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긴 해도 제네비이브도 산볼 마을의 밤하늘이 특별히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무리해서 산볼 까지 일정을 잡았을 것이다. 우리처럼 예약제라는 사실은 모른 채. 인생도 때때로 우리의 기대와 계획을 매몰차게 저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럴 때마다 우리는 좌절하고 실망하지만 인생이란 꼭 그래야 한다는 법도 없고, 꼭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법도 없다. 어쩌면 인간의 불행은 반드시 이렇게 돼야 한다는 고정되고 확정된 생각이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들어맞으면 좋아 하고, 그 틀에 맞지 않으면 싫어하는 치우친 생각이 모든 불행의 근원인지도 모른다. 일찍이 공자도 <논어>에서 ‘무가무불가(無可無不可)’라 하지 않았던가. 세상만사 모두 ‘그럴 수도 있는 법’이라고 여기고 살면 괴로울 일도, 서러울 일도 없으련만 오늘 신부님과 제네비이브, 나 세 사람의 발걸음에는 괴로움과 고달픔이 덕지덕지 묻어난다.
셋은 말이 없다. 그저 온 몸을 뜨거운 태양에 고스란히 내어주고 기계적으로 걷는다. 처음부터 제네비이브가 뒤로 처진다. 발끝만 내려다보며 힘없이 걷는다. 신부님은 조금씩 앞서가기 시작한다. 나는 제네비이브를 의식해 속도를 조금씩 늦춘다. 그래도 그녀가 점점 더 멀어진다. 잠시 갈등이 인다. 힘들어 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먼저 가는 게 옳은 일일까, 하는 생각과 어설픈 동정은 오히려 아니 갖는 것만 못 하다는 생각이 교차한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속도는 신부님과 맞추고 간간이 뒤를 돌아보며 제네비이브의 상태를 확인해 가며 걷는다. 잠시 돌아서서 폴대를 든 손을 흔들어 줘도 힘없이 고개를 떨군 채 걷는 제네비이브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같은 길을 걸어도 길은 이렇게 도저하게 개별적이다. 같은 길을 걷는 동행도 결국은 각자가 다른 길을 간다. 함께 사는 사람들도 실은 제각기 다른 삶을 사는 것처럼. 까미노도, 인생도 외로운 것은 혼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동행을 하는 사람들도 도저히 개별적인 까미노, 철저히 개별적인 인생 앞에서는 속절없이 외로워진다. 까미노도, 인생도 외로워야 진짜다. 여행 작가 폴 서루는 “고독이 두려우면 여행하지 마라.”고 일갈했거니와 어디 여행뿐이랴.사실 이날 우리는 악명 높은 메세타(고원) 구간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해발 800~900미터의 고원지대를 지나는 이 구간은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178킬로미터로 많은 순례자들이 일명 ‘점프’를 하는 구간이다. ‘끝없이 고독한 황무지 길’로 알려진 이 구간에는 알베르게나 바는 물론 마땅히 쉴만한 그늘도 찾기 어려워 많은 순례자들이 부담스러워 한다. 나는 신문사와의 원고 마감 날짜를 맞추기 위해 메세타 구간을 ‘점프’할 것인가, 아니면 1일 걷는 거리를 늘일 것인가를 놓고 저울질 하며 걷는 중이었다. 풀코스로 걷자니 원고마감이 부담스럽고, ‘점프’를 하자니 두고두고 개운찮을 것 같아 결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참이었다.당시 나는 메세타 구간이 까미노 후반부에 있는 것으로 오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구간이 메세타 구간이라는 것을 안 것은 메세타가 끝나는 레온도 한참 지난 후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행인지 불행인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까미노 800킬로미터를 인생 80년으로 대입하면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 쯤 되는 시기가 딱 이 구간이다. ‘인생의 황금기’라 할 만 한 시기에 우리는 제 발로 고통의 터널 속으로 들어간 셈이다. 고통은 피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가장 고통스럽게 군다. 고통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이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 진짜 내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는 식의 자기 위안도 일시적인 마취효과는 줄지언정 삶을 온전히 자기 주도적으로 사는 방법은 되지 못한다. 훗날 그 고통의 시간들이 모두 내 인생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는 부조리를 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하이데거는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죽기에 충분할 만큼 늙어 있다’고 했다. 죽음은 언제 찾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내일이 먼저 올지 내생이 먼저 올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음은 인간이 실존적 삶을 살아야 하는 충분조건이다.이미 지나갔거나 아직 오지 않은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는 아무 소용없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서’ 충분한 의미 실현이 이루어져야 한다. 삶의 총력을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 쏟아붓는 것이 실존적 삶을 사는 길이다.
