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회원
-소설가-수필가-칼럼니스트-저서 <나마스테, 여기는 붓다의 나라> 외.나는 지금 ‘세상의 끝’에 서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피니스테레, 즉 ‘세상의 끝’이라고 부른다. 스페인의 북서쪽 피니스테레(Finisterre)라는 지명은 옛 로마 사람들이 끝(Finis)과 땅(Terra)을 합쳐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스페인 갈리시아 자치 지방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한 것은 프랑스 생장 출발 꼭 한 달만인 6월 27일이다. 대성당 광장에 전단지처럼 널브러져 있는 순례자들을 보자 여기가 종착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 한 조각 상투적인 감흥조차 일지 않았다. 사람들 얘기로는 벅찬 감동에 젖어 울기도 하고, 서로 끌어안고 축하도 주고받고, 마라톤 완주자처럼 환희의 세리모니를 하기도 한다는데 나는 그저 무덤덤했다.
▲순례 한 달 만에 야고보(스페인 식 이름 산티아고) 사도의 유해가 잠들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성당에 도착했다.
최선을 다했다면 스스로를 칭찬해 주기라도 할 텐데 나는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인지 그런 마음도 일지 않았다. 굳이 긁어내어 보자면 싱거운 영화의 결말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후련함이 아쉬움을 압도했다고 해도 좋겠다. 사실 4,5일 전 사리아 근처를 지날 무렵부터는 어서 이 길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었다. 우선 길 자체가 신선하지 않았다. 무한 반복되는 후렴구를 듣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왼쪽 발바닥 가운데가 갈라지는 듯한 작열감은 마지막 100여 킬로미터의 여정을 즐기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지막 4,5일 코스만 걷는 단체 순례객들이 급증한 탓이 컸다. 갑작스런 까미노 데 산티아고(산티아고 가는 길. 이하 까미노)의 분위기 변화는 정신을 산만하게 했다. ‘아무리 힘들게 걸어온 사람들도 남은 거리가 두 자릿수로 줄어들기 시작하면 한 걸음 한 걸음을 아쉬워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렇게 까미노와 인생이 닮았다니까!’ 하고 무릎을 쳤던 나였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사실 웬만한 사람들은 ‘이까짓 남은 인생 살아본들 뭐하누. 이제 그만 갔으면 좋겠다.’하면서도 막상 몹쓸 병에라도 걸리게 되면 단 하루라도 더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가.그런데 내 경우는 달랐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지겨웠다. 남들은 순례길 초반이나 중간쯤에서 갖는다는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는 거지?’라는 생각을 나는 이때 했다. 더 이상 의미 없는 길을 이쯤에서 내려서 버릴까 하는 심각한 고민도 했을 정도였다.순례자 사무소에 들러 순례 인증서를 받아들어도 한 번 가라앉은 마음은 전혀 떠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는 곧장 알베르게(여행자 숙소)로 향했다. 12시에 하는 대성당의 미사는 어차피 내가 도착하기 전에 끝나버린 터여서 거대한 향로가 앞뒤로 그네를 타는 진풍경을 볼 기회는 일찌감치 날아가 버린 상태였다.야고보(스페인식 이름 산티아고) 사도의 유해가 안장된 이 뜻 깊은 대성당을 밖에서만 보고 간다는 게 걸려 잠시 묵례(默禮)로 한 성인의 생애를 추모하고 성당 광장을 벗어났다.다음날 27일 아침 마음을 좇아 묵시아행 버스를 탔다. 묵시아는 “땅끝까지 가서 선교하라”는 그리스도의 명을 받은 야고보 사도가 생애 마지막 선교활동을 하던 곳으로 알려진 작은 어촌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문득 발현한 성모 마리아가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 한다. 묵시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그는 그곳에서 참수당해 순교한다.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첫 번째 순교였다. 한동안 발견되지 않던 야고보 사도의 시신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극적으로 발견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어느 날 성 펠라지오라는 은자(隱者)가 들판 위의 춤추는 듯한 별빛을 따라가 보니 그곳에 잊혔던 야고보 사도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콤포스텔라(Compostella)라는 이름은 별들의 벌판(Campus Stellae)이라는 의미가 변형된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묵시아는 야고보 사도가 마지막 선교활동을 하던 곳이며, 묵시아로부터 88킬로미터 떨어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그의 시신이 발견된 곳이다. 지금 야고보 사도의 유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안장돼 있다. 이곳이 순례자들의 종착지인 이유다.묵시아행 버스를 타기로 한 것은 산티아고 대성당을 거쳐 피니스테라까지 총연장 900여킬로를 걷고 싶었던 계획을 왼쪽 발이 허락을 하지 않아 내린 결정이었다. 물론 이건 핑계다. 앞서 밝힌대로 까미노의 마지막 100여 킬로미터의 길은 좀 진부했다. 머릿속도, 기분도, 풍경도 삶처럼 진부했다. 더 걷고 싶지 않다, 그래도 걷자, 라는 생각만 갈마들었다. 그런 터에 피니스테라까지 88키로미터를 더 갈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반면 묵시아에서 피니스테라까지 29킬로미터는 갈라쇼를 하는 기분으로 걸어보고 싶었다. 버스는 2시간 30여 분간 내내 졸기만 하던 나를 갯내음 물씬한 묵시아에 내려놓았다. 한 달 내내 산과 들만 보다가 해변에 와서 그런지 내 고향 하동포구에라도 온 듯 편안하다. 방파제 안쪽에는 20여 척의 작은 어선들이 뿔뿔이 흩어져 졸고 있고, 몇몇 어선들은 아예 백사장에 배를 깔고 일광욕 중이다.아담한 포구는 정겨웠고, 가까운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점심 메뉴는 역겨웠다. 생선을 빻아 밥과 버무린 그 이름 모를 음식은 가격마저 무려 24유로(거의 3만 3천 원). 콜라와 디저트가 포함된 가격이라고는 해도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애초에 산티아고를 거쳐 피(니)스테라까지 걷겠다던 계획을 바꿔 산티아고에서 묵시아까지 버스로 이동한 후 묵시아에서 피(니)스테라까지 약 29킬로미터를 걸었다.
