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사기행의 발길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운길산 수종사와 한음마을, 그리고 정약용의 고향인 마재마을, 그리고 광해군의 묘소를 돌아보는 경로를 택하였다. 남한강과 북한강은 양평에서 서로 만나 머리를 맞댄다. 그래서 두물머리(二水頭 또는 兩水頭)라 이름지었다. 여기에서 두 강은 하나의 강이 되어 팔당, 마포, 서강, 양화진, 행주산성을 거쳐서 김포의 서해바다로 흘러든다. 이곳 두물머리에는 많은 전설과 사연이 담겨 있는데, 두물머리를 가장 완전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운길산 중턱에 있는 수종사이다. 운길산을 오르는 입구 마을에는 ‘슬로시티 조안면’이라는 안내간판이 서있었다. 한강을 낀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곳으로 목가적인 농촌의 아늑함이 느껴졌다. 수종사는 조선 세조 임금과 관련된 사연을 담고 있는데, 세조가 만년에 피부병으로 고통을 받을 때 전국의 물 좋은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니며 요양을 하던 중 우연히 인연이 닿아 세워진 절이다. 수종사에 대한 기록으로는 이곳에서 가까운 마현리에 살았던 다산 정약용이 수종사를 자주 찾아와 마음의 안정을 취하곤 했는데 수종사에서 보낸 것을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에 비유했다. 다산의 『유수종사기(遊水鍾寺記)』에는 수종사가 신라시대의 천년고찰이 있었던 자리라고 적고 있다. 다산이 강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오자, 다산의 제자로서 해남 대흥사 주지 초의선사가 제주에서 유배가 풀린 동갑내기 친구 추사 김정희와 함께 이곳 수종사에 머물고 있는 다산을 찾아와 세 사람이 수종사에서 산 아래의 두물머리 한강을 내려다보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이들이 수종사에서 차를 나눈 우정을 인연으로 수종사는 한국의 차 문화를 계승한 절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지금도 절 경내에는 이들 3인의 차 문화를 계승하는 의미에서 삼정헌(三鼎軒)이라는 별채의 다실을 유지하고 있다. 또 수종사 경내의 돌비석에 새겨진 ‘수종사 사적기’에는 이 절이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천년고찰이며 고려 태조 왕건이 이 절에서 구리종을 얻으면서 부처님의 가피로 고려를 건국했다는 전설이 있다고 적혀있다. 그 외에 세종 21년(1439)에는 금성대군이 정혜옹주의 부도를 세우고 사리 14과를 청자항아리에 담아 부도에 모셨다고도 했다. 1458년 세조는 강원도 상원사에서 요양을 마치고 한강을 따라 한양으로 돌아오던 길에 날이 어두워져 양주의 양수리 마을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깊은 잠을 자고나서 새벽에 얼핏 잠을 깨었는데 가까운 운길산에서 청아한 종소리가 들려와 마음이 고요해졌다. 그 종소리는 너무나 맑고 깨끗하여 세조의 마음을 가장 평온한 상태로 만들어주는 듯했다. 날이 밝자 세조는 새벽에 들었던 종소리가 난 뒷산의 절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곳에 절은 없었고 폐사지 터의 암굴에 16나한상이 모셔져 있고 바위의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의 울림이 마치 종을 치는 듯 맑고 청아하였다. 새벽녘 꿈결처럼 마음을 가라앉혀준 바로 청아한 그 종소리는 실은 바위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내는 신통한 울림이었던 것이다. 깊은 감명을 받은 세조는 그 종소리가 나는 암굴 아래에다 절을 지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면서 은행나무를 심어 놓고 한양으로 떠났다. 지금 수종사 범종각 옆에는 그 당시 세조가 심어둔 은행나무 2그루가 500여 년의 세월에도 끄떡없이 거목의 위용을 자랑하며 산 아래의 한강을 굽어보고 있다. 다음 해인 1459년 이곳에다 절을 중창하고 암굴에서 떨어지는 물이 종소리를 낸다는 의미로 절 이름을 수종사(水鍾寺)라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왕비와 공주 등 왕족들이 이 절을 왕실의 원찰(願刹)로 삼아 많은 시주를 하고 탑을 세웠다. 절의 경내에 있는 탑은 왼쪽이 태종의 딸 정혜옹주를 화장했을 때 나온 사리를 봉안한 승탑(불사리탑)이고, 오른 쪽의 팔각 5층탑은 규모는 크지 않으나 조선시대에 건립된 탑으로는 건립연대가 확실한 유일한 탑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사리함이 보관되어 있는 정해옹주의 승탑과 팔각 5층탑은 각각 보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곳 수종사 앞마당에서 내려다보는 두물머리의 모습은 보기 드문 승경이다. 