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선비문화는 단순한 선비문화가 아니다. 그 당시에 선비는 불의에 대해 꿋꿋이 맞서, 시대의 정신과 정의를 스스로 보여주었다. 뿐만이 아니라 권력의 부당함에도 온몸으로 저항하여 유배도 마다하지 않았다. 요즘의 시대상을 돌아볼 때에 그 당시의 선비정신이 더욱 필요하다. 더구나 당대에 불의가 득세하고 권력도 잡고 나아가 부도 챙기고 있다고 여길 때에,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이 더욱 그립다. 이 같은 것에 대한 그리움을 되살리고, 나아가 오늘날에 선비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포항시 장기면에 ‘장기유배문화체험촌(이후 체험촌)’이 들어선다. 체험촌은 올해 실시설계를 시작한다. 총 사업비 18억 원을 투자한다. 장기면 마현리 일원 10,000㎡의 규모이다.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선생의 당시 주거지를 복원한다. 따라서 그때의 고행길을 함께 할 수가 있는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을 할 수가 있는 공간도 조성한다. 체험관이 들어서면, 관광자원화는 물론 구룡포와 호미곶을 동해안 관광벨트의 중요한 콘텐츠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관광벨트도 중요하지만, 오늘날에 선비정신을 되살려내는 것이 훨씬 값어치가 있다. 우리의 당대에 선비정신을 실종했기에 우리의 일상생활이 더욱 가파르고 팍팍하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선비가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온갖 불의와 범죄가 날뛴다고 볼 수도 없지가 않다. 또한 선비정신의 청렴함도 시대가 요구하고 있다. 지난 14일 주민 의견을 청취하는 자리에서 하나 같이 체험촌이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그리고 향토사학자도 지역 주민들이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혜택을 받을 수가 있도록 당부했다. 체험촌이 오랜 지역의 숙원사업은 말할 것도 없을뿐더러 나아가 지역 주민뿐만이 아니라 체험촌이 한국인 전체에게까지 영향을 줘서, 오늘날에 선비정신을 되살려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곳으로 유배 온 선비는 62명이다. 그러나 지역 향토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105명으로 밝혀졌다. 조선시대 최초의 유배자는 태조 1년 설장수 선비였다. 이어 최윤복ㆍ송시열ㆍ정약용 선비 등 당대를 대표하는 선비의 발길이 이어졌다. 특히 송시열 선비와 다산 정약용 선비는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후학 교육에 열정을 다 받쳤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조선 숙종 때에 4년간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주자대전차이, 이정서분류를 저술했다. 이에 그의 가르침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죽림서원을 창건했다. 지난 2001년에는 장기발전위원회에서 우암 선생 사적비를 건립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순조 1801년 3월 9일 마현리에 도착했다. 220일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장기농가 10장, 기성잡시 10수, 아가사 등 수많은 작품을 후대에 남겼다. 장기면민들은 다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다산 유적비를 건립했다. 이밖에 홍여방 선비, 박팽년 조카도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했었다. 체험촌 건립은 포항시 관계자의 말 같이 오는 2014년 포항~울산 고속도로가 완공함으로써, 신문화관광 콘텐츠만이 아니다. 아까도 잠깐 짚었지만, 체험관의 건립의 의미는 단순하지가 않다. 선비정신 실종시대에서, 선비정신을 복원하는 정신ㆍ문화 사업이다. 그리고 선비정신은 우리의 옛 문화ㆍ예술을 되살려내는 역사적인 사업이다. 체험촌 건립으로써, 그때의 선비정신을 오늘날에 살려만 낸다면, 우리의 삶의 질도 한 층 더 높아질 것이다. 체험관은 이런 취지에서 건립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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