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양귀비 꽃을 보러 갔다아편이 되지도 못하는 씨방을 감싸고꽃은 뜨거운 핏빛이다한사코 핀다는 것은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비명인 줄 아니까저 빨강을 고요히 바라보기로 한다맵고 짜고 질긴 것들을 탐방하며나를 탕진하던 날들을 개양귀비 꽃잎에 구구히 빗댄다길가의 간판을 밤새도록 읽으며 베꼈던 이름들개양귀비개다래개미지옥개살구개밥바라기그리고개새끼 저것들을 부르다 놓쳐버린 길들이 뒤엉켜밤마다 가위에 눌리는데울기 좋은 곳도, 울기 좋은 때도,남들이 모두 차지했으므로나는 그냥 팥죽 솥처럼 끓기로 한다마침내 슬픔이 따듯해졌다<수필가가 본 시의 세상> 슬픔의 이유는 다양하다. 슬픔의 얼굴은 더 다양하다. 타인의 눈으로 보면 상대방의 슬픔을 전혀 공감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이렇다. 비가 온다. 누군가는 슬프다고 한다. 바람이 분다. 어떤 이는 슬프다고 한다. 어느 누구에게는 슬플 이유가 개뿔! 아무것도 아닌데 슬프고 쓸쓸하고 힘들다고 엄살을 부리는 것만 같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바람 불어서 슬픈 사람의 내면에는 바람 부는 날 어떤 일이 생겼을 수 있다. 바람 부는 날, 부모가 돌아가셔서 바람이 부는 날이 각인 되었거나,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 보냈거나, 바람이 가지고 있는 그 사람만의 슬플 이유가 타당한데 어느 누구도 함께 동조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 슬픈 것이다. 사실 자신의 슬픔을 동조해주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슬픔을 뒤죽박죽 섞어서 ‘그냥 팥죽 솥처럼 끓기로 한다’고 작정한다. 그랬더니 웬일? ‘마침내 슬픔이 따듯해졌다’ 다른 사람의 위로 없이 혼자서 슬픔을 삭일 방법을 지혜롭게도 찾아낸 것이리라. 그 말이 오히려 슬프게 들리는 것은 그렇게라도 해야 견딜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서서히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는 일, 그것이 ‘슬픔의 변천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한 번쯤은 그런 변천사를 겪어 왔음을 알고 있다. 자기 혼자만의-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슬픔-이 있어…<박모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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