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쯤 더 가니 작은 마을의 한 건물외벽에 2020년 도쿄올림픽 여자역도 금메달리스트 히들린 디아즈(필리핀. 30)의 웃는 사진이 붙어있다. 자세히 보니 한 손에는 금메달을, 다른 한 손에는 성모상이 새겨진 작은 메달을 들고 있다. 신부님이 ‘기적의 메달’이라고 알려 준다. 가타리나 라부레라고 하는 성녀가 성모 마리아의 요청에 의해 만든 메달이라고 한다. 몸에 지니는 사람에게 특별한 은총을 내려 준다는 이 ‘기적의 메달’을 히들린 디아즈 선수도 어떤 인연으로 간직해 오다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모양이다.필리핀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디아즈는 매일같이 먼 곳으로 우물물을 길러 다녀야 했다. 무거운 물동이를 들고 다닌 디아즈는 이때부터 이미 역사(力士)의 길로 접어들었는지도 모른다. 올림픽을 앞두고 그녀는 체계적인 훈련은 고사하고 정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2019년에는 두테르테 당시 필리핀 대통령에 의해 반정부인물로 지목돼 가족들이 살해협박까지 받아 왔다고 한다. SNS를 통한 후원금으로 홀로 생활하며 훈련한 끝에 이룬 쾌거였다.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에 필리핀 국민들은 환호했다. 그녀의 금메달은 두테르테의 공식적인 사과라는 반전까지 이끌어냈다. 반정부인물에서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된 것이다. 55킬로그램의 그녀는 인상, 용상 합계 224킬로그램을 들어 올리면서 자신의 인생도 함께 들어 올린 셈이다.버려진 돌이 신전의 주춧돌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디아즈의 인생역전이 꼭 ‘기적의 메달’ 덕분만은 아니겠으나 종교는 때때로 ‘숨어있는 1인치’를 드러내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화엄경>에서도 ‘믿음은 도의 으뜸이요, 뭇 공덕의 어머니’라 하지 않던가.
인간은 세 가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자신을 믿어야 하고, 타인을 믿어야 하며, 보이지 않는 종교적 힘을 믿어야 한다. 자신을 믿지 못하면 비굴해지고, 타인을 믿지 못하면 고립될 수밖에 없다. 자신을 믿고, 타인을 믿더라도 종교적 믿음이 없으면 교만해지기 쉽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어느 정도 보완해 줄 수 있는 것이 종교이다. 지나친 종교적 신념, 교조적인 신앙이 문제일 뿐 종교는 아무런 죄가 없다. 종교적 신념이 지나치면 광기에 찬 괴물이 되고, 교조적 신앙에 머물면 근본주의자가 된다. 천강천월(天江千月)이라, 천 개의 강에는 각기 다른 천 개의 달이 있다. 하늘의 달은 하나건만 강에는 낱낱이 다른 천 개의 달이 있듯이 종교적 가르침은 하나일지라도 그것을 받아 지니는 이들에겐 제각기 다른 형태가 되는 것이다.불경(佛經)이 ‘부처님께서 이르시길’, ‘부처님 가라사대’, ‘부처님 왈’로 시작하지 않고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로 시작하는 이유가 있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 아난존자(부처님의 말씀을 정리한 多聞第一의 불제자)의 근기에서는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 했다고 봐야 한다.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이룬 부처님의 말씀을 같은 경지에 오르지 못한 제자가 어찌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난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너는 다르게 들었을 수 있다.’ ‘너는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다.’ ‘내 말은 부처님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내 수준에서 이해한 말씀이다.’ 등이 될 것이다.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들어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불완전성을 최소화하고 완전에 가까워 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아난존자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 가라사대’ ‘부처님 왈’이라고 해버리면 그것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는 닫힌 텍스트가 되지만 ‘여시아문’이라고 하면 완벽하게 열린 텍스트가 된다.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닫힌 텍스트는 수용자를 수동적으로 만들고, 열린 텍스트는 수용자를 능동적으로 만들어 적극적 해석을 유도한다고 보았다. 수준 높은 명작일수록 독자나 관객이 그 작품을 다양한 시각과 관점에서 이해하게 한다. 명작을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느끼는 이유가 이것이다. 