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매일신문=박동수기자]오동잎 넓은 잎새에 빛을 뿌리며 골기와 지붕 위로, 낙동강을 건너온 달이 뜨면, 사랑방에서는 선비의 시 읊는 소리 낭랑하게 달빛 속으로 스며들리라. 이럴 즈음에 깊숙한 내당에서도 여인의 가사 얽어가는 소리 끊어질 듯 이어질 것이다. 선비가 읊는 시에 운을 맞추듯이 먼 산 밤 부엉이 이따금 목청을 돋우고, 여인이 읽는 가사에 여운을 이어가듯 섬돌 밑 귀뚜라미도 소리를 지어낼 것이다. 옛날 안동 선비 집안의 밤 풍경은 아마 이러하지 않았을까 싶다. 조선은 엄격한 봉건적 신분 사회였다. 그것도 권리는 일부 상위 계층에 집중되고, 대다수 백성은 임무만 지고 살아야 하는 사회구조였다. 이러한 체제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허점을 드러냈다. 7년간의 전쟁에서 백성들의 삶은 처참하게 허물어졌다. 이에 따라 민중 의식이 생겨나고, 백성들은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변혁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 시기로 접어들면서 문학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한문 중심의 양반 문학에 대한 반동으로 평민 문학이 등장하여 서민들이 문학의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삶을 글로 표현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여성들도 내방가사를 들고 문학의 범주 안으로 들어온다. 내방가사는 조선 영조 때부터 ‘가ᄉᆞ’ 또는 ‘두루마리’라는 이름으로 주로 영남지방 양반댁 여성들이 한글을 매체로 지어 누린 문학이다. 내방가사는 역사에서 소외됐던 한국 여성들의 고단했던 삶의 기록으로서 그 내용은 대체로 여자로서의 하소연이나 슬픔, 또는 남녀 간의 애정이나 시집살이의 괴로움, 봉제사奉祭祀・접빈객接賓客, 현모양처의 도리나 범절 따위였다. 내방가사의 형식은 영조 이후의 양반가사의 형식과 거의 비슷하다. 즉, 4·4조를 길게 엮어 나가는 음수율과 4음보 격을 취한다. 4·4조에 4음보로 이어지는 가사를 첫머리만 떼어서 살펴보면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어와 세ᄉᆞᆼ 사ᄅᆞᆷ들아 이ᄂᆡ 말ᄉᆞᆷ 드러보소.’와 같은 호소 청유형, ‘어화 ᄋᆡ달ᄒᆞᆯ샤 이ᄂᆡ신세 ᄋᆡ달ᄒᆞᆯ샤 건곤 부모 졍ᄒᆞᆫ 후의 ᄉᆡᆼ남ᄉᆡᆼ녀 되엿도다.’와 같은 여신 인과형女身因果形, ‘이때ᄂᆞᆫ 어느 땐고 삼월 춘풍 조흔 때라.’와 같은 계절형, ‘산아 산아 일월산아 영남땅에 솟은 산아.’와 같은 민요형 등의 전형을 보인다. 농암 이현보 선생의 어머니인 권씨가 중종 시대에 지은 <선반가宣飯歌>를 일반적으로 내방가사의 효시로 보지만, 실제로 내방가사가 많이 쓰인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이다. <쌍벽가雙璧歌>와 같은 내방가사가 이에 속한다. 주로 영남지방의 부녀자들이 누린 문학으로서 작자를 알 수 있는 쌍벽가는 1794년(정조 18) 정부인 연안 이씨가 하회마을 북촌댁 화경당에서 지었다. 작자 연안 이씨는 서애 유성룡 선생의 8세손인 유사춘에게 출가하였으며, 초계문신(규장각에 특별히 마련한 교육 및 연구 과정을 밟은 문신) 유태좌의 어머니이다. 이 가사는 이씨가 58세 때 맏아들 태좌와 큰조카 상조가 같은 해에 함께 과거에 급제하므로 정조가 사촌 간에 급제한 일과 유성룡 선생의 음덕을 기려 제문을 지어 승지 이익운을 시켜 치제致祭하게 하자, 제사 지내던 날, 즉석에서 이 가사를 지었다고 한다. 제사상에 오른 제물로 시작하여, 자신이 과거에 고생했던 경위와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감회, 치제의 광경, 급제한 아들과 조카가 집에 이르는 행차 모습을 노래한 다음, 끝으로 국태민안과 이 영화가 만대까지 유전하길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선반가>를 제외하면, <쌍벽가>는 내방가사의 효시로 볼 수 있는데, 초기의 가사답지 않게 단어를 정확하게 부려 쓸 뿐만 아니라, 문장을 유려하게 구사한 수작으로 꼽힌다. 