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은 영남의 젖줄로 일컬어지곤 하는데, 이는 비유적인 표현에만 그치는 수사가 아니다. 실상 낙동강을 통해 수많은 물산과 문화가 영남에서 교류되며 인근 주민 삶의 호흡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시공간적 중심에 오일장이 자리 잡고 있다. 한반도에서 오일장이 언제부터 열리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나 『산림경제(山林經濟)』 등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장시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그 수가 증가하는 가운데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5일 간격으로 열리는 오일장이 전국적으로 일반화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오일장의 주된 기능은 경제적 허브로서 물건을 거래하거나 교환하는 것으로, 장에는 물건을 팔러 다니는 전문 장꾼들도 있었지만,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 장날이 되면 여분의 생산물을 장에 나와 팔거나 필요한 물건과 교환하기 위해 ‘장을 보는’ 이들도 많이 있었다. 오일장은 물건의 거래 및 교환뿐만 아니라, 친인척이나 친우들이 조우할 수 있는 ‘만남의 광장’이기도 했고, 시장권 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는 ‘소통의 장’이기도 했다. 현재는 수많은 매체들을 통해 쉽게 정보를 얻지만 과거 이러한 매체들이 없었을 때에는 시장이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또한 오일장은 해당 지역에서 전승되어온 줄당기기, 동채싸움 등 대동놀이가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였고, 간혹 놀이패가 모여들어 공연을 펼치기도 하는 예술과 문화의 장이기도 하였으며, 별신굿, 대동굿 등이 벌어지는 신성한 제의의 시공간이기도 하였다. 낙동강을 끼고 있는 오일장의 전통 낙동강을 품고 있는 안동지역에도 일찍이 오일장이 성행했는데, 『영가지』에 따르면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는 부내장, 미질장, 옹천장, 편항장, 신당장, 산하리장, 귀미장, 풍산장, 내성장, 장동장, 재산장 등 11개의 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중 부내장은 안동부의 성 안 객사 앞에 있었으며 2일과 7일에, 미질장은 임북에 있었으며 1일과 6일에, 옹천장은 안동부의 북쪽에 있었으며 3일과 9일에 장이 섰다고 한다. 편항장은 임동에 있었고 5일과 10일에, 신당장은 임서에 있었으며 4일과 9일에, 산하리장은 길안현에 있었고 5일과 10일에, 귀미장은 일직현에 있었으며 6일과 10일에, 풍산장은 2일과 7일에, 내성장은 7일에, 장동장은 춘양현에 있었으며 6일에, 재산장은 5일과 10일에 각각 장이 섰다고 한다. 1909년에 이르러 2·7일에 개장하는 부내장이 큰 시장으로 번성하여 농산물, 소, 생선, 그리고 특산물인 안동포와 안동소주 등이 활발히 거래되었다. 안동 부내장이 활성화되면서 풍산의 오일장은 3·8일로 변경되었다. 1963년 안동읍이 안동시로 승격되면서 부내장과 신당장은 상설시장으로 변화되어 갔으나 1995년 통합 안동시가 출범한 이후 현재, 안동 지역에는 여전히 신시장, 풍산장, 구담장, 중리장, 운산장, 길안장, 송사장, 원천장, 녹전장, 서부장, 옹천장 등의 오일장이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이들 전통 재래시장들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유지되어 안동 지역의 여러 곳에서 정기적으로 열렸으나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상당수 사라졌다. 현재는 중앙신시장, 구시장, 서부시장, 용상시장, 북문시장 등이 안동 지역의 주요 전통시장권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풍산장은 현재까지도 안동 지역 오일장의 전통을 잘 이어오고 있는 장이다. 특히 풍산장의 인근에는 양반마을로 유명한 하회마을이 있으며 이 하회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풍산류씨 종가가 예로부터 기제사나 불천위 제사 등의 제물을 마련하기 위해 풍산장을 많이 이용하였다. 또한 전통적으로 풍산장에서는 ‘갱변장’이라고 해서 기우제의 일환으로 시장을 강변쪽으로 옮기기도 하는 이색적인 민속이 전승되었다. 교통이 편리해져 안동까지 나가서 장을 보는 사람의 수가 상대적으로 늘어나면서 장세가 줄어들고는 있지만 풍산장을 이용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은 편이며, 주로 다른 장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탕건, 교의, 향로, 향합, 제기와 같은 제사용품이 많이 거래되고 있다. 또한 한우불고기축제와 같은 행사를 여는 등 약화되는 장세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도 시도하고 있다.소금배와 나룻배가 건네주는 오일장의 활기 낙동강을 끼고 있는 풍산장과 예천장 사이에는 조선시대까지 장이 없었고 풍천지역에 오일장이 설 필요가 있었다. 구담은 풍천면에서 육로와 수로가 만나는 지리적 요충지로서 그러한 입지를 잘 갖추고 있었다. 