배낭을 둘러메고 29킬로미터에 달하는 피니스테라(이하 피스테라)까지 걷기 시작한 게 2시 40분경. 묵시아와 피스테라를 잇는 길이 아름답다는 그 이유만으로 마음을 낸 걸음이었다. 묵시아와 피스테라 구간은 지금껏 걷던 산티아고 길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대서양이 숲에 가려 보이다 말다 밀당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특히 묵시아를 출발한 직후에 만난 해변은 오래 기억에 남을 만했다. 무엇보다 피스테라에서 묵시아로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나는 역주행을 하는 셈이어서 그것도 신선했다. 오가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겠다.예약해 둔 피스테라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밤 9시 20분. 7시간 가까이 걸렸다. 이미 퇴근한 호스트를 전화로 불러 간신히 체크인 하고 마을 광장의 한 레스토랑에서 스페인식 아귀찜을 늦은 저녁으로 삼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고 나서 다음 날인 28일, 그러니까 바로 오늘 아침 2.5킬로 떨어진 피스테라 등대가 있는 ‘세상의 끝’이라고 하는 지점에 내가 서 있는 것이다.나는 ‘세상의 끝’에서 거의 한 시간째 검푸른 대서양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땅의 끝은 바다의 시작이고, 세상의 끝은 돌아서면 다시 세상의 시작인데 나는 무엇을 시작하려 하는가. 곳곳에는 순례자들이 자신의 소지품을 태우며 제각기 의식을 치른 흔적들이 보이건만 나는 무엇을 태워 내 의지를 다지려 하고, 무엇을 버려 가벼워지고 싶은 것일까. 저 아득한 벼랑 아래 끝없이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는 대답을 재촉하고, 느릿느릿 물살을 가르는 작은 배들은 침묵으로 대신하라 이른다. 나도 시인 이백을 흉내 내 본다. 소이부답(笑而不答).
▲나는 오랫동안 ‘세상의 끝’인 피스테라에서 대서양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다.
프랑스의 생장 삐에드 뽀흐를 떠나 800킬로미터의 대장정을 시작한 것은 5월 28일. ‘가급적 한국인들과 동행하지 않는다’, ‘경쟁적으로 걷지 않는다’, ‘마음이 가는 만큼만 간다’던 원칙 중 첫 번째 원칙은 출발지 생장에서부터 깨졌다. 생장의 알베르게에서 만난 30대의 아름다운 한국 젊은이들은 스페인어는커녕 영어도 안 되는 굼뜨고 허술한 ‘노인네’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렇게 4명이 첫 번째 구간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를 향해 함께 출발했다. 까미노 800킬로미터가 사람의 일생이라면 이제 우리는 갓 출생하는 신생아에 해당될 것이다. 아직 미련이 남은 어둠이 사위를 휘감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새벽 5시 30분. 모든 중생의 출생이 그러하듯 우리의 출발도 엉성하고 요량 없었다. 탄생의 축복도, 덕담도 없이 얼떨결에 까미노는 시작되었다. 잠이 덜 깬 탓인지 방향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다행히 구글 맵의 도움으로 방향을 잡고 휴대전화기의 불빛을 밟으며 길을 열어나갔다. 차츰 날이 밝아오자 어느새 피레네산맥을 오르고 있는 길벗들의 모습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이른바 나폴레옹 루트는 내 생에 걸었던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
그 옛날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벌에 나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지나갔다는 이른바 나폴레옹 루트는 내가 이 세상에서 걸었던 길 중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 사람의 일생 중 유소년기가 가장 아름답듯이 산티아고 길도 처음이 가장 아름다웠다. 인생이든, 까미노든 나중의 험난한 노정은 논외로 두고.얼마나 올랐을까. 해발 1,450미터 정상은 고사하고 해발 1,000미터 정도에 있는 그 유명한 오리손 산장도 나오기 전에 우리는 우리들이 구름 위에 올라와 있음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급히 카메라로 인생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저 아래로 솜털 같은 구름들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모습은 마치 천지창조를 한 조물주가 된 기분을 안겨 주었다. 거대한 도시는 인간을 압도하고 인간을 왜소하게 만들어 소외감과 열패감을 안겨 주는 반면 웅대한 자연은 인간을 압도하되 인간을 겸허하게 하고 성찰하게 한다. 한동안 피레네산맥과 하늘이 연출하는 대자연의 화려한 향연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피레네산맥 어디쯤에선가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이라는 작은 표식을 만났다. 출입국 심사는 양국의 나무들이 했고 여권은 내 왼발, 비자는 내 오른발이었다. 입국 금지도, 지연도 없었다. 그저 바람의 환송과 산새들의 환영만 있었다. 우리는 언제쯤 이렇게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날이 올까. 중국과 러시아 국경을 이렇게 부지불식중에 넘을 수 있는 날은 통일 조국 아래에서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잠시 암울해졌다.