명작은 다층적이고 다의적이기에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고, 동일인마저도 수시로 다르게 느끼게 되는 것, 이것이 명작만의 특징이고, 열린 텍스트의 힘이자 장점이다. 모든 성현들의 가르침은 여러 해석의 여지가 있게 마련이다. 생명력 넘치는, 살아있는 말씀일수록 그렇다. 다양한 종파가 생겨나는 이유이다. 하물며 근기 낮은 이가 자신의 알량한 수준에서 이해한 말을 성현의 말씀이라고 단정해버리면 얼마나 위험해지겠는가.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저 경상북도 울릉군 사동 언덕에서 탄생한 진각성존 회당 대조사(불교진각종 창종주)는 <불교는 우리의 풍토성과 혈지성이 맞는 것>이라는 논술에서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면 중국불교가 되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면 한국불교가 되며, 일본으로 가면 일본의 불교가 된다.’하셨다. 대조사는 그 까닭을 ‘불교의 교리가 자주적이기 때문’이라면서 ‘(다양한) 종파로 발전하므로 전도(顚倒)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경직되면 전도되지만 유연하면 전도되지 않는다. 불교는 물처럼 유연한 종교다. 불교는 무엇이다, 라고 특정해 버리는 순간 그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다. 노자도 <도덕경>에서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可道)’ 했고, 부처님께서도 <금강경>에서 ‘이른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所謂佛法者卽非佛法)’라고 하셨다. 불교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연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연한 종교를 편벽(偏僻)하고 경직되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를 어리석고 위험하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종파만 있는 종교는 위험하다. 닫힌 텍스트에 매몰돼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해한 것만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은 위험하다. 닫힌 텍스트의 노예가 돼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자는 흉기를 든 자만큼 난폭하고 위험하다. 특히나 ‘자주적’인 종교인 불교를 자신만의 독점적 사유물처럼 여기고 도그마에 빠진 사람은 배불(背佛)과 훼불(毁佛)을 일삼으면서 숭불(崇佛)로 착각한다. 그토록 ‘의의불의어(依義不依語)’라 하여 ‘뜻을 따르되 말과 문자의 표현에 따르지 말라’하였거늘.이런 자들의 공통점은 부박(浮薄)하고 어리석다는 점이다. 견강부회와 아전인수를 밥 먹듯이 하면서도 자신만 그걸 모른다. 그들은 결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 그들의 말과 삶은 전적으로 ‘서로 ᄉᆞ맛디 아니’한다.다른 종교에는 있는 이단이 불교에는 없다. 다양한 해석을 인정하는 열린 종교이기 때문이다. 아난존자부터 자신의 근기로, 자신만의 해석을 한 것을 인정하는 터에 어찌 이단이 있겠는가. 이단을 인정한다면 아난존자부터 이단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무상정등각을 이룬 붓다의 말씀을 한낱 아라한(阿羅漢)이 어찌 완벽하게 이해해서 완벽하게 전달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이쯤에서 우리가 가슴에 새겨둘 한 마디는 이것이다.“어떤 종교든 이치에 맞고 선을 행한다면 그것은 모두 불교(부처님의 가르침)다.”(진각성존 회당 대조사)불교가 이런 종교라면 자신에 대한 믿음, 타인에 대한 믿음에 이어 종교적 믿음의 대상으로 불교를 신앙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불교란 그 이름이 어떠하든 ‘이치에 맞고 선을 행하는’ 종교다.종교와 종교간, 종파와 종파간의 갈등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가르침을 편 선각자는 자비와 사랑, 포용과 조화를 그토록 강조했건만 그 종교를 믿는 수십억 인류가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는 한심한 현실은 종교의 탓이 아니라 종교를 잘 못 믿는 얼치기 종교인들 탓이다. 그것은 결국 종교 지도자들의 책임이고 지금 함께 길을 걷는 베드로 신부님이나 나 현각 정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히들린 디아즈의 사진이 붙어 있는 건물을 지나 조금 더 가자 저 앞쪽 자그마한 건물에서 한 무리의 학생들이 쏟아져 나온다. 학교는 아닌 것 같은데? 신부님과 나는 잰걸음으로 학생들 사이를 뚫고 그 쪽으로 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작고 오래 된 성당이다. 입구로 다가가니 산악자전거로 까미노를 달리는 바이크 족들이 수녀님과 기념촬영 중이다.