강원도 금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금강산에서 물길을 이어온 북한강이 이 지점에서 합해져서 하나의 한강을 이루는데, 천하의 절경이다. 2개의 강에서 옛날 궁궐 지을 목재를 실은 뗏목배와 물건 실은 황포돛배가 여기 두물머리에 이르면 뗏꾼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는 하루 걸려 내려가면 뚝섬과 마포나루에 닿는다고 했다. 일찍이 중국 그림의 모방에서 벗어나 조선의 승경(勝景)을 직접 그려온 겸재 정선(鄭歚)은 주로 조선의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 화폭에 담았는데 이것을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 일렀다. 그의 그림에서 우리민족은 중국보다는 조선의 산하에 더 많은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영조 임금은 정선을 지방 수령으로 내보내어 그 지역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려 올리도록 특명을 내림으로써 우리의 산수에 대한 애착을 보이기도 하였다. 정선은 이곳 수종사에서 내려다 본 두물머리의 풍경을 독백탄(獨栢灘)이라는 화제로 산수화를 그렸고, 이곳의 풍경을 한강 8경 중 제1경으로 꼽았다. 獨栢灘은 쪽 잣 여울이라는 의미로 외톨이 잣처럼 생긴 섬을 낀 강이라는 뜻이다. 그림의 구도로 볼 때 정선이 독백탄을 그린 지점이 이곳 수종사 마당에서 내려다 본 광경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수종사에서 두물머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자욱한 강 안개가 퍼졌다 걷히고 안개 사이로 펼쳐지는 장엄한 일출이 해를 강물에 푹 담가놓은 듯하기도 하고 강 속에 둥근 해가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여 마치 신선의 세계에 들어온 느낌을 받는다. 또 멀리 밤섬에서 아침 그물을 걷는 어부의 부지런한 손놀림까지도 눈에 아련히 보이는 듯하다. 수종사 뜰앞에 서서 두물머리를 내려다보며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가 되듯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을 염원하면서 산 아래로 발길을 옮겼다. 수종사가 있는 운길산 중턱에서 동북 방향으로 산길을 따라 약 2㎞ 정도를 내려가면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국난 극복에 혼신을 다 한 명재상 한음 이덕형(李德馨)이 만년에 은거하던 마을이 나온다. 그 마을 이름은 북한강 가의 사제촌(莎堤村)인데 흔히 ‘한음마을’로 불린다. 사제촌(오늘날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은 두물머리에서 북한강 쪽으로 약간 올라와 위치한 용진나루가 있던 곳으로, 용진나루는 옛날 용진강으로 불리던 북한강의 북쪽 사제촌과 강의 남쪽인 양근군 중은동(오늘날의 양평군 양서면 목황리)을 이어주던 나루터였다.    마을 입구에는 이덕형의 시를 새긴 비석이 있었다. “큰 잔에 가득 부어 취하도록 먹으면서 만고영웅(萬古英雄)을 손꼽아 헤어보니 아마도 유령(劉伶) 이백(李白)이 내 벗인가 하노라.“ 이덕형의 큰 포부를 헤아릴 수 있는 시 한편이다. 이덕형은 관직에 있을 때에도 틈틈이 고향마을 인근에 있는 아름다운 운길산을 찾았고 수종사의 주지 덕인스님과 친분을 갖고 따뜻한 정을 나누며 시를 주고받기도 했다. 이때의 시 한편에는 “운길산 스님이 사립문을 두드리네. 앞개울 얼어붙고 온 산은 백설인데, 만첩청산에 쌍련대(雙練帶) 매었네. 늘그막의 한가로움을 누려봄 즉 하건마는”이라 읊었다. 이덕형의 인품은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사계 김장생은 이덕형의 인간됨을 평하기를 “한음은 치우침이 없고 당(黨)이 없는 동서남북의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덕형의 인품은 이미 조정 내외에 두루 알려져 있었다. 정경세의 『우복집』에는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를 지닌 한음의 일화를 전한다. “한음은 평소에 겸손하고 삼가며 자신을 자랑하는 빛이 없었다. 그는 서총대(瑞蔥臺)에서 임금이 적은 글에 응대하는 글짓기에서 1등을 하였다. 아무도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왕이 문신들에게 명하여 정시(庭試)를 보게 하였는데, 여러 벼슬아치들은 ‘이번의 정시에도 역시 한음이 1등으로 급제를 할 거야’라고 수근 거렸다. 한음은 이 말을 듣고는 병을 핑계대고 정시에 응하지 않았다.” 이덕형은 고려 공민왕 때 신돈을 탄핵하다 실각한 광주(廣州)이씨 둔촌 이집(遁村 李集)의 후예이며 성종 때의 대신 이극균의 5세손이다. 이덕형은 이항복과 함께 흔히 “오성과 한음‘으로 회자되고 있는데, 오성은 도원수 권율의 사위가 되고 한음은 영의정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중앙의 요직에 있으면서도 교만하지 않았고 국가의 위기 시에는 힘을 모아 난국을 풀어나갔다. 