▲천지창조를 한 후의 조물주가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조금 더 오르니 오리손 산장이 반긴다. 아니다. 허기진 내 위장이 반겼다. 산장 앞 야외 테이블에서도 저 아래로 세상을 뒤덮고 펼쳐져 있는 흰 구름이 내려다보인다. 크림빵과 샌드위치, 오렌지 주스로 먹는 늦은 아침은 파리 오르셰 미술관에서 보았던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못지않은 ‘구름 위의 식사’였다. 내 생에 이런 식사가 또 있을까.까미노 중 가장 힘든 구간이 피레네를 넘는 첫날 일정이라고들 하나 내게는 피레네가 주는 감동이 고통을 덮고도 남았다. 론세스바예스~수비리 구간을 지나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팜플로나로 가는 길은 거리도 짧고 평탄한 구간이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자 온몸이 결리고 아파서 오늘 과연 제대로 갈 수 있을까 불안이 밀려온다. 새벽부터 비까지 내린다. 판초우의를 꺼내 입고 무거운 몸을 떠밀어 간신히 출발한다. 제대로 갈 수 있을까 싶어도 걸어보니 걸어지고, 가다보니 가 진다. 어느새 비도 그쳤다. 마치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싶어도 살아보면 살아지는 인생을 빼 박았다.나중에도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까미노는 인생의 축소판이다. 까미노나 인생길이나 짐이 무거워서는 안 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래 갈 길에 무거운 짐은 가장 큰 적이다. 또한 만남과 이별은 기습적으로 온다. 알베르게에 짐을 풀어놓고 길벗들과 함께 팜플로나 우체국을 찾아간 건 이 길 최대의 적인 짐을 줄이기 위해서였다.길벗들이 내 짐까지 대신 부쳐줄 때 나는 우체국 의자에 매우 무책임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나는 그냥 그 상태로 가만히 앉아 있고만 싶었다. 그때 웬 늙수그레한 여인이 내 앞에 서더니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손짓까지 해가며 뭐라고 뭐라고 흥분에 찬 소리를 지른다. 헝클어진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 초라하고 지친 행색.순간, 뭘 어쩌라는 거야? 내가 무슨 피해를 주기라도 했나? 하는 생각과 혹시 실성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동시에 스쳐 간다. 어느 쪽이든 세상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계속 무책임하게 앉아 있고 싶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대꾸도 하지 않고 멀뚱멀뚱 바라만 보자 그녀가 이번엔 윙크를 한다. 아... 실성한 사람이 맞구나! 나는 사실 윙크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눈보다 입이 더 나댄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눈높이를 맞춰 나도 실성한 사람처럼 윙크를 해 줬다. 그녀가 계속 영어로 떠들어댄다. 이제는 실실 웃기까지 한다. 제대로 실성한 것 같다. 저렇게 제정신이 아닌 사람도 유창하게 영어를 하는데 멀쩡한 나는 꿀 먹은 벙어리다. 주위 사람들은 되레 나를 실성한 사람으로 보았을 게다. 그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단어 하나가 정신을 번쩍 일깨운다. “...... 바욘......”바, 바욘? 바욘이라면? 혹시? 아! 그럼 이 여자가 그녀란 말인가? “아, 아엠 쏘리, 쏘리...”실성은 내가 했구나.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와 손을 맞잡았다.까미노 출발지인 프랑스 생장으로 가기 전 나는 열흘 가까이 파리와 피레네 국립공원 근처에서 머문 적이 있었다. 바욘은 피레네 국립공원으로 가기 위해 파리 몽파르나스에서 버스를 타고 10시간 넘게 달려서 도착한 프랑스 항구도시다. 새벽에 도착해 숙소를 찾지 못해 쩔쩔맬 때 만난 사람이 그녀였다. 그 어두운 새벽에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낯선 동양인 남자에게, 파리에서 같은 버스를 타고 오며 나를 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40여 분간 길거리에서 친절을 베풀어 주었던 그녀를 실성한 여자로 취급하고 눈이 아닌 입으로 하는 윙크나 날리다니.
▲제네비이브를 만나기 직전 숙소를 찾아 헤매던 프랑스 바욘의 새벽 골목길.