먼져 오신 우리 쥬군 계와셔 긔다리네 (먼저 오신 우리 남편 거기 와서 기다리니) 이제야 사랏고나 신효셕집 지휘여 (이제야 살았구나, 신효석이 안내하여)억평덕정 차자가니 가옥이 졍벽하고 (얼펑덜펑 찾아가니, 가옥이 정벽하고)공괘간 훌융한데 일쥬야를 계셔쉬고 (공개간 훌륭한데, 일주야를 거기서 쉬고)압녹강을 건너셔니 쳘셕간쟝 아니어든 (압록강은 건너서니, 철석 같은 간장肝腸 아니어도)감챵지회 업슬손가 고국을 회슈하긔 (가슴 아픈 회포가 없을손가. 고국을 회상하니)기회가 아득하여 가삼의 박히여라 (그 회포가 아득하여 가슴에 박히는구나.) -<쌍벽가> 일부 석주 이상룡 선생의 부인 김우락 여사가 간도에서 잠시 머물며 느낀 회한을 노래한 내방가사, <해도교거사海島僑居辭>이다. 1911년 만주 망명지에서 쓴 이 가사는 안동에서 추풍령을 넘어 압록강을 건너는 망명 경로와 만주 영춘원에 이르는 정착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소개한 부분은 먼저 출발한 남편 이상룡을 신의주에서 만나고 신효석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일주일을 쉬고 압록강을 건널 때의 참담하고 슬픈 감회를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내방가사에 이처럼 일제에 강점당한 민족의 위기와 사회적 변혁을 고스란히 담은 작품들이 많다. 이런 종류의 내방가사로 가일마을의 김우모 여사가 쓴 <눈물 뿌린 이별가>도 관심을 끈다.서럽도다. 서럽도다. 망국 백성 서럽도다아무리 살려해도 살 수가 바이 없네 <중략>고국을 떠나가니 그 심사 어떠하리.백발노인 두 노인도 그중에 끼었구나.짧은 막대 내던지고 두 손을 서로 잡고간다 간다 나는 간다. 그 어디로 가는 길인고 -<눈물 뿌린 이별가> 일부 망명길에 오르는 한 여인의 처창悽愴한 마음을 4음보 리듬에 실어 읊고 있다. 이 가사는 1920년대 신간회 안동지회와 안동청년동맹에 참가해 항일 투쟁을 벌이다가 1940년 만주 유하현 삼원포로 망명하는 아들, 권오헌을 따라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고향을 떠나는 마음을 노래한 작품이다. 먼저 떠난 아들을 따라가야 한다는 어머니의 결연한 의지와 함께 독립을 위해 가일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는 아쉬운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대목마다 스민 의지와 한 서린 가락이 그저 읽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이국땅 만주벌에서 오로지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지아비를, 아들을 뒷바라지한 여인들의 삶의 무게도 그 자아비에, 그 아들에 못지않을 것이다. 망명의 땅에서 풍찬노숙하며 여인으로서 감당해야 했던 고통은 그 얼마일까. 자신이 겪은 삶의 내력을 남기고자 한 그 마음 또한 얼마나 강했을까. 그 혹독한 환경 속에서 혼을 갈아 한 자 한 자 얽어낸 가사는 한 사람의 삶의 자취를 넘어, 당대의 귀중한 역사의 기록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내방가사는 어느 문화유산에 못잖은 가치를 지닌다. 이는 내방가사를 오롯하게 계승하고, 보존해야 할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내방가사는 영조 이후에 영남지방의 여성 문학으로 정착하면서 여염집에서도 가사 두루마리를 간직해서 누릴 정도였다. 양반댁 여성들은 스스로 가사를 써서 서로 돌려가며 읽기도 하고, 출가하는 딸의 혼수에 넣어주기도 하였다. 한글은 여성들의 언어로 크게 쓰였고, 여성들은 그 한글을 통해 지식을 쌓고 뜻을 드러냈다. 한글을 통한 ‘글 하기’는 규방을 넘었고, 담장을 넘었으며, 여성들의 고유한 놀이가 되었다. 여성들은 가사를 짓고 베끼면서 만났으며, 한글을 자신들의 언어로 만들었다. 이로써 한글은 민족어로서의 위상을 확실하게 높였다. 여성 문학의 중심을 이루던 내방가사의 위상이 해방을 맞으면서 차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위어가던 위기에서 가사의 불씨가 살아나는 기회를 얻었다. 