특히 이덕형은 외교적 능력이 출중하여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군사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직접 명에 들어갔고, 협상파로서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었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의 인품을 알아보고 직접 만나 회견하기를 요청해오기도 하였다. 이덕형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대제학을, 38세에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고 42세에 영의정에 오르는 등 30여 년의 관직생활 동안 영의정을 3번, 문형을 3번 지낼 정도로 능력과 인품 그리고 덕망에 있어서 출중한 인물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백성을 사랑한 관리였다. 그러나 선조가 서거하고 광해군 정권의 대북파 실세 이이첨이 권력을 전횡하자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리고 이곳 사제촌에 별서를 마련하여 죽을 때까지 부모를 모시며 은거생활로 일관하였다. 그는 특히 가사문학의 대가였던 경상도 영천 출신의 노계 박인로(朴仁老)와 친하게 지내면서 많은 시문을 주고받았다. 박인로는 무과출신의 무관이었지만 시와 가사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지닌 문인이기도 했다.   사제촌 마을에 들어서자 늙은 고목이 서있고 그 옆에는 이덕형이 이곳에 은거할 때 노계 박인로와 함께 생활하며 주고받은 시가 돌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박인로가 이덕형의 심정을 읊은 장편의 시 ‘사제곡(莎堤曲)’에는 비록 한음이 이곳 아름다운 사제촌 시골에 묻혀 살지만 나라를 위한 애끓는 심회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애절하게 적어냈다. “어리석고 못난 사람이 임금님의 지극한 총애로 온갖 영화를 다 누렸으니 머리 굽혀 침식을 잊고 죽기를 각오하고 나라 일을 생각해 본들 꺼져가는 관솔불처럼 미약한 지식으로 어찌 햇볕 같은 임금님 생각을 도와 드릴 수 있으랴 하는 일 없이 높은 자리에 앉아 얼마나 오랫동안 더럽혔던고. 낭떠러지 풀들과 강가 난초들의 진동하는 향기가 온 동네에 퍼져있고 남쪽 동쪽 계곡들은 떨어진 꽃잎들로 가득한데 가시덩굴 헤치고 산속으로 들어와 초가삼간 몇 채 지어놓고 늙으신 아버님 돌아가실 때까지 효도를 다해보려고 이곳에 자리 잡고 보니 내가 바로 이곳의 주인이 되었구나 어찌 삼정승 자리와 이 자리를 바꾸자고 하겠는가. …… …… “ 라고 하였다. 이덕형은 광해군 정권이 폐모론을 내어놓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 사제촌 마을로 들어와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 박인로는 누구보다도 한음의 심사를 가장 잘 꿰뚫어 본 듯하다. 한음이 퇴직하여 한적한 시골에 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흔들리는 조정을 바로 잡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노계는 가사에서 구구절절이 나타내고 있다. 사제촌(송촌) 마을입구에서 안쪽으로 200여 미터 산 쪽으로 올라가자 이덕형이 은거했던 별서지가 나왔다. 본래 대아당이라는 당호의 고택과 읍수정, 이과정이라는 2개의 정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있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읍수정이 있었다. 고가가 있던 자리에는 그 당시 한음이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고목이 된 채 서 있었고, 고목 은행나무 옆에는 타고 다니던 말을 새워두던 하마석 조형물을 세우고 한음의 별서지(別墅地)였음을 알리는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사제촌에서 여생을 보낸 한음은 죽어서 그의 출생지인 강건너 청계산 중턱에 묻혔다. 고매한 인품을 갖춘 큰 인물이 만년을 보냈던 한적한 시골 사제촌을 거닐면서 한강의 북쪽 한양에서 많은 인재가 났듯이 한강 이남의 대표적 인물 한음이 이곳 양수리에서 태어났음을 알았다. 산수를 따라 인물이 배출되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다. 더욱이 그의 호를 한양에 대비하여 ‘한음’으로 지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의 호(號) 한음(漢陰)은 한강 남쪽에는 그가 있음을 당당히 알리는 자부심의 표현이라고나 할까. 이어진 발길은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로 향했다. 한음마을 사제촌에서 다시 한강을 따라 하류로 약간 내려가면 마재마을(馬峴)에 있는 다산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이 나온다.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오늘날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출생하여 부친의 권유로 한양에서 공부를 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후기 정조 임금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는 인재가 되었다. 