그날 그녀는 스페인어는 물론 영어도 하지 못하고 오직 한국어만 할 줄 아는 나를 대신해 숙소를 찾아 주겠다며 여기저기 벨을 눌러 물어봐 주기도 하고, 걱정스럽게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바욘에는 왜 왔냐? 혼자 온 거냐? 다음에는 어디로 가냐? 흡사 미아 찾아주기 센터의 친절한 직원 같은 그녀에게 나는 세 살 박이 아동처럼 더듬거리며 착하게 대답해 주었다. 물론 번역기의 조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그녀는 바욘의 교회에서 자고 여배한 다음 여기서 까미노 일정을 시작한다며 내게 꼭 생장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냐, 웬만하면 교회에서 자고 여기서 까미노를 시작하라는 취지로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고 나는 고집쟁이 미아처럼 ‘피레네 국립공원에 갔다가 생장으로 가서 까미노를 시작할 거야’ 라고 계속 떼를 썼다. 결국 그녀는 교회를 향하여 새벽어둠 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그녀의 두 눈은 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실성한 사람으로 여겼으니......길벗들이 소포를 발송하고 자연스럽게 통역이 돼 준다. 그녀는 ‘당신들을 만났다니 정말 다행이다’ ‘언제부터 이 사람과 동행하고 있냐?’ ‘생장으로는 잘 갔더냐?’ ‘그날 새벽 정말 걱정되더라’ ‘계속 함께 다녀 줄 거냐?’ 속사포처럼 길벗들에게 물어댔다. 나는 ‘그날 새벽 당신의 인내심과 친절에 크게 감동했다’고 사의를 전했다. 또 ‘그날 어두워서 당신을 제대로 못 본 탓에 오늘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실성한 사람인 줄 알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벨기에 사람이며 이름은 제네비이브라고 했다. 나는 한국인이며 실제 이름과 발음이 흡사한 ‘제이슨’이라고 영어식으로 알려줬다. 이름만은 영어에 아주 능통한 사람이다.내가 벨기에도 꼭 가보고 싶은 나라라고 하자 그녀는 정색을 하며, 오는 건 환영하지만 영어를 배워서 오란다. 이 말인즉슨 다음 생에나 오라는 얘기다. 점심을 사겠다고 하자 손사래를 치며 그녀는 표표히 도심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팜플로나의 알베르게 입구. 까미노의 시그니처인 가리비 조형물이 이채롭다.
팜플로나의 까스티요 광장 한켠에 있는 카페 이루나를 찾은 것은 늦은 점심도 점심이지만 무엇보다 어네스트 헤밍웨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헤밍웨이의 단골 카페 이루나에 헤밍웨이의 그림자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파리의 알베르 카뮈,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바르, 파블로 피카소, 브리지트 바르도, 이브 몽땅 등 수많은 사상가, 예술가들의 단골 카페에도 사진 한 장 뵈지 않더니 어쩜 유럽 사람들은 이 모양이야? 헤밍웨이가 자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원고를 썼던 테이블 하나라도 전시해 놓지, 투덜거리며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카페 이루나에 헤밍웨이를 위한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나중 부르고스에서 만나게 되는 정진규 선생의 전언에 의해서였다. 한 마디 물어라도 봤더라면... 언어가 안 돼서 일어난 비극이자 희극이었다. 나는 ‘만인어만 못인어못’(만날 인연은 어떻게 해서든 만나지고, 만나지 못할 인연은 어떻게 해도 만나지지 않는다) ‘팔자성어’로 아쉬움을 달랬다. 식사 자리에는 전날 수비리에서 처음 만난 대구 대봉동 성당에 적을 둔 적도 있다는 베드로 신부님도 함께했다. 신부님은 내게 ‘아무리 봐도 스님 같은데 맞으시죠?’ 거듭 물었다. 나는 ‘그렇게 보이십니까?’ 라며 거듭 웃었다. 신부님은 피레네 중턱 오리손 산장에서 1박 할 때 자기소개하는 식사 자리에서 마지못해 신부라고 공개한 것이 퍼져나가 순례길 여기저기서 빠드레, 빠드레(신부님) 한다며 마뜩잖은 듯 웃었다.
▲베드로 신부님과 길벗들이 헤밍웨이가 자주 찾았다는 카페 이루나의 야외 테이블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팜플로나의 밤은 더디게 익어갔다. 생장에서 함께 출발한 길벗들은 이 밤을 끝으로 해산했다. 까미노에서 배운 것 중 하나가 이별하는 법이다. 까미노 이별법은 인생길에서도 매우 유용하다. 우연히 동행이 되었다가 우연히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간다. 만날 땐 ‘올라(안녕)~’하면 그만이고 헤어질 땐 ‘부엔 까미노(잘 가)~’ 하면 그뿐이다. 만해의 <님의 침묵>처럼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한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어서가 아니다. 자연에 맡기고 흐름에 맡기는 것을 자연스럽게 터득한 덕이다. 그렇게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는 것이 까미노다. 어제까지 동행하던 사람의 알베르게 베드가 다음 날 아침 비어 있으면 먼저 떠났구나, 하면 되고 며칠 후 다시 만나면 ‘올라~’하면 되는 길, 그게 까미노다.팜플로나에서 이틀을 묵고 처음으로 혼자 걷는 까미노는 참신하고 매력적이었다. 길벗들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역시 길은 홀로 가는 길이 최고다. 특히 까미노를 떼 지어 가는 것은 지나치게 조야하다. 까미노에 대한 모독이다. 고독과 만나지 못하면 여행이 아닌 불행이다. 인간은 고독할 때 깊어지고, 고독할 때 자신을 만난다. 까미노는 단순히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아니다. 자신에게로 다가가는 의식이다. 함께 가면 타인이 보이고, 홀로 가면 자신이 보인다. 모든 길은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고, 모든 인생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다.까미노를 걷는 사람들의 이유는 다양했다. 누군가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라고 했고, 누군가는 진로를 고민하기 위해서라고 했고, 누군가는 신앙심을 다지기 위해서라고 했고, 누군가는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라고 했고, 누군가는 마저 걷지 못한 구간을 채우기 위해서 다시 걷노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도 물었다. 왜 까미노를 걷냐고. 나는 이 통속적이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질문은 하고 싶지도, 받고 싶지도 않았지만 대답은 해야 했다. 그때마다 나는 한 마디로 답해 주었다. ‘예쁜 길이 좋아서....’ 이건 부동의 사실이자 진실이다. 나는 이번 까미노에서 내가 왜 그토록 아름다운 길, 특히 개울처럼 휘돌아가는 오솔길을 좋아하는지, 왜 휴대전화에 길 사진만 편집적으로 채우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무튼.이 글을 통해서 여기에 몇 가지를 덧붙이자면 머릿속 안개를 걷어내고 싶었다는 것, 야고보 사도가 이 길을 걸을 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싶었다는 것, 구상하고 있는 글쓰기에 약간의 영감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 정도다.
