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의 삶을 대변하는 별신굿과 탈놀이낙동강을 끼고 있는 세계유산 하회마을은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문화마을이자 세계로부터 인정받은 우수한 문화마을이라 할 수 있다. 하회마을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세계 어느 전통마을과 견주어 봐도 손색이 없는 비교우위의 문화적 전통이 온전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문화의 전통과 민속문화의 전통이 함께 공존하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즉 반촌으로서 유교문화의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어 영남 남인의 맥을 이으면서 선유줄불놀이 등 독창적인 풍류문화를 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초들이 전승하는 별신굿 또한 다른 마을과 구별되는 문화적 특징으로서 독창성을 지닌다. 하회마을은 역사가 깊은 전통마을로 인정되어 1979년 1월 23일에 양동마을 등과 함께 마을 내 민가건축이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되었고, 1980년 경상북도 지방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1984년 1월 10일에 중요민속자료로 승격되면서 민속마을로 자리잡았다. 현재는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마을 입구 하회별신굿탈놀이 보존회 공연장에서 매주 상설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한 마을에 함께 살아온 양반과 상민들이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면서 마을공동체의 문화를 만들어온 결과라 할 수 있다. 하회마을은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으로 행세해 왔다. 「영남(嶺南)의 향약(鄕約)」(경상북도, 1994)에 수록된 16세기에 쓰여진 동안(洞案)과 동원록(洞員錄)을 통해 하회마을이 류씨들과 함께 허씨와 안씨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는 이성집단거주의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향언(鄕諺)은 고려시대의 절터와 즐비하게 밀집한 기와집들과 상응하여,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허씨가 정주하고, 그 뒤 안씨, 그리고 조선왕조 초기에는 류씨의 동성마을이 이뤄진 것을 알려준다. 류씨는 원래 인근 지역 풍산에 대대로 살아오던 호장(戶長)이었는데, 고려 말엽에 하회로 이주하여 안씨, 권씨 등과 인척 관계를 맺고서[안씨, 권씨가 류씨의 외손이라고 한다] 안씨 문중이 쇠미해진 틈을 이용하여 지배세력으로 성장해왔다고 한다. 하회마을은 낙동강 물줄기가 부용대의 높은 절벽과 한없이 넓은 백사장을 끼면서 마을의 동북, 남을 돌아 흐르는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의 절경 속에 “물에 뜬 연꽃[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처럼 자리한 ‘길 끝에 고립된’ 마을이다. 길 끝의 마을이자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터였기에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큰 변란없이 전통적인 문화를 잘 보존해올 수 있었다고 전한다. 태백산맥 줄기의 하나인 일월산의 지맥이 남서쪽으로 뻗어내려 낙동강과 만나면서 머물러버린 곳에 하회의 주산인 화산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 화산의 기운이 나지막한 능선을 이루며 뻗어 내린 곳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어서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도 천하제일의 길지로 손꼽을 만큼 이름난 명당이다. 제의(굿)와 놀이가 축제로 승화된 별신굿탈놀이하회별신굿탈놀이의 유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전승되고 있다. “하회마을에 사는 허도령은 어느 날 꿈에 서낭신의 계시를 받고 탈을 만들기 시작했다. 탈을 만드는 곳에는 다른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도록 금줄을 치고, 매일 목욕 재계하며 지극 정성을 들여 탈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 허도령을 몹시 사모하던 김씨 처녀가 그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허도령의 얼굴을 보고 싶어 금기를 깨고 금줄을 넘어 탈막 안을 엿보았다. 입신 지경에서 탈을 깎던 허도령은 그 길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그런 까닭에 마지막으로 깎던 이매탈은 마무리를 못 하여 턱이 없는 탈이 되었다. 