다산이 어릴 적 살았던 마재마을은 한강을 끼고 마치 반도처럼 강쪽으로 볼록하게 나간 지형으로 많은 풍수가들이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 일컫던 곳이다. 이런 전원적인 자연 조건은 다산의 성장기에 정서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의 생가 여유당은 아담하고 정갈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그의 사상과 학문을 볼 수 있는 다산기념관과 실학박물관이 건립되어 있었다. 전시관의 앞마당에는 정약용이 수원화성을 축성할 당시에 사용했던 거중기와 녹로를 재현하여 전시해두었고, 생가 여유당 뒤쪽 작은 산에는 정약용과 그의 부인 풍산홍씨의 묘가 합장되어 있었다. 여유당에서 다산의 묘소로 올라가는 계단 길옆에는 다산이 스스로 지은 자찬묘비명을 새긴 비석이 서있었다. 다산의 생애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그의 가문이 천주교도로 몰려 처형당하거나 오랜 유배생활에 들어감으로써 몰락 가문이 되었고, 아무도 그의 묘비명을 지어줄 사람이 없는 것은 이때나 그때나 매한가지의 세상인심이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여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찬비명을 지어놓았는데, 자신이 세상에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당당하게 살았음을 스스로 천명해놓았다. “네가 기록한 너의 선행, 여러 편의 글로 묶었구나. 그 숨겨진 잘못된 일까지 일일이 다 적을 수 없으리라. 너는 이렇게 말하겠지. ‘나는 사서와 육경을 안다’고 하나 그 행실을 살펴보라. 너무나 부끄러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너는 칭찬을 바라겠지만 누구도 이끌어 줄 수는 없으리라. 어찌 온 몸으로 증명해 드러내 빛내고 싶지 아니하겠느냐마는, 이제 너의 어지러움을 거둬들여 미쳐 날뛰던 일들은 그만두도록 하자. 머리 숙여 훤히 드러나도록 전념하니 마침내 축하의 말이 있으리라.” 세월이 흘러 역사는 마침내 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는 시대가 도래 하였다. 시대를 앞당기려던 그의 답답했던 지난 세월은 다음 세대들이 문화국가를 건립하는데 초석이 되었다. 비록 일제의 지배라는 수모의 시대를 거치기는 하였으나 현재 한국은 세계사의 흐름 속에 한류문화의 정수를 선보이고 있다. 세계의 무대로 나아가 문화민족의 우월성을 거침없이 펼쳐나가는 시대를 맞이했다. 이처럼 만개한 문화의 꽃을 피우기까지 한 알의 밀알이 된 다산의 열정을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 한 시대의 지성을 대표할만한 선비로서 다산이 세상을 개혁하는데 온 힘을 쏟으며 당당한 삶을 살았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태도에서, 그의 세상을 향한 부르짖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801년 정조가 승하하자 노론벽파의 거센 천주교도 숙청 작업에 휘말려 다산은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가 유배에서 풀릴 몇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벽파의 강경론자 서용보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고 그의 정치적 운신은 끝이 났다. 그는 강진 유배기에 그의 제자들과 여러 인맥을 동원하여 외가인 해남의 윤선도 가문에서 소장하던 수많은 서적들을 탐독하며 각 분야의 학문을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 그런 노력 끝에 500여 권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편찬함으로써 한국학을 집대성하는 최대 다작의 주인공이 되었다. 다산의 제자들은 스승 정약용이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하는 동안 복숭아뼈가 3번이나 구멍이 나는 고통을 참아가며 저술에 전념했다고 전한다. 역사, 지리, 농상학, 건축, 경세, 외교,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실학적 저술들은 인간의 실질적인 삶을 위한 고뇌에 찬 저작들이었다. 어쩌면 그가 강진에서 오랜 유배생활을 하면서 해남 녹우당의 장서 수만 권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우리민족에게 다산이라는 인물을 통해 내려준 은혜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그의 저술들은 후일 조선의 백성들이 근대화를 지향해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정약용을 실학의 집대성자 또는 완성자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의 유배생활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그의 처 홍씨는 시집올 때 가져왔던 색 바랜 다홍치마를 다산의 유배지로 보냈다. 