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은 기초 생활수급자이고 장애인으로 살아가면서 중증장애인들을 내 가족과 같이 사랑으로 돌보며 천사같이 살아가고 있는 주부가 있어 연말을 앞두고 주의로부터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봉화읍 거촌리에 거주하는 봉화군 지역 자활센타 활동보조인이면서 경북지체장애인협회 봉화군지회 여성팀장을 맡고 있는 라성희(46)여사가 그 주인공이다.
라 팀장은 본인도 장애인이면서 보조 활동을 통해 재 가장애인들의 재활, 삶의 질 향상, 사랑의 온정사업, 저소득장애인들을 가족과 같은 마음으로 봉사자, 후원자 역할을 도맡아 해 오고 있다.
라 팀장이 세상 빛을 보게 해준 곳은 지난 47년 전 따스한 어느 봄날 당시 검은 탄광촌이었던 산간벽촌 강원도 태백의 동점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고부터 영화 같은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당시 세상의 빛을 보게 해준 어머니는 태어나고 일주일 만에 핏덩이를 가슴에 꼭 품어 안은 채 차디찬 겨울 어느 날 밤 찌든 가난 속에 지병으로 앓다가 30년이란 짧은 삶을 마감했다는 것.
아버지는 가난한 삶속에 일찌감치 떠난 어머니의 흔적만을 그리며 광목적삼 자락에 나를 싸안고 검정고무신을 질질 끌며 3년을 눈, 비 맞으며 동네 아줌마들을 찾아다니며 젖동냥으로 키웠다고 한다.
네 살 되든 해 아버지는 고모 댁에 나를 맡기고 머슴살이 길을 떠나면서 통한의 눈물을 훔치며 오두막 도투마리집이 눈에서 살아질 때 까지 마음 아파하며 힘든 발길을 옮겼다고 전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맞이하고 부터 잦은 구박, 학대, 매질 속에 아홉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해 한 달에 세 번 정도만 보내주고 종일 힘든 청소와 노동일 등을 했다.
새어머니는 겨울이 되 시킬 일이 없으면 이유 없는 모진 매질에 이기지 못해 집을 뛰쳐나가 그 추운겨울 강원도 태백의 짚가리속이나 콩 가리 속에서 잠을 자야 했던 아홉 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어렵사리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해 2학년 때 집안 형편과 혹독한 새 어머니의 학대와 매질에 못 견뎌 중퇴하고 홀로 서기를 위해 험난한 사회 속으로 뛰어 들었다.
맨 처음 직장을 잡은 곳은 대구 능금조합 심부름센터로 어린마음에 이를 악 물고 선대의 삶과 같이는 되지 말고 반드시 성공을 하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노력한 노동일로 꿈 많았던 소녀 시절은 지나갔다.
그해 중학교 중퇴 후 대구로 떠나 연락이 두절상태에서 폐암선고를 받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과 저의 삶속에는 세상 모든 것이 좌절과 절망 속에 엄청 힘든 시절도 하염없이 무심하게 흘렸다.
하지만, 이를 물고 사회로 나가 궂은 일 마다않고 부닥치는 대로 열심히 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돈을 벌어 서 새어머니 소실인 2남2여 어린동생들을 송두리째 근사해야 하게 되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린동생들을 바라 볼 땐 새어머니가 모질게 매질을 가했던 그 시절, 혹독한 추위 속에 짚가리 콩 가리 속에 잠들게 했던 내 모습은 없고 존경스럽고, 이복동생들도 귀엽기만 했다.
고난의 세월은 흘러 스물두 살이 되든 해에 마음 편히 두고 살갑게 살 곳이 앖는 나는 중매를 통해 경북 봉화 광산김씨 종가댁 종부로 살림살이는 보잘 것 없었으나 사람 하나보고 시집을 가게 되었다.
홀 시아버님, 내 신랑 4 형제가 사는 집안의 벽지 마을, 진흙으로 덮인 부엌, 청솔가지로 불을 지펴 끼니를 해결해야 했고, 낡은 석유곤로, 숟가락 다섯 개, 대접 여섯 개로 신집 살이가 시작됐다.
그때부터 나는 메뚜기도 잡아 팔고, 도토리도 주워 팔아 4 형제와 홀로 계신 시아버님을 모시고 극진히 봉양하면서 구차스런 살림이었지만 이웃에서 부러워할 정도로 나름대로 행복한 삶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홀시아버님을 모신지 십여 년째 접어들면서 대장암 선고를 받고 2년을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2년 동안 고무장갑하나 없이 맨손으로 간병을 했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
시아버님을 떠나보내고 보니 그래도 나에게는 부족한 점들이 너무도 많았던 것 같았다. 조금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송구스럽고 보다 따뜻이 살갑게 해드리지 못했던 순간이 아쉽다고 회고했다.
그 후 시동생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정신적 고통과 마음고생으로 심한 우울증이 다가왔고. 남편 또한 남들에게 말 못 할 어려움의 삶에서 크나큰 정신적 고통이라면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1남1여를 둔 라 팀장은 엄마로써 남편은 남의 농사일과 아들딸은 학교와 유치원에 보내놓고 나면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어느 날 딸의 손을 꼭 잡고 생각 했선 안될, 엄마랑 함께 죽자고 말을 했다.
그러나 그 어린것이 “엄마 나는 죽기 싫어, 엄마도 제발 죽지마”하면서 딸아이가 저 손을 꼭 잡고 위로해 주며, 우울증을 함께 이겨내 주었던 딸, 참 힘들고 참기 힘든 때가 또다시 흘러갔다.
그 이후 차츰 우울증은 벗어나 정신을 차리고는 식당을 전전하면서 수년간 생계를 꾸리고, 품앗이도 다니고, 아들, 딸 예쁘게 커주니 ‘열심히 살아야 겠구나’ 하는 굳은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힘이 많이 드는 농사를 지으며 감자 고구마 등을 담은 무거운 가마니를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고된 일들을 오랜 세월 하다 보니 하루는 서지도 못하는 허리 디스크란 병이 나를 찾아왔다.
하는 수 없이 안동 모 병원을 찾아 수술하고 한 달 반을 지나 집에는 돌아와 남들처럼 걸어 보고 싶고 뛰어보고 농사일도 열 심히 해 보고 싶었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 척추 장애 6급 판정을 받았다.
막상, 나 자신이 장애인이 되고 나서부터 장애인들의 심정과 마음을 속속들이 읽어 갈 수가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기로 마음을 굳게 결심하게 됐다.
아들은 목회자를 희망했다가 가정형편 때문에 꿈을 접고 사회복지사로 일하라는 나의 권유로 영남신학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경북 경산의 대동재활원 사회복지사로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다.
라 팀장은 엄마는 품을 팔아 금 다섯 돈, 아들은 푼푼이 저금해서 모은 금일봉을 마련해 졸업하면 안동방송국에 나란히 손잡고 웃으면서 가자고 약속한일이 실행에 옮겼을 때 가장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라 팀장은 성금전달이 방송을 통해 알려지는 것이 싫어 앞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받지 말고 보이지 않는 곳인 교회를 찾아 어렵게 살아가는 장애인들을 후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
지난 2003년도부터 지체장애인협회 봉화군여성팀장으로 활동을 하는 라 팀장은 호스피스 암 환자 돌봄 연수과정수료, 군 여성 활동가 부회장으로 위촉받는 등 장애인 돕기 위해 오늘도 봉사 활동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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