신부님을 따라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소박하고 아늑한 성당내부가 지친 나그네를 편안하게 감싸준다. 나이가 지긋한 키 작은 수녀님이 덕담을 하면서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시알에 세요(스탬프)를 찍어준다. 한국에서 온 신부님이라고 밝히자 수녀님이 반색하면서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 한다. 신부님이 수녀님을 앞에 세워두고 의자에 걸터앉아 합장하고 기도한 후에 수녀님의 머리에 축복을 내려준다.수녀님이 신부님과 나의 목에 차례로 ‘기적의 메달’을 걸어주며 산티아고까지 무탈하게 잘 가라고 따뜻한 덕담을 건넨다. 한국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현하면서 한국어 안내책자도 주었으나 기억만 있고 책자는 오간 데 없다. 이 날 수녀님이 걸어준 ‘기적의 메달’은 이튿날까지만 내 목에 걸려 있었다. 외가닥 실로 된 메달의 줄이 어디선가 끊어진 모양이었다. 지금쯤 기적이 필요한 누군가의 목에 걸려 있기를.성당을 나서는 우리에게 수녀님이 오늘은 어디까지 가냐고 묻고는 웬만하면 자신이 알려주는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의 알베르게에 투숙하란다. 수녀원을 개조한 곳이라 시설이 깔끔하기도 하거니와 다른 알베르게와는 차별화된 분위기 속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단다. 자세한 위치를 설명해 주는 수녀님에게 감사인사를 남기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이때가 오전 11시 10분.
두 시간 쯤 가자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가 나타났다. 수녀님이 알려준 알베르게는 까미노 길가에 있었다. 질박한 벽돌로 만든 정갈한 건물이었다. 벽에 붉은 꽃들이 만발한 작은 화분 여러 개를 매달아 놓아 길가는 이들에게 작은 위안을 준다. 아픈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도 함께 운영하는지 순례자 병원이라는 간판도 매달아 놨다.수녀님의 간곡한 당부가 걸려 잠시 알베르게 입구에서 서성이던 우리는 이내 애초 목적지로 삼은 산볼 마을까지 가기로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당초 나는 오늘 이곳 오르니요스 까지 21킬로미터를 걷기로 했었다. 발바닥 물집을 감안한 비교적 짧은 노정이었다. 그런데 함께 걸으니 걸음이 가벼워져서 신부님 제안대로 산볼 까지 26킬로미터를 가기로 한 것이다. 이 작은 마을에 있는 유일한 알베르게에서 보는 밤하늘의 별이 특별히 아름답다는 얘기에 귀가 솔깃한 탓도 있었다.수녀님이 알려준 알베르게를 지날 때는 오후 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은 이제 정수리를 넘어 앞에서 전신을 비추기 시작한다. 퍼질러 앉아 쉴만한 그늘도 없이 야속한 밀밭만 펼쳐진 길을 걷다보니 ‘경쟁하듯 악착 같이 걷지 않겠다’던 내 까미노 3대 원칙 중 두 번 째 원칙이 진즉에 무색해졌음이 느껴져서 혼자서 머쓱해진다. ‘가급적 한국인들과 동행하지 않는다’는 첫 번째 원칙은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서 홀로 걷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 세웠으나 이 원칙은 프랑스 생장에서 까미노를 출발할 때부터 깨어졌었다. 