다산은 그 낡은 치마폭에다 시를 적고 그것으로 서첩을 만들어 아들과 아내에게 보냈다. 그것이 몇 해 전에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진 그의 ‘하피첩(霞皮帖)“이다. 몰락가의 자식이라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이며 한양을 떠나면 학문과 멀어진다는 것을 거듭 일러두고 있다. 하피첩에는 가장(家長) 노릇을 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나타나 있는데, 아내와 자식들을 향한 다산의 애틋한 마음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그는 자식들에게 청렴을 강조하였으며 ”재물은 타인을 위해 베풀었을 때 그 가치가 있음“을 힘주어 타일렀다. 그는 자식들에게 변변한 재산을 물려줄 수도 없었다. 단지 마음의 재산을 남겨줄 수 있을 뿐이었다. ”내가 벼슬하여 너희들에게 물려줄 밭뙈기 하나도 장만하지 못했으니 오로지 정신적인 부적 두 글자를 물려주겠다. 그것은 근(勤)과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도 나은 것이다.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던 정약용은 정조 임금에게 발탁되어 조선후기 문예부흥의 기수로서 우리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정조 임금이 기획하고 다산이 시행한 수원화성의 축조는 당시 최신 기계인 거중기를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갈 국방, 경제중심의 신도시를 완성하였으니, 그 시대 최고였던 축성 기술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새로운 세상,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자신을 던졌던 한 지식인의 생애가 이곳 한강 가 능내리 마재에서 생생한 역사로 살아나 굽이치는 강물과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빛을 남긴 사람의 고통은 후세인에게 ‘희망’이라는 영원한 축복을 전해준다는 사실을 역사의 현장이 깨우쳐 주었다. 다음 발길은 남양주 진건읍 송능리에 있는 광해군의 묘소로 향했다. 광해군의 묘소는 산의 8부능선 쯤에 위치하였는데 그 가파르기가 매우 심하여 왕릉이나 왕족의 무덤이 들어설 자리로는 전혀 맞지 않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도를 통해 묘소로 들어가는 입구는 철책을 두르고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출입을 제한한다는 안내문과 함께 자물쇠로 잠가두어 관리인을 통하지 않고는 묘소에 들어가 볼 수도 없게 되어 있었다. 광해군이 400년 전에 겪은 혹독한 시련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광해군은 왕좌에 15년간 재위하였고 폐출된 후 강화, 교동 등지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제주도까지 옮겨지며 19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제주도에서 67세로 생을 마쳤다.   그가 유배지 제주에서 그의 삶을 한탄하는 시 한편에서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광해군에게는 사후의 유택마저도 이처럼 궁벽한 산골짜기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누가 이런 곳을 전왕의 무덤으로 잡았는지 알 수 없으나 비록 쫓겨난 왕이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격식은 갖추어 주는 것이 왕조시대를 산 사람들의 도리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을 떨칠 수 없었다. 광해군의 묘소는 부부의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왼쪽이 광해군의 묘소이고 오른 쪽이 부인 유씨의 무덤으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세워진 비석에 의하면 광해군 묘소의 조성 연대는 인조 19년(1641)으로 되어 있었는데, 1641년(辛巳) 7월 1일 제주에서 병으로 사망하였고 3일 간 조회를 쉬었으며, 예조의 당상으로 하여금 주관케 하여 분묘를 만들고 묘소 관리를 위한 전답을 하사했다고 새겨져 있었다. 현재의 분묘상태는 그나마 최근 행정 당국에서 안내 표지판을 세우는 등 묘의 주변 정리를 해둔 흔적이 눈에 띄었다. 