안동과 예천을 잇는 도로가 구담을 지날 뿐만 아니라,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배나들이 있어서 육로와 수로가 십자로 만나는 지점인 셈이다. 따라서 낙동강 소금배가 여기 배나들에서 정박했고 나그네를 위한 주막집도 한두 집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배나들과 강가의 주막집을 중심으로 시장 기능을 띠기 시작했다. 원래 구담장은 지금 자리가 아니라 배나들 근처인 강가여서 사실상 마을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형성되었다. 지금처럼 마을 앞에 장이 서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이다. 배나들의 오일장이 자연스러운 입지에 따라 형성된 것이라면, 장터가 형성된 1970년대 이후의 오일장은 전통적인 농업사회가 해체되고 산업사회로 진입한 역사적 발전과정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때는 이미 반촌마을의 성격도 바뀌고 전통적인 가치관도 약화되어 시장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약화된 시기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현재 배나들의 공간적 위치는 마을 앞 도로부터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곳까지다. 배나들의 공간 중에서도 안골과 인접한 곳은 광산 김씨들이 정착하여 세거해온 곳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마을과 강 사이에 도로가 지나지만 1970년대 초반까지 강 언덕 또는 모래사장이었다. 그 당시 강 언덕 아래 나루터 모래사장에서 시장이 열렸다. 이후 1970년대 초에 마을 안쪽으로 논을 매워 장터를 정비하고 시장을 옮기게 되었으며, 1970년대 후반에 나루터의 모래사장을 매우고 제방과 도로가 건설되었다. 구담에 시장이 형성 된 것은 구담이 교통의 요지이면서, 배를 델 수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배는 2척으로 각기 크기가 달랐다. 큰 배에는 150~200명까지 사람을 태웠으며, 작은 배에는 40~50명의 사람을 태웠다. 뱃사공은 총 8명이 있었으며,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는 회의를 통해 각 배의 뱃사공 중 대표를 선출하였다. 강이 얼어 배를 운영할 수 없는 겨울에는 마을에서 섶다리를 놓아 사람들이 강을 건너다닐 수 있게 하였다. 섶다리의 건설은 모두 주민들의 부역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 다리는 나루터가 있는 곳에 설치하였다. 특히 소를 거래하는 가축시장은 나루터를 중심으로 좌우에 길게 시장이 늘어섰으며, 다른 물건을 파는 장은 가축시장보다 조금 더 마을 안쪽으로 가깝게 형성되었다. 또한 마을에서 씨름 대회나 윷놀이 등을 할 때에도 이 백사장을 이용하였다. 현대사회 오일장의 다양한 기능 변화 현대 산업화 사회로 넘어오면서 낙동강 주변의 오일장은 더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며 고되고 지난한 인근 주민 삶의 지원군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각 시군 중심지의 오일장과 상설장은 향토관광자원으로 각광받으며 수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또한 풍산장, 길안장, 구담장 등은 인근지역에서 환금성이 높은 대규모 특용작품이나 과수 재배가 이루어지면서 더욱 그 기능이 강화된 사례이다. 오일장이 서는 장터로부터 각종 인력, 음식, 농자재, 음료 등을 원활하게 공급받고 있는 것이다. 외곽 농촌지역 주민들에게 각 지역의 오일장은 단순히 재화를 교환하는 장소가 아니라 문화와 여가를 향유할 수 있는 시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노년층에게 있어서 오일장은 일상적인 삶에 활력의 리듬을 부여하는 특별한 시공간이며, 이러한 성격은 오일장의 먹거리, 주변의 볼거리, 그리고 최근 많은 노년층이들이 즐겨 찾는 한의원에서도 발견된다. 1-2천원 정도의 돈이면 침과 뜸, 원적외선 치료 등 다양한 의료서비스를 받고 약봉지까지 챙겨들고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낙동강 주변의 안동장, 풍산장, 구담장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랜 세월 낙동강은 사람들에게 터를 내주어 문화를 이루며 살아가게 했다. 작은 터에는 작은 마을을 허락했고, 넓은 터에는 큰 마을을 이루어 물산의 집산과 교환을 도왔다. 일테면 안동, 풍산, 수몰 전의 예안과 같은 큰 마을에는 장시를 열게 한 것이 그 예이다. 그러는 가운데 마을과 시장의 문화가 형성되며 일정한 권역의 주민 삶을 더욱 풍요롭고 넉넉하게 만들어왔던 것이다.                                                                                                                                                                                                              글: 글=조정현 작가ㆍ사진=강병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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