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너는 무슨 과목을 좋아하니?’ ‘친구는 몇 명이야?’ ‘오늘은 무엇을 하며 놀았니?’ 이런 걸 묻는다. 한국 부모들은 ‘이번에 몇 점이 목표야?’ ‘몇 등 할 자신 있어?’ ‘커서 뭐가 될 거야?’ 라고 묻는다. 꼭 나쁘다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는 이렇게 목표지향적(도전적)인 DNA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돈내기(노동 할당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나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구구한 다른 분석들도 있겠으나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얼마나 도전적이며, 목표지향적인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인지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현상이라고 본다.그 목표지향적인 DNA가 오랜 가난과 무지를 극복하고, 세계 10대 부국이자, 세계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나라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황홀한 목표를 달성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당황한 사람들이 ‘혹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행복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성찰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럴 때 새로운 목표가 제시되면 무서운 결집력으로 목표달성을 위해 내달릴텐데 지금은 그런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는 지도자가 없다. 결국 각자가 제각기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하지만 불행히도 개인들에게도 목표는 없다. 심지어 젊은이들도 꿈이 없다고 하는 시대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항상 눈앞에 펼쳐져 있던 목표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당황하게 되었고, 목표의 진공상태에서 찾은 것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아닐까. 최소한 한 달 동안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미친 듯이’ 나아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둘째, 한국인에게는 싸움 유전인자, 혹은 고난극복의 DNA가 있다. 전쟁을 많이 겪은 영향인지 한국인들은 싸우는 것을 좋아하고 즐긴다. 평범한 스포츠 게임을 하면서도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을 외친다. 우스갯소리지만 일본인들은 자녀들에게 ‘남에게 절대로 폐를 끼치지 마라.’고 가르치고 중국인들은 ‘남에게 절대로 속지 마라.’고 가르치는 반면 한국인들은 ‘남에게 절대로 지지 마라.’고 가르친다는 말은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절묘한 분석이다. 오죽하면 무역전쟁, 외교전쟁, 입시전쟁, 취업전쟁, 스펙전쟁에 이어 육아전쟁이라는 말까지 생겼을까. 돌아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와의 싸움, 좌우익의 싸움, 남북의 싸움, 가난과의 싸움, 독재와의 싸움, IMF 금융위기와의 싸움, 진보와 보수의 싸움 등 수많은 고난과 극복의 과정에서 싸움과 전쟁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부부간의 삶마저도 ‘사랑과 전쟁’으로 표현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저 70년대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는 또 어떤가.단지 타인과의 싸움, 나쁜 상황이나 환경과의 싸움만 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싸움을 즐기는 ‘파이터 기질’은 자신과의 싸움으로까지 이어졌다. 고난과 고통을 극복하고 자신과의 싸움을 펼치는 대표적인 분야가 산악등반이다.논란이 있긴 하지만 고상돈, 김창호, 박영석, 한왕용, 김재수, 허영호, 엄홍길, 지현옥, 고미영, 오은선 등 세계최고봉을 등정한 숱한 산악인들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와의 싸움을 즐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동네 뒷산을 오르는 수많은 등산인들도 유명 산악인들 못지않게 한국인들의 도전정신과 ‘파이터 기질’을 입증하는 데 큰 지분을 차지한다. 고통과 고난을 두려워하고 회피하기 보다는 정면에서 그것들과 싸워서 극복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다. 마치 고통극복의 쾌감에 중독된 사람들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러한 기질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산티아고 800킬로미터 순례길에 나서게 한 것은 아닐까. 뚜렷한 외부의 목표와 적이 없어지자 자신과의 싸움으로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꾼 한국인들이 선택한 대상이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까미노는 한국인들의 또 다른 전쟁터인지도 모른다. 당장 나만 해도 ‘경쟁하듯 악착같이 걷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우고도 얼마나 악착같이 걸었던가. ‘까미노 입덕’ 정화 씨와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까스뜨로헤리스로 가는 길목에서 산 안톤 수도원 유적지를 만났다.