그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황폐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해군은 선조와 후궁 공빈김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자질이 영민하고 성품이 온화하여 대내외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2살에 어머니 공빈 김씨가 별세하였으나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의 사랑과 훈도에 의해 대체로 유복한 성장기를 보냈다. 그는 주위로부터 타고난 자질을 인정받았지만 선조의 서자 중 둘째였으므로 본래 왕위에 오를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환란을 맞아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존재가 되었고 그로 인하여 세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세자 책봉 과정에도 어려운 고비는 많았다. 임진왜란을 맞아 일본군의 추적에 쫓기던 선조는 평양-의주를 거쳐서 여차하면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평양에 이르렀을 때 선조는 자신이 명나라로 귀부할 경우를 대비하여, 망명 이후의 조선 조정을 이끌 후임자로 황급하게 광해를 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발표했다. 이처럼 급작스런 세자책봉은 선조가 조선을 포기하기 직전에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대안이었던 것이다. 일본군에 의해 국토가 유린 된 가운데 광해는 최흥원을 영의정으로 한 분조를 거느리고 격문을 뿌리며 의병을 모았고 전장을 누비며 직접 전쟁을 지휘하였다. 일본군의 약탈에 고통 받던 백성들을 위로하는데 피나는 노력을 쏟았고, 왕실에 등 돌렸던 민심을 하나로 모아 무너진 선조정권의 신뢰를 되찾는 계기를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광해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지 않고 오히려 남하하여 적진 속으로 들어가 전투를 벌였다. 또 전쟁 중에도 과거시험을 치러 인재를 발탁하는 등의 행정력을 발휘함으로써 이반된 민심으로부터 왕과 조정의 무능에 대한 불신을 잠재웠다. 그 결과 백성들로부터 많은 칭송과 지지를 얻었다. 조선을 지원하러온 명나라의 경략 송응창은 “조선의 국왕은 무능한 군주로서 오늘과 같은 변란을 당해도 걱정하고 반성하는 바가 없으나, 세자는 ‘청년영발(靑年英發)하고 묘온기의(妙薀岐薿)하여 신민이 모두 감탄하고 있다.“며 은근히 광해의 자질을 칭송하였다. 이에 선조는 왕권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전란 중에도 여러 차례 세자에게 선위하겠다는 말로 세자를 시험하며 조정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광해는 시련을 극복하고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선조의 뒤를 위어 조선 제 15대 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란 후에 등극한 왕으로서 광해군의 치적은 상상외로 많다. 궁궐의 건립 등 전란 후의 복구사업, 전주사고를 바탕으로 한 5대 사고의 재정비, 허준의 동의보감 완성 등 의학서적의 편찬을 통한 의료구호 사업의 시행, 전란으로 소실된 토지대장의 복구 등 양전사업과 호적의 정리를 통한 국가 세원의 확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원익의 주장을 받아들여 공납제도의 폐단에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대동법을 경기도에 실시한 것 등이 획기적인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외교적 업적으로 명-후금 교체기의 국제전에서 중립적 외교자세를 취함으로써 국가안위를 보전한 일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음 왕위에 오른 인조가 대명의리를 고수하다가 수많은 백성들을 고통의 구덩이로 몰아넣은 사례를 보더라도 광해군의 자주 외교가 갖는 의미가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광해군이 임진왜란의 전쟁영웅으로 백성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고 왕위에 오른 후에도 적지 않은 치적을 남겼음에도, “폭군의 누명을 쓰고 폐출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도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폭군의 멍에를 벗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자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임명하는 등 각 당에서 유능한 인물들을 등용하여 활기찬 전후 복구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왕권을 떠받치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에는 소홀하였다. 