시지프스처럼 고통을 온몸으로 마주하는 것, 니체가 말한 것처럼 위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자기 주도적 삶, 실존적 삶을 사는 길이다.(니체는 ‘풍파 없는 항해란 얼마나 단조로운가. 고난은 나의 심장을 뛰게 한다...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그대의 도시를 세우라.’고 했다)실존적 삶의 3대 조건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까르페 디엠(Carpe diem)’, ‘아모르 파티(Amor fati)’가 아닐까. 죽음을 기억(메멘토 모리)하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까르페 디엠)한 사람이라야 자신의 운명을 사랑(아모르 파티)할 수 있다. 인간의 유한성과 개별성을 인식하지 못하면 현재에 충실한 태도를 취하기 어렵다. 현재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지 못한다. 환경을 탓하고 운명을 한탄한다. 이러한 부조리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고통조차도 온전한 내 몫으로 끌어안는 것이다. ‘강하다는 것은 이를 악물고 견뎌낸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한 산악인 고미영은 그러므로 아모르 파티의 경지에 오른 실존적 인물이라 할 만하다. 오직 인간만이 스스로를 고통과 위험 속으로 몰아넣는 동물이다. 고통과 위험은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만들고, 그의 삶을 실존적으로 견인한다.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178킬로미터의 황량한 메세타 구간은 분명 힘든 구간이긴 하다. 그러나 또한 어떤 구간보다 아름다운 길이기도 하다. 어쩌면 인생길도 힘든 그 시간들이 인생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일지도 모른다.3킬로미터쯤 가자 저 멀리 오른쪽으로 집 한 채가 보인다. 거리가 멀어 농가인지 알베르게(순례자 숙소)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제발 알베르게이기를 기대하며 다가가니 가물가물 스페인 국기 로히구알다가 펄럭이고 있다.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초입에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물을 ‘폭풍흡입’했다. 물병의 물도 그새 더위에 지쳐 한껏 늘어졌다. 그제야 산볼 초입에서 만났을 때 제네비이브에게 시원한 물 한 모금 건네주지 못 한 것이 떠오른다. 내게는 산볼 알베르게에서 금방 받은 시원한 물이 물병 가득 있었건만.
돌아보니 제네비이브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뒤쳐진 것일까. 나는 길에서 100여 미터 들어간 곳에 있는 알베르게로 갔다. 그녀가 오기 전에 알베르게 체크인이 가능한지 여부를 미리 확인해 두면 수고를 조금은 덜어 줄 수 있겠다는 심산이었다.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제법 깔끔하고 아담하다. 입구에서 ‘올라!’ 하니 리셉션 여직원이 바에서 일을 하다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올라!’ 하고 받는다. 예감이 좋다. 침대가 있냐고 물으니 다행히 한 개가 남았단다. 내가 ‘예약을 하겠다. 잠시 후 제비이브라는 순례자가 오면 그녀에게 침대를 내어달라.’ 하자 흔쾌히 그러겠단다. 조금은 못 미더워서 ‘그녀가 몹시 지쳐 있다.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고 꼭 그녀에게 줘야 한다. 그녀를 잘 부탁한다.’고 신신당부하자 ‘오케이, 걱정 마라’며 활짝 웃는다. 여직원의 환한 미소에 마음을 놓고 돌아서 나오니 알베르게로 들어오는 초입에 제네비이브가 도착해서 신부님과 대화중인 모습이 보인다. 내가 두 팔을 높이 들어 올려 동그라미를 그리며 침대가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제네비이브, 베드 오케이, 체크인 오케이”내가 두 사람에게 다가가며 기괴한 콩글리시로 소리치자 제네비이브가 찰떡 같이 알아듣고는 고마움과 안도감이 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향해 걸어온다.“오, 제이슨. 정말 고마워요.”“유어 웰컴.”