▲그날의 운명을 갈라놓은 갈림길. 내가 선택한 길은 내가 가야하고,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6월 3일 아예퀴에서 로스 아르코스를 거쳐 토레스 델 리오까지 가는 28킬로미터의 길은 가장 힘들고 고독한 길이었다.6시 20분, 출발할 때부터 소나기가 쏟아진다. 급히 판초우의를 꺼내 둘러쓴다. 몇 발짝이나 갔을까. 산을 넘는 길과 우측으로 빠져 돌아가는 길로 나뉜다. 어느 쪽으로 가도 나중에 합류하게 된다고 까미노의 노란 화살표가 알려준다. 나는 조금 긴 길,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을 것 같은 길을 선택했다. R. 프로스트를 흉내 냈다기보다 북적이며 여러 사람들과 줄지어 걷는 것을 좀 피해 보자는 단순한 의도였다. 소나기가 가랑비로 바뀌더니 오다 말다를 반복한다. 조금 가다 보니 지방도로를 걷게 된다. 언제부턴가 노란 화살표는 슬그머니 빠져버리고 구글 맵은 집요하게 지방도로로 끌고 간다. 서쪽으로 가고 있으니 큰 걱정이야 아니지만 혼자만 가는, 길 아닌 길이 내심 불안하다. 오락가락하는 비도, 화살표가 언제 나타나 줄지 알 수 없는 것도 갈 길 먼 나그네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다. 그래도 갈림길에서 먼 길을 선택한 것도, 그 길에서 화살표를 놓치고 다른 길로 접어든 것도 나였기에 온전히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계속해서 갓길도 없는 포장도로를 아슬아슬 홀로 걷자니 불안감과 소외감이 배낭 무게보다 더 무겁게 짓누른다. 간간이 지나가는 차량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본다. 위태롭게 차도를 걷는 행인이 반가울 리 없는 운전자들은 손을 들어 답례할 기분이 아닌지 매연만 살포해 놓고 지나갈 뿐이다.외로워서 그러는데 손 한 번 흔들어 주지, 힘들어서 그러는데 경적이라도 한 번 울려 주지... 혼자 중얼거리다가 가사도 가물거리는 흘러간 유행가도 불러가며 꾸역꾸역 걸었다.800킬로미터의 까미노가 한 사람의 생애라면 나는 지금 갓 청년기로 접어드는 시기를 걷고 있는 셈이다. 그 시절 나는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때 역시 R. 프로스트를 흉내 냈다기보다 그저 그 길이 아름다워 보였고, 그 길 끝에서 행복했노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외로움과 불안감도 있었고, 소외감도 있었음을 기억한다. 가다 보니 서러움도 가세했다. 그것들과 싸워낸 것은 열정이라 포장하고 싶은 치기와 객기, 혹은 오기였음을 오늘 나는 고백한다. 인생의 후반기로 접어들 무렵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가고자 아니했으나 갈 수밖에 없는 길로 접어들었다. 나는 그때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가는 자의 고통이 가고 싶은 길을 가지 못하는 자의 고통보다 비할 바 없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그만 길에서 내려서 버릴까... 하는 유혹마저 일었다. 가고 싶은 길을 가지 못한다고 길을 내려서는 자는 없다. 그러나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가는 자는 이런 유혹을 피해 가기 어렵다. 그 길이 그 길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은 길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두 길은 엄연히 다르다. 검은 것과 희지 않은 것이 같은 색이 아니듯, 원증회고(怨增會苦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괴로움)와 애별이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가 다르듯 두 길은 같은 듯 다르다.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끝이 보이지 않는 포장도로에 지쳐 적당한 길가 숲에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쉬기로 했다. 물을 몇 모금 마시고 지친 심신을 추스르다 문득 내가 가야 할 길을 원망에 찬 눈으로 흘기는데 거기에 거짓말처럼 오색 창연한 쌍무지개가 거대한 터널처럼 드리워져 있다. 내가 가야 할 도로는 정확히 무지개 한 가운데로 곧게 뻗어 있다. 마치 내가 가는 길도 결코 잘못 든 길이 아니라고 일러 주기라도 하는 듯, 이 길은 이 길 대로 다 의미 있는 길이니 너무 조바심 갖지 말라고 다독거려 주기라도 하는 듯 무지개는 활짝 팔을 벌리고 있었다.