임란 중 공훈을 세운 대북파 중심의 집권당 세력이 여타의 당을 배척하고 독주체제로 나아가면서 왕과 집권세력 간에 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대북파가 광해군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왕좌에 올린 공로를 그들이 독차지하려 한데서 비롯된 정쟁 때문이었다. 여기에 광해는 왕좌를 위협하는 세력들을 제거한다는 대북파의 정책에 동조하면서 대북당의 전횡에 점차 휘말려 들어갔다. 왕권을 감싸고 있던 이이첨 등 대북파의 독단적인 정치노선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한 것은 그의 방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집권당인 대북파가 서인, 남인 등의 다수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정적의 제거 등 강압적인 정치와 공포정치를 그 수단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왕의 이름으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지르는 대북파의 횡포는 곧 광해군의 실정으로 이어졌다. 고변을 처리 한다는 명분으로 정적 제거를 위한 옥사가 거듭될수록 그것은 보복정치라는 여론이 조성되었고 반대세력에게는 광해군 정권을 부정하는 명분을 쌓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광해군 정권은 결코 민중의 봉기로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반대당의 윤리적 명분론에 발목을 잡혔던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과연 ’폐모살제‘라는 명분이 왕권을 교체할만한 조건이 될 수 있었을까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대북파의 일당 독재적 정국운영이 왕의 정치적 능력을 제한하는 굴레가 되었고, 대북당은 다른 당과의 협력을 허용하지 않는 편협한 붕당관으로 급격한 정치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서인과 남인에게 정권교체의 빌미를 준 것이었다. 몇 가지의 점에서 이를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조선 5현의 문묘종사 문제를 살펴보면, 이미 공론으로 정해져 있었던 5현 중 이언적과 이황의 출향을 강행해야만 했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들을 문묘배향에서 배제하기보다는 이들과 함께 대북이 추앙했던 남명 조식을 추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더라면 반대세력의 공격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대북파의 회퇴변척(晦退辨斥)의 후유증은 결국 광해군 정권의 몰락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비록 대북파가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다고 할지라도 정치란 다수와 소수의 타협의 산물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정인홍의 주장에 따라 회퇴변척의 당론을 강행한 것은 곧 정치력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광해군 정권을 뒷받침한 집권당 대북정권의 한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연구자가 아닌 사람들로부터 가끔 ‘광해는 과연 폭군인가? 그는 무슨 이유로 폭군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 이러한 물음에는 “폭군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라는 소극적인 답을 하면서도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 주는 일이 쉽지 않음을 경험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광해군에 대한 평가를 함에 있어서 인조정권이 ‘폐모살제’라는 윤리적 패륜을 명분으로 그를 폭군으로 규정한 것이 과연 옳은 평가였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더욱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광해군을 폭군으로 평가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점에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역사가들은 광해군의 실정(失政)을 여러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전후복구사업 중 궁궐의 재건축에 과도한 비용을 낭비한 점, 왕을 둘러싼 집권세력의 권력의 독주, 문묘배향에 있어서 회퇴변척의 강행, 왕권 보호의 명목으로 빈번한 옥사를 일으킨 점 등등을 들고 있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사유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여러 가지의 실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광해를 폭군으로 규정한 평가는 왕조역사의 경험칙에 비추어 지나친 것으로 여겨진다. 400년 전 왕조시대에 내려진 광해에 대한 ‘폭군’ 규정은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재평가되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근거는 무엇보다도 광해가 저지른 실정(失政)보다는 그가 이루어 놓은 우수한 업적(業績)이 훨씬 많다는 점 때문이다. 