나는 서양사람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유창한 영어’로 대답해 주었다. 오늘 푹 쉬고 내일 또 ‘부엔 까미노’ 하라는 격려를 하자 연신 뒤돌아보며 고맙다 한다. 그녀가 알베르게로 들어서다 뒤돌아서서 손을 흔든다. 힘든데 그냥 들어가서 냅다 드러누워 버리지 않고. 신부님과 나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혹시 뭐가 잘못돼 그녀가 되돌아 나올세라 잠시 멀리서 지켜보다가 다시 배낭을 짊어졌다. 배낭을 둘러매며 신부님이 내게 ‘침대가 있는지 알아보러 갔다고 하니 제네비이브가 정말 고마워하더라.’ 한다. 나는 괜히 객쩍어져서 프랑스 바욘에서 내가 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훈훈해지는 기분은 감출 수 없었다.몇 발짝이나 옮겼을까. 신부님이 제네비이브가 손을 흔들고 있다고 전해 준다. 돌아보니 알베르게 마당으로 나온 제네비이브가 크게 팔을 휘젓는 모습이 보인다. 나도 덩달아 팔을 휘두르며 답례했다.
우리가 길을 돌아 갈 때까지 그녀는 알베르게 마당에서 손을 흔들었다. 안녕, 제네비이브. 다시 만날 그날까지 언제나 꾸이다떼!(몸 성히!)우리는 온타나스 초입에 있는 첫 건물이자 첫 번째 알베르게로 두 말없이 빨려 들어갔다. 깔끔한 새 목재로 만든 큼직한 이층침대가 띄엄띄엄 놓여 있다. 마침 스트라스부르의 집에서부터 걸어왔다는 프랑스 순례자도 투숙해 있다. 그는 까미노 첫 알베르게인 피레네 산맥 중턱의 오리손 산장에서 신부님과 함께 1박 하면서 통성명한 신부님의 오랜 길벗이다. 그와는 이후에도 자주 마주쳤다.알베르게에서 뷔페식 저녁식사를 제공했다. 샐러드와 빠에야다. 빠에야는 해산물과 육미, 채소 등을 넣어 볶은 다음 쌀을 넣어 익힌 스페인 전통음식 중의 하나다. 이 집에서는 닭고기를 넣었다. 살점을 후하게 넣었다. 노랗게 물든 밥알들이 마냥 매혹적이다.모처럼 쌀이 주재료인 빠에야를 앞에 두니 힘들었던 오늘 일정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받는 기분이다. ‘쌀아, 너 본지 오래로다.’ 춘향이 남친 이몽룡을 흉내 내며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간만에 유쾌한 대화와 함께 제대로 된 식사를 한 날이었다. 그렇게 긴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다음날 온타나스에서 프로미스타까지 34킬로미터의 여정이 시작됐다. 간밤 모처럼 쾌적한 환경에서 한 번도 깨지 않고 잘 잔 덕분에 컨디션은 좋다. 물집도 어느 정도 진정국면이다. 절뚝거리면서 걷지 않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순례자들도 잘 보이지 않는다. 잠시 낮은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좁은 오솔길을 지나니 아스팔트길이 펼쳐진다. 비포장 흙길이 아니라 아쉽다. 그래도 고요한 이른 아침에 늦잠 자는 사물들을 깨우면서 신부님과 함께 걷는 길은 싱그럽다.싱싱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걷는 길이 기대이상으로 운치 있다. 끝없는 밀밭만 펼쳐진 지나온 길들에 비하면 단조롭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적막하기까지 한 아침의 아스팔트 위를 혼자 앞서 가고 있는 한 여성 순례자가 보인다. 한발 한발 느리게 걷는 모습이 참 한가롭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한국인 같다.