▲끝이 없는 포장도로를 홀로 걷는 소외감과 불안감이 엄습할 때 홀연히 나타난 무지개.
나는 존 웨인보다 빠르게 뒷주머니에서 권총 대신 휴대전화기를 뽑아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무지개가 뭐라고... 어느새 나는 울먹이고 있었다. 누가 내게 물었다. 왜 순례길 종착지에 도착했을 때 별 감흥이 없었냐고. 그때는 다른 답을 내놨지만 어쩌면 이때 내가 미리 울먹여 버려서 그랬는지도 혹 모를 일이다.마음이 무거웠던 탓인지, 출발 직후부터 다른 길로 접어들어 하릴없이 먼 길을 돌아가는 탓인지 이날은 순례길 중 가장 악전고투한 날이었다. 지역특산품인 와인이 물 대신 쏟아지는 수도꼭지가 있다는 이라체, 산 에스떼반 성터가 있는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 등을 거치는 공식 까미노 루트를 벗어난 대가치고는 혹독한 대가였다.오후 1시 마침내 까미노 정식 루트에 있는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했다. 가게에 들러 1.5리터짜리 이온 음료를 구입해 절반 이상을 단숨에 들이켰다. 남은 거리를 확인해 본다. 오늘 몸을 뉠 알베르게가 있는 토레스 델 리오까지는 7킬로미터 정도.이때까지만 해도 남은 7킬로미터가 지나온 21킬로미터보다 몇 배로 힘든 길이 될 줄은 몰랐다. 방향은 맞건만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노란 까미노 화살표와 자꾸만 걷게 되는 지방도로가 썩 내키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여기저기 생겨난 양쪽 발바닥의 물집은 가뜩이나 무거운 걸음을 더욱 힘들게 했다. 부자연스럽게 걷다 보니 왼쪽 발목 윗부분에 피멍까지 들어 이중으로 힘들다. 그래도 가야 하니까 간다. 길이 남았으니까 간다. 느려도 한 걸음, 한 걸음의 힘을 믿으며 마침내 작은 마을 산솔에 이르렀다. 아까부터 가도 가도 자꾸 뒷걸음치며 물러서던 산솔이었다.이제 1킬로미터 남짓 남았다. 마침내 그토록 그리던 노란 화살표도 모습을 드러낸다. 따로 가던 길이 산솔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진작 좀 만나지. 눈물겹게 반갑고 고맙다. 내가 걸은 길도 틀린 길이 아니라 조금 다른 길일뿐인데도 불안감에 소외감까지 얹어 줄건 뭐야. 그래도 노란 화살표를 보자마자 눈 녹듯 사라져 주는 소외감이라니.긴장이 풀리자 간신히 붙들고 있던 몸이 막대기처럼 쓰러진다. 차도 근처에 쓰러진 몸을 남의 집 벽 쪽 그늘로 끌고 와 드러누우니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대책 없이 한가롭다. 길바닥에 누워서 보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일어나기 싫어 30여 분을 누워서 구름과 함께 흘려보냈다.
▲남의 집 담벼락에 다리를 올리고 드러누워서 바라보니 하늘이 내 발 아래 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다시 걷기 시작한다.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 몫의 길은 내가 가야 한다. 한 발짝도 남이 대신 걸어줄 수 없다는 점에서도 길과 인생은 빼닮았다. 길은 인생만큼 냉혹하고, 인생은 길 만큼 지엄하다. 드디어 오늘의 종착지 토레스 델 리오에 들어섰다. 맵을 보니 알베르게까지 350미터 남았다. 다시 지푸라기처럼 드러누웠다. 다 왔다는 안도감 보다는 아직도 더 가야된다는 낭패감 때문이었을 것이다.힘겹게 심신을 수습한 후 마을 수도꼭지에 입을 연결해서 원 없이 물을 빨아들이고 그 힘으로 남은 350미터를 1센티도 빼놓지 않고 걸었다. 길도, 인생도 적당히 봐주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무릇 길 가는 자들은 누구에게도 값싼 동정이나 휴머니즘 따위는 바라지 말지니. 도착 시각 4시 50분. 10시간 30분 만의 도착이다. 공식적인 거리는 28킬로미턴데 나는 대체 이날 몇 킬로미터를 걸었던 것일까. 억울해서 묻는 건 아니다. 내가 선택해서 걸은 길인데 억울할 건 없다. 단지 그 길도 내 까미노의 일부였기에 알고 싶을 뿐. 이날 아예퀴에서 토레스 델 리오까지의 길은 내 청년기와 중년기의 압축파일이었다.다음날 토레스 델 리오에서 로그로뇨로 가는 길은 평이했으나 발이 편하지 않으니 역시 `고난의 행군`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엊그제 옷핀으로 물집의 배를 갈라 진물을 제거한 후 방치해 둔 것 중 하나가 말썽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절룩거리며 걷느니 차라리 진흙탕을 걷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잠시 쉴 곳을 찾는 내 시야에 지방도로를 건너는 육교가 들어온다. 육교 계단 아래쪽에 한 순례자가 앉아 쉬다가 자리를 털며 일어선다. 조금 더 가까워지면 `올라!` 혹은 `부엔 까미노!`를 할 요량으로 다가서는 나에게 그 순례자가 갑자기 소리친다. `제이슨!` 깜짝 놀라 심 봉사처럼 눈을 둥그렇게 뜨고 보니 제네비이브다. 나는 `오, 마이 갓! 제네비이브, 나이스 투 미튜` 내가 할 수 있는 완벽한 영어 문장 중 하나를 구사했다. 제이슨이라는 이름값을 조금이라도 해야 하니까.그녀는 검게 그을리고 살도 훌쩍 빠진 내 얼굴을 보며 다른 사람 같다며 웃는다. 그런 그녀의 콧등도 빨갛게 익었다. 육교 계단을 올라 함께 사진을 찍으며 내가 말했다. `제네비이브, 지금까지 우리는 세 번 만났다. 그때마다 당신이 먼저 나를 알아봤으니 다음에 만날 때는 꼭 내가 먼저 당신을 알아보겠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프랑스의 항구도시 바욘, 스페인 팜플로나에 이어서 세 번째 만난 제네비이브가 저만치 앞서 가고 있다.