두 번째 원칙은 까미노를 즐기려면 최선을 다해 걷기 보다는 여유롭게 걸어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세운 원칙이었다. 악착같이 걷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싸움일 뿐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인생도 ‘헝그리 정신’으로 악착같이 사는 것이 미덕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것이 꼭 최고의 선은 아니다. 허리띠는 너무 풀어도, 너무 조여도 안 된다. 거문고 줄을 너무 풀어도, 너무 조여도 소리가 잘 나지 않듯이 까미노도, 인생도 중도를 취하고 싶었다.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한국인들과 동행하고 있었고, 어느새 악착같이 기를 쓰고 최선을 다해 경쟁하듯 걷고 있었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고, 악착같이 경쟁적으로 살지 않으려고 해도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 의지하게 되고, 팍팍하고 악착스럽게 살게 되듯이 까미노도 그랬다. 누구도 비난할 내용은 아니건만 간단한 원칙조차 지키기 어려운 상황, 혹은 내 의지 부족이 조금은 실망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물집과 햇빛이라는 이중고를 안고 걷는 길이라 자꾸 걸음이 처진다. 신부님은 여전히 리드미컬한 걸음으로 앞서가고 나는 바람만바람만 뒤쳐져 걸었다. 혼자였다면 이 날 역시 말도 못 하게 힘들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신부님을 따라잡기 위해 기를 쓰며 걷다 보니 저 멀리 2,3백 미터 쯤 앞에서 직진하지 않고 ㄱ자로 꺾어 들어간 신부님이 두 팔을 크게 흔든다. 이제 다 왔다는 신호다. 들판 한 가운데 있는 마을과 마을 초입의 분위기가 아주 마음에 쏙 든다. 가면서 보니 마을이라 할 것도 없었다. 초입의 건물 두어 동은 이미 지붕도 없이 벽면만 간신히 서 있는 폐가였고, 100여미터 더 들어간 곳에 있는 알베르게는 오직 홀로이 이것이 산볼마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알베르게 뒤쪽으로는 나지막한 산들이 엎드려 있고 오른쪽으로는 야트막한 구릉이 누워있다. 길 왼쪽에 나지막이 들어선 알베르게 건물이 고적하다. 사실 건물 자체는 좀 이상하다. 건물 왼쪽 부분은 컨테이너 박스를 두 개 포개 놓은 것 같고, 오른쪽 부분은 컨테이너 박스 위에 벽돌로 만든 작은 돔을 올려놓았다. 생뚱맞다고 해야 할까, 기괴하다고 해야 할까. 얼핏 보면 농막이나 창고 정도로 보이는 너절하고 추레한 건물이다. 오직 바람에 나부끼는 스페인 국기 로히구알다(적심기)와 핀란드 국기와 유사한 청십자기가 살아 있는 건물임을 말해줄 뿐이다.그런데도 어쩐지 주변은 마음에 쏙 든다. 오는 동안엔 이런 구릉조차 없었던 탓일까. 마음이 한결 포근해지면서 정감이 느껴진다. 조금 무리해서 26킬로미터를 거의 8시간 동안 걸었다. 이쯤에서 알베르게가 나타나줘서 천만다행이었다. 단 1킬로미터만 더 멀리 있었어도 보통문제가 아니었을텐데 때맞춰 나타나 주니 고맙다고 등이라도 두드려 주고 싶어진다. 게다가 이렇게 고적하면서도 정감 있는 모습으로 길손을 반겨주니 더할 나위없다. 뜨거운 오후 햇살에 지칠대로 지친 탓인지 입구를 보자 그냥 마무 데나 드러누워 버리고 싶어진다. 그래도 샤워하고 내 침대 위에 드러누워야지... 남은 힘을 쥐어짜며 입구를 들어서니 조금은 분위기가 이상하다. 너무 적막하다. 여느 알베르게(순례자 숙소) 같은 분위기나 느낌이 전혀 아니다. 