허도령이 죽자 처녀도 번민하다 따라 죽었다. 마을에서는 김씨 처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화산의 상당에 서낭신으로 모시고, 허도령의 영혼은 큰 고개 성황당에 모셔 해마다 제를 올린다.” 이와 다른 유래전설로, 어느날 마을주민이 낙동강으로 떠내려온 궤를 발견해서 열어보니 그 속에 탈이 있었고 신의 현몽을 받아 별신굿탈놀이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담론도 전하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는 소위 동고사, 동제, 당고사 등으로 일컬어지는 정월 대보름 마을굿을 3년, 7년, 10년마다 또는 서낭신의 신탁이 있을 때 마을의 안녕을 비는 부정기적인 ‘특별한 굿’이라 할 수 있다. 별신굿은 매년 치르는 당고사보다 경제적, 놀이적 규모가 훨씬 커 무당을 초빙하고 탈놀이를 하는 등 주술적 놀이적 성격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며, 특히 탈놀이는 제의의 일부로 서낭신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한 행사였다. 마을 외부로부터 무당을 불러와서 별신굿을 맡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 스스로 광대가 되어 별신굿을 주도하고 탈놀이를 전승해온 것이다. 하회별신굿의 한 연희형태인 ‘하회별신굿탈놀이’는 하회탈이 국보 제 1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탈이라 할 수 있다. 탈은 원래 13종 14점이지만 3점(총각, 떡달이, 별채)이 분실되어 현재 10종 11점이 남아 전해진다. 하회별신굿탈놀이의 내용은 ‘무동마당(각시가 무동을 타고 등장한다.) → 주지마당(주지 한 쌍이 잡귀를 쫓는 춤을 추어 탈판을 정화한다.) → 백정마당(살생마당, 백정이 소를 잡아 염통과 우랑을 떼어내어 관중을 향해 사라고 권유한다.) → 할미마당(살림살이마당, 할미의 고달픈 생활을 베틀가로 풀어낸다.) → 파계승마당(고려시대 당시의 타락한 불교를 풍자하는 마당으로 파계승이 부네를 유혹하여 놀다가 초랭이에게 들키자 부네를 업고 달아난다.) → 양반선비마당(양반과 선비의 허위허식을 풍자하는 마당으로 부네를 사이에 두고 양반과 선비의 다툼을 익살스럽게 드러낸다.)’으로 구성된다. 그 외 보름날 서낭당에서 당제를 올리고 ‘혼례마당’과 ‘신방마당’을 벌인다. 별신굿은 무당의 ‘허천거리굿’으로 끝이 난다. 이렇듯 별신굿은 양반, 선비 그리고 승려들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하다. 별신굿의 광대는 전부 풍산 류씨가 아닌 다른 성씨의 사람들로 대부분 풍산 류씨에 속한 소작인이다. 이로 미루어 별신굿은 반지배계급 상민의 예술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회별신굿탈놀이는 풍산 류씨들이 대거 기금을 지원하는 등 하회마을 공동체 전체가 준비하고 실행하는 제의이자, 놀이, 축제로 자리잡아왔으며 구경온 이웃주민들로 마을전체가 꽉 들어찰 정도의 대규모 지역축제였다고 할 수 있다.반상 간의 조화와 상생의 상징적 전통문화로서 별신굿탈놀이결국 민초들의 문화를 대표하는 별신굿탈놀이는 선비들의 풍류를 대표하는 선유줄불놀이와 대비되면서 하회마을 문화에서 일정한 짝을 이루고 있다. 즉 별신굿탈놀이와 선유줄불놀이를 통해서 하회마을의 지배적 성씨인 풍산류씨와 민초들로 구성된 타성들 간의 갈등을 무화시키고 모둠살이를 이룰 수 있는 조화와 상생의 장이 마련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는 하회마을의 양반문화와 상민문화가 조화롭게 상생하는 문화적 전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마을공동체의 상징적 전통문화로서 손색이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회마을 문화의 핵심에는 ‘다양성과 조화’가 자리잡고 있다. 어느 지역의 문화보다 시대별, 계층별, 남녀별, 종교별 문화가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으며, 이들의 문화가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낙동강을 끼고 있는 강촌문화의 총체적인 모습이다. 세계유산 하회마을 문화의 가능성은 그 문화적 다양성과 조화에서 찾아야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도시로서 안동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하회마을이, 민족문화의 주체적 계승과 발전적 재창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불교, 유교, 무속 및 기독교 문화 등과 상호교류와 긴밀한 유대를 계속해서 다져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건들을 가장 온전히 갖추고 있는 하회마을의 가능성은 앞으로도 크게 열려 있다고 하겠다.
글=조정현 작가ㆍ사진=강병두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