안동내방가사보존회의 창립이 그것이다. 안동내방가사보존회의 이선자 회장을 비롯하여 뜻 있는 이들이 모여, 1997년에 본 보존회를 창립한 것이다. 이의 창립으로 꺼져가던 내방가사는 불씨를 다시 살려냈다. 보존회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가사를 창작하고, 경창하면서 자신의 기량을 높여갈 뿐 아니라, 내방가사 전파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안동내방가사보존회가 결성된 지도 20여 년이 훌쩍 넘었다. 결성 이후, 보존회는 내방가사 창작과 연구·수집, 경창 시연 활동을 통해 내방가사 보전・전승에 힘써 왔다. 그리고 매년 전국내방가사경창대회를 개최함으로써 내방가사 창작자와 경창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한편 창작자들의 작품을 모아 『영남의 내방가사』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영남산은 청룡되고 학가산은 백호로다 명승지가 여기로다 가져간 색색식물 석상위에 높이차려 하나님과 신령님계 차례로 제사하고 유류이 모여앉아 옥잔에 술을부어 취토록 서로권코 꽂꺾어 손에들고 꽃싸움 하여보고 춘흥를 못이겨서 화전가로 화답하고 때좋다 벗님네야 삼춘가절 돌아왔네뜰앞에 매화꽃은 춘설속에 피어나고개나리 진달래는 봄빛을 재촉한다. 강남갔던 쌍제비는 옛집을 찾아온다규중심처 예다회원 춘흥을 외면할까화전놀이 가자하며 이구동성 극성이라 두 작품 다 현대에 지은 <화전가>의 일부이다. 앞의 가사는 작품 하반부의 일부를 뽑았고, 뒤의 가사는 들머리를 발췌한 것이다. 두 작품 모두 한자어를 많이 쓴 가운데 3・4, 4・4의 리듬을 취하는 반면, 음보는 서로 다르다. 전자는 4음보의 기본 율격을 일부 벗어나 6음보로 늘어남으로써 변격을 밟는데, 후자는 4음보 리듬을 정확하게 따르고 있다. 내용은 두 작품이 모두 전래하는 <화전가>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각자 나름의 감성과 기량을 선보인 작품들이다. <시부가>, <안동자랑가>, <숭례문탄식가>, <여름휴가가> 등에서 보여주듯이 작가들은 소재의 폭을 확장하는 수준에까지 이른 것이다. 내방가사는 조선 중기 이후 주로 영남지방의 여성들에 의해 창작되고 향유되던 것으로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기 힘든 여성 문학이다. 초기에는 유교적 가치관 전파를 목적으로 시작하였지만, 이후 다양한 소재와 정제된 운율을 갖춘 형식으로 발전했으며, 개항 이후에는 민족적 가치와 외세에 대한 저항 의식을 담아내기도 하였다. 특히 유교 문화에 젖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에 의해 민족 언어인 ‘한글’을 활용하여 자신 삶과 애환을 드러낸 독특한 문학 형식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내방가사를 가치 있는 기록물로 평가하고 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직접 붓을 잡고 모국어인 한글을 활용해서 삶의 심층부에 깔린 것을 불러내어 표현한 문학이란 점에서 내방가사는 가치 있는 기록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에 따라 당국에서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해 여러 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내방가사는 피억압자의 위치에 있던 여성이 기록의 새로운 주체가 됨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나아가 문학의 영역을 확장한 것에서나 여성들의 외적 삶은 물론 내면 의식까지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내방가사의 존재 가치는 적지 않다.
글 = 이동백 작가 사진 = 강병두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