흡사 폐쇄된 알베르게 같다. 먼저 들어간 신부님이 뒤돌아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건 아니겠지 하면서도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입구를 들어서서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가니 야외 테이블 몇 개가 보이고 신부님이 앉아 다른 순례자들과 대화 중이다. 나를 본 신부님이 허탈한 표정으로 ‘예약자만 받는대요. 빈 침대도 없고...’ 한다. 아뿔사!... 대부분의 무니시팔(공립 숙소)은 예약 없이 선착순인데 이곳은 규모도 작고 순례자가 몰려 예약제로 운영하는 모양이었다. 이러니 순례길 마저 경쟁으로 물들 수밖에... 사지에 힘이 빠져나간다. 배낭을 내던지고 야외 테이블 의자에 앉아 우선 신발부터 벗었다. 벗는 김에 양말까지 벗었다. 화끈거리던 두 발이 오늘 하루 일과가 다 끝난 줄 알고 물 만난 고기처럼 좋아한다.잠시 발을 식힌 후 주방으로 가 시원한 물을 받아 숨도 쉬지 않고 마셨다. 까미노의 순례자들은 대부분 알베르게의 화장실 세면기에서 물을 받아 출발한다. 까미노 어느 알베르게에서도 정수기를 본 적이 없다. 생수를 사 먹지 않으면 그냥 수돗물이다. 처음엔 썩 내키지 않았지만 금세 적응됐다. 안전한가 하는 따위의 의문은 사치다. 그저 탈이 나지 않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예약을 통해 투숙한 한국인 연인 한 쌍과 잠시 얘기를 나눈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다음 마을 온타나스 까지는 약 5킬로미터. 지금 컨디션이라면 앞으로 두 시간 가까이 더 걸어 5시쯤에 도착할 거리다.
지친 심신을 일으켜 세워 다시 길을 나섰다. 산볼 마을 이정표가 있는 초입으로 나가는데 저 멀리 초입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한 순례자가 보인다. 우리보다 훨씬 지쳐 보이는 것이 역력하다. 또 한 사람의 순례자가 낙담하며 되돌아서게 되는구나... 와인색 모자를 쓴 지친 순례자와 거리가 점점 좁혀진다. 여성이다.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이게 누군가, 제네비이브다. 프랑스 바욘에서 새벽에 40분 이상 나를 도와주었던 벨기에에서 온 순례자. 팜플로나 우체국에서 극적으로 만나 헤어졌다가 순례길에서 잊을 만하면 다시 만나게 되던 특별한 인연의 그녀 제네비이브. 그녀와 세 번째 만났을 때 ‘지금까지는 언제나 당신이 먼저 나를 알아봤으니 다음에 만날 때는 내가 먼저 당신을 알아보겠다.’고 한 약속을 무려 일곱 번의 만남 끝에 지키게 됐다. 그동안 세 번을 더 만났을 때는 서로 동시에 보거나 여전히 그녀가 먼저 나를 알아보았었다.‘아, 제네비이브!’ 내가 비명을 지르듯 이름을 부르자 그녀도 깜짝 놀라며 왜 다시 나오냐고 묻는다. 표정에는 이미 불길함이 깃들어 있다. 상황을 설명하자 순식간에 실의에 빠진다. 전에 없이 지친 모습을 보니 침대가 없는 것이 내 잘못이라도 되는 양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 간단하게 그녀를 위로해 주고 다음 마을인 온타나스 까지 셋이 동행을 시작했다. ‘기적의 메달’을 걸어주던 수녀님이 알려준 알베르게가 있는 오르니요스에서부터 걸어온 거리만큼을 더 가야 한다. 늦은 오후에 걷는 5킬로미터는 오전에 걷는 15킬로 보다 힘든다. 지금처럼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떼어야 할 때는 더 말할 것도 없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