이 수도원은 원래 부르고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가톨릭 국가인 카스티야 왕국의 왕 페드로1세의 궁전이었다가 왕국의 몰락과 함께 수도원으로 변모했다고 한다. 이후 순례자들에게 숙식을 비롯한 많은 편의를 제공해 준 것은 물론 순례자들 중 ‘산 안톤의 불’이라는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고 치료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몸속에 불이 난 것 같은 극심한 고통과 함께 손발의 끝이 썩어 들어가는 증상이 나타나는 이 병은 중세 북유럽 사람들의 주식인 ‘라이보리’의 곰팡이 균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엔 병의 원인을 알지 못했으나 병자들이 순례길을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라이보리’를 섭취하지 못하게 되면서 병이 호전되었다고 한다. 산티아고에 도착할 때쯤에 병이 낫자 사람들은 야고보 사도와 수도원이 병을 낫게 해 주었다고 믿었다고 하니 종교적 믿음에는 종종 이런 ‘거룩한 오해’도 한 몫을 하는 모양이다.산 안톤 수도원은 14세기부터 퇴락의 길로 접어들어 지금은 건물의 일부만 남아 있다. 수도원 아케이드를 통과하자 곧게 뻗은 아스팔트길 끝에 경주의 신라 왕릉 같은 작은 산이 보인다. 산 왼편 아래로 까스뜨로헤리스(Castrojeriz) 마을이 들어 앉아 있고 정상께에는 허물어진 하얀 성채(Castillo)가 눈에 띈다. 정화 씨가 ‘마을에서 자고 아침에 성에 올라 내려다보는 전망이 꽤 좋다’고 일러준다. 성은 고대 로마인들이 지었고 나중 스페인에서 추가로 성벽을 더 쌓아 올렸으나 세월을 이기기 못하고 허물어져 지금은 일부만 남아있다. 스페인의 중요한 중세 유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성 안에는 수도원, 성당, 병원, 저택 등이 빼곡히 자리잡고 있으며 순례자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있다고 한다. 까스뜨로헤리스에는 중세는 물론 로마와 서고트 왕국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8세기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무슬림, 즉 무어인들과 가톨릭 간의 무수한 전투가 벌어진 요새로도 유명하다.까스뜨로헤리스에는 언덕 위의 성채 외에도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양식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건축된 산타마리아 델 만사노 부속 성당과 산토 도밍고 교구성당 겸 박물관, 산 후안 성당 등이 있어 신심 깊은 가톨릭 신자들의 발길을 붙는다.우리는 한국인이 운영한다고 하는 오리온 알베르게를 찾았다. 까미노 덕후 정화 씨가 ‘라면, 비빔밥 같은 한국 음식도 판매한다.’고 정보를 제공해 준 덕분이었다. 웬만큼은 현지음식에 진심인 편인 나도 한국을 떠난 지 한 달 가까이 되고 보니 오색찬연한 비빔밥 한 그릇이 눈앞에 왔다갔다 한다.오리온은 쉽게 눈에 띄었다. 아침도 먹지 않고 두어 시간을 부지런히 걸어 온 세 사람은 빨려 들어가듯 오리온 알베르게 마당으로 들어섰다가 이내 되돌아 나왔다. 한국인 여주인이 매우 사무적인 어투로 오픈 시간이 아직 멀었다고 한 것이다. 이제 겨우 오전 8시인데 점심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우리는 입맛만 다시고 오리온을 떠났다.만약 우리들에게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면 다른 곳에서 간단히 요기라도 한 후 까스뜨로헤리스의 여러 유적지를 들러 본 다음 복귀해서 비빔밥을 먹고 오후에 출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닌가? 마음의 여유가 아니라 체력의 여유가 있었어야 가능한 일이었나? 아무튼.
아쉬움을 안고 오리온을 나온 우리는 마을을 관통하는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골목 왼쪽의 작은 바에 들러 간단히 요기를 했다. 샌드위치, 바나나, 주스... 그렇고 그런 것들로 배를 채웠다. 먹다보니 정화 씨가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 바나나를 권해도 한사코 사양한다. 화장실로 가 세면대에서 물병 가득 물을 채우고 나와 결제를 하려 하니 정화 씨가 이미 지불했단다. 까미노 천사가 가까이 있었다. 까미노에서는 더치페이가 일상이라 한국식 결제가 살짝 낯설면서 고맙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