잠시 함께 걷다가 우리는 이번에도 까미노 식으로 헤어졌다. 세 번을 만났으니 네 번인들 아니 만나질까. 그땐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까. 내가 먼저 알아보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는 있을까. 앞에서도 언급했거니와 까미노에서도, 인생에서도 만날 사람은 만나지고, 만나지 못할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이 무슨 `있어야 할 건 다 있구요. 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같은 얘기냐고? 너무 따지지 말고 세상 한 번 살아 보시라. 살다 보면 알게 되리다. 이 말이 최소한 절반의 진실은 된다는 것을.로그로뇨의 무니시팔(공립 알베르게로 사립보다 숙박료가 저렴하다)에 도착하니 12시 30분이다. 일찌감치 도착하게 된 건 온전치 못한 왼발 덕분이었다. 더 가고 싶어도 발이 허락하지 않으면 도리 없는 일이었다.체크인이 1시부터라 벌써부터 도착한 순례자들이 정원에서 대기 중이다. 수용인원이 몇 명일지, 나도 투숙 가능한 순번에 들지 체크인이 시작돼 봐야 알 수 있다. 다행히 무난히 체크인이 됐다. 몇몇은 지친 몸을 이끌고 다른 알베르게를 찾아 배낭을 둘러메고 나간다.까미노를 찾는 사람들은 경쟁과 바쁜 일상에 지친 심신에 자유와 여유를 주고 싶기 때문일텐데, 까미노의 실상은 조금 달랐다. 스치는 사람마다 올라, 부엔 까미노를 던지고 받아야 하고, 지금처럼 시설이 좋거나 저렴한 알베르게에 먼저 가기 위해 예약을 하거나 선착순 경쟁을 해야 한다. 무니시팔은 예약을 받지 않으니 더욱 그렇다.
▲순례자들을 위한 다인실 숙소인 알베르게 내부 모습.경쟁을 피해 예약 없이 짧은 거리를 느긋이 음미하며 쉬엄쉬엄 가는 방법도 있다. 문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야 한다. 때로는 차렷 자세로 샤워기 물만 맞아야 할 만큼 좁은 샤워부스에서 땀을 씻어야 할 수도 있다. 나도 그런 곳을 몇 번 이용한 적이 있다. 옷을 걸어둘 곳도 없고 비누 한 장 놓을 곳이 없다. 세워진 관 속에 들어간 기분마저 든다. 옷은 문틀 위에 걸쳐놓고 비누는 바닥에 놓아두고 차렷 자세로 물을 맞는다. 비누를 주우려 조심히 몸을 구부린다. 엉덩이가 뒤쪽 벽에 부딪혀 튕긴다. 몸이 앞으로 쏠리자 이번엔 앞쪽 벽에 머리를 부딪힌다. 그때 센서등이 센스 없이 꺼진다. 어둠 속에서 파리 쫓듯이 손을 휘저어 불을 밝히자 이번엔 샤워기 물이 끊긴다. 샤워 꼭지를 서너 번 누르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다시 센서등이 꺼져버린다. 손을 휘젓다가 차렷 자세를 취했다가 수도꼭지를 누르는 동작을 반복하는 `웃픈` 몸 개그를 몇 번 시전한 후 뒷사람에게 샤워부스를 내주고 나오면 필경 이런 의문과 마주하게 된다. `내가 지금 뭘 하고 나온 거지?`까미노의 역설은 또 있다. 까미노는 낭만적인 곳도, 휴머니즘이 넘치는 곳도 아니다. 알베르게에서 코를 고는 문제로 싸움이 일어났다는 얘기는 흔해 빠졌다. 창문을 열어라, 닫아라에서부터 은근한 인종차별까지.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까미노에 다 있다. 소지품 절도도 있고, 배신도 있고, 오해와 음해, 무성한 소문도 있다. 경쟁과 갈등을 피해서 온 사람들끼리 경쟁하고 다투면서 절룩이는 사람에게 괜찮냐? 힘내라! 격려하는 곳, 누군가에게는 쉽게 마음을 열면서도 누군가에게는 경멸의 눈총을 쏘아대기도 하는 곳, 그러면서도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는 길이라고 입 모아 상찬하는 역설과 모순에 찬 길, 그게 까미노다. 어떤가, 까미노는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말이.