“한국 분 같으신데...”거리가 좁혀지자 내가 허두를 꺼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본다. “네, 안녕하세요...”그렇게 이정화 씨와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신부님과 인사하면서 자신도 가톨릭 신자란다. 에밀리아라는 예쁜 세례명을 알려준다. 등에 배낭이 없기에 궁금해서 물으니 동키로 보냈단다. 동키(Donkey 당나귀)란 택시 등 차량으로 다음 도착지에 짐을 먼저 보내는 방식이다. 대개 알베르게(순례자 숙소)를 통해서 이용한다. 나는 동키가 미덥지도 않거니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낙타처럼 미련하게 등짐을 지고 가는데 정화 씨는 노련한 순례자인 듯 했다.아니나 다를까 정화 씨는 이번이 세 번째 순례길이라고 한다. 최근 이직을 하면서 그 공백을 이용해서 혼자 왔다고 한다. 세 번 째 순례길이라는 말에 놀라 내가 물었다. ‘세 번이나?’ 그러자 정화 씨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까미노를 한 번도 오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만 오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어요.’ 한다. 내게는 놀라운 말이었다. 이때만 해도 내게 이 말은 잘 곧이 듣기지 않았다. 아무리 아름다운 길이라지만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은데 같은 길을 다시 온다니. 나중 까미노 일정을 다 끝내고 어떤 자리에서 내가 또 물어 보았다. 왜 세 번씩이나 까미노를 찾았냐고. 그녀는 웬만한 세계 각지를 다 여행해 봤지만 까미노 만큼 특별한 곳은 없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어떤 까미노 천사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천사가 돼요. 이런 ‘까미노 매직’을 경험하게 되면 언제나 다시 찾고 싶어지죠.”
근래 내가 들은 말 중 가장 놀랍고 아름다운 말이었다. 듣는 순간 까미노의 본질을 너무나 적확하게 꿰뚫은 말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의 이 말이야말로 <화엄경>에서 말하는 중중제망(重重帝網) 인드라의 그물과 같은 만다라 세상을 가장 신박하게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싶다.인드라의 그물망에는 무수한 보배 구슬이 빛나지만 그 중 단 한 개의 구슬이 스스로 빛을 낸다고 한다. 그 한 개의 구슬은 다른 구슬을 비추고, 그 다른 구슬은 또 다른 구슬을 비춰 모든 구슬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빛나면서 제석천궁(帝釋天宮)을 장엄한다고 한다.
<진각교전>에도 ‘한 부처가 성도(成道)하면 국토 모두 성불한다.’고 했듯이 한 사람의 까미노 천사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천사로 만들 수도 있는 셈이다.까미노를 몇 발짝이라도 걸어 본 사람이라면,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잉간‘)을 경멸했으며, 인간을 그리워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이 가는 촌철살인이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인간애에 목말라 있는 외로운 존재인가를 반증하는 말이기도 했다.생각해 보면 까미노에서 만나는 천사들이 다른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일상에서 수시로 만나던 바로 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입는 바로 그 ‘잉간’말이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때론 악하고 때론 선한 인간만 있을 뿐이다. 아주 가끔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도 섞여 있고, 인간의 모습으로 온 보살도 있지만 여기서는 일단 논외로 두고.
불교에서는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 수라계, 인간계, 천상계, 성문계, 연각계, 보살계, 불세계 등 10법계(十法界)가 있다고 전한다. 나는 언젠가 어느 글에서 지옥계는 10퍼센트의 선과 90퍼센트의 악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귀계는 20퍼센트의 선과 80퍼센트의 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축생계는 선30-악70, 수라계는 선40-악60, 인간계는 선50-악50, 천상계는 선60-악40, 성문계는 선70-악30, 연각계는 선80-악20, 보살계는 선90-악10, 불세계는 선100-악0퍼센트의 세계라고 한 적이 있다.악의 비중이 높은 세계의 중생들은 굳이 악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악이 선을 압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의 비중이 낮은 천상계 이상의 세계도 굳이 악을 감출 필요가 없다. 능히 선이 악을 지배하거나 압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세계다. 선과 악이 반반인 인간세계는 악을 철저히 감추는 게 유리하다. 평소에는 50퍼센트의 선으로 50퍼센트의 악을 은폐하고 위장했다가 결정적인 이익이 나타났을 때 숨겨둔 악을 비수처럼 꺼내 드는 게 유리하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래서 일상에서 우리는 악은 감추고 위장된 선을 앞세운다. 위장된 선, 이것을 우리는 위선이라고 한다. ‘그 잉간이 그럴 줄 몰랐다.’ ‘부루투스 너마저...’ 이런 흔한 한탄은 얼마나 인간세계가 위선적인지, 위선이 어떤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대변해 준다. 자신 역시 ‘그 잉간’이고 ‘부루투스’면서도 그 순간의 자신은 선 100퍼센트의 부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