또한 광해군의 치세는 국제적으로 명-후금의 교체기에 해당하여 매우 변화무상한 시기였으므로 왕의 업적을 평면적으로 단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기에는 어떤 군주라도 원만하게 조정을 통합하고 국제관계에 현명하게 대처하여 전쟁을 방지하는 정치를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광해군을 밀어낸 인조반정의 명분은 사실상 미약한 편이었다. 그래서 명나라에서도 2년간이나 인조의 등극에 대한 승인을 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던 것이다. 광해군이 왕좌에서 쫓겨난 것이 백성들을 괴롭혀 이들이 들고 일어나 왕을 몰아낸 것이 아니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 당시 많은 백성들 사이에는 “광해군 때나 인조반정 이후나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라는 여론이 일었다. 특히 광해조에 들어와 그동안 200년간이나 미뤄오던 대동법을 경기지역에서 실시한 것은 광해군의 개혁 중 매우 중요한 정책의 하나였는데, 대동법은 토지를 가진 사람들이 토지의 결수에 비례하여 내는 세금이었기 때문에 종전의 인두세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토지가 없어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대부분의 농민들에게는 획기적인 감세정책으로 환영을 받았으나 많은 토지를 가진 고관대신 기득권층들은 막대한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땅이 없는 하층민에게는 공납의 부담이 경감되므로 싫어할 이유가 없었지만 많은 토지를 가진 기득권층은 정권이 교체되기를 기다리며 그 명분을 찾게 되어 있었다. 광해군이 왕좌에서 폐출되고 폭군으로 규정된 것은 정치권의 명분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폐모살제’라는 왕조시대의 윤리적 기준에 의해 반정세력들은 광해군을 폭군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광해군 시대의 윤리적 가치기준은 효와 우애의 실천이었다. 왕은 정치를 함에 있어서 이 점을 고려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비호세력들의 전횡을 방치함으로써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정쟁은 깊어갔고 집권당 대북파는 광해군을 등에 없고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만 집중하였다. 소위 ’칠서의 옥‘이라 불렸던 사건을 빌미로 대북파 정권은 왕권수호라는 명분을 내걸고 피의 숙청을 지속함으로써 권력유지에 장애가 될 만한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그리고 이들의 배후에 있던 김제남의 제거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광해군은 결국 이이첨, 김개시 등 집권당 실세의 질주를 막지 못한 채 끌려간 것으로 여겨진다. 영민하고 명석했던 광해군은 임란 시에는 전쟁 영웅으로, 전후에는 각종 복구사업과 자주 · 실리외교 등으로, 그가 남긴 많은 치적에도 불구하고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폭군의 오명을 쓴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조선왕조가 종말을 고할 때까지도 윤리적 범죄를 저지른 왕이라는 낙인이 지워지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광해를 결코 훌륭한 군주라고 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폭군’으로 규정함은 지나치다는 생각에 이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이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도 참작될 수 있을까? “광해는 선조나 인조에 비하여 군주로서의 자질이 우수하다. 그동안 그에게 씌어져 있던 폭군이라는 멍에를 이제 풀어줄 때가 되지 않았나?”라고 속으로 되뇌며, 오늘 그의 묘소를 돌아보았다. 격랑의 시대를 살았던 광해군, 그의 유택이 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통치자에게 있어서 방심은 금물이다’라는 또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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