▲까미노에 낭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은근한 경쟁과 갈등, 그보다 더 한 것들도 있다. 순례길도, 인생길도 어찌 아름답기만 할까.
정신없이 샤워를 끝내고 방으로 와 문제의 왼발을 들여다보니 터뜨린 물집 옆에 또 하나의 물집이 잡혀있다. 사실 어제 얼핏 본 적이 있다. 피곤하기도 하고 작기도 해서 대수롭잖게 여기고 잊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내가 옷핀으로 집도를 시작하자 옆에서 그걸 본 내 연배의 스페인 남자가 바늘과 실을 준다. 별로 반갑잖다. 침침한 눈으로 도통 실을 꿸 수 있어야 말이지. 그래도 이번엔 쉽게 꿰어진다. 덕분에 말끔하게 진물을 제거하고 내일 제대로 걸을 수 있게 됐다. 그라시아스! (감사합니다)나헤라~ 산토 도밍고~ 벨로라도~ 아헤스 구간을 거치며 나는 홀로 가는 자의 온갖 호사를 다 누리며 걸었다. 10여년을 벼르고 벼르다 마침내 까미노를 걷게 된 자신에게 축하도 건네고,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칭찬도 해 주고, 심지어 음정박자 무시한 자축공연까지 펼치면서 걸었다. 아헤스에서 부르고스까지는 전날처럼 구름이 태양을 가려주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강하게 불어주고 그늘도 많은 구간이라 크게 어렵지 않았다. 자갈밭과 아스팔트길을 자주 걸어도 발이 잘 견뎌준 점도 다행이었다.불현듯 간밤에 꾼 꿈이 떠오른다. 우리나라 어느 섬 해안 절벽 위를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 그만 시동이 꺼져버렸다. 지체 없이 통과해야 하는 곳에서 멈춰버린 버스가 조금씩 벼랑 아래로 기울더니 결국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아, 여기서 내 생이 끝나는구나... 착잡한 가운데서도 마지막 작별 인사는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간략한 인생 퇴임사를 남겼다. `안녕, 사랑했던 모든 것들아... ` 깨고 보니 꿈인데 퇴임사는 그럴 듯했다. 그 짧은 찰나에 평소에 생각지도 않았던 이런 퇴임사가 나온 걸 보아 내 아뢰야식에 함장 됐던 생각이 저절로 재생된 모양이었다.내가 지금 종착지인 산티아고를 향해 걷고 있듯이 나는 지금 죽음을 향해 한 발 두 발 다가가고 있다. 내가 언젠가 이 길을 끝낼 때 누군가는 이 길을 시작할 것이다. 길은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나는 길을 추억하며 안녕을 고할 것이다. 그렇게 길과 나는 완벽히 분리되면서 별개의 존재가 되어갈 것이다. 그때 가장 적절한 스페인식 인사는 아디오스(Adios)겠다. 안녕...여기까지는 좋은데 정작 내가 사랑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대충 짐작 가는 것들이 전혀 없지는 않다. 다만, 그것들을 사랑했다고 이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것들은 차라리 절망과 환멸에 가깝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나의 아뢰야식은 그것들을 사랑했단 말인가. 10여 년 전 미리 적어놓은 내 묘비명.`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경멸했으며, 인간을 그리워한 인간`아마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의 목록에는 `인간`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대체 인간은 어떤 존재이기에 이토록 나를 파훼하는 것인가. 대체 나는 어떤 존재이기에 `인간`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인간인가. 인간은 왜 갈등과 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인간은 왜 인간적이지 않은가. 인간은 왜.
▲스페인 3대 성당인 부르고스 대성당.
부르고스 대성당 인근의 알베르게에 여장을 풀고 근처 벤치에 앉아 내일 투숙할 알베르게를 수배하는 중에 누가 내 이름을 부른다. 베드로 신부님이다. 성당 저녁 미사에 신부님과 함께 동참한 후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신부님이 정진규 선생을 소개한다. 50세가량으로 보이는 정 선생은 프랑스 아레스에서 출발해 1,100여킬로미터를 걸어왔다고 한다. 입이 떡 벌어진다. 알고 보니 순례자들 중에는 네덜란드 암스텔담에서 자전거로 출발한 사람, 독일 스트라스브르그에서부터 걸어온 사람 등, 유럽 각국의 자기 집에서부터 걸어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배낭 속엔 산티아고 길을 배경으로 한 휴먼 영화 <더 웨이 The Way>의 스토리 못지않은 수많은 사연들이 쟁여져 있을 것이다. 그 숱한 사연들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으리라. 사랑과 경멸과 그리움의 대상인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