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매일신문=박동수기자]낙강으로도 불리어온 낙동강은 강원도 함백산에서 발원하여 521.5㎞를 흘러 남해로 합류하는 영남지역의 젖줄과 같은 물길이다. 낙동강은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남지역의 역사와 문화 형성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낙동강을 품고 있는 안동 인근지역에서의 선유는 안동을 찾는 유가적 풍류묵객에게 있어서 최고의 손님접대 양식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낙동강 줄기 중 안동 권역에 속하는 선유의 대표적 포인트는 청량산으로부터 이어지는 도산구곡권, 임하댐이 자리하고 있는 임동 지역의 도연폭포로부터 이어지는 임하구곡권, 그리고 하회를 중심으로 한 권역 등이라 할 수 있다. 낙동강의 유장한 물결과 주변경관을 기반으로 불꽃놀이와 조화를 이루며 향유되어온 선유줄불놀이는 선비들의 놀이문화, 즉 선비들 간의 교유 방식 중 최고의 백미로 꼽힐 정도로 선비의 풍류를 대표하는 유가적 전통이다.선유와 불꽃놀이가 결합한 선유줄불놀이 특히 안동 하회마을에서의 선유가 줄불놀이와 결합된 방식의 놀이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이색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이는 강촌문화가 빚어낸 산물이기도 하거니와 안동문화가 가꾸어온 창조적 방식의 문화 수용과 재창조의 양상을 잘 드러낸다. 또한 선유를 즐기는 선비들만의 문화가 아닌 그것을 바라보는 민초들을 배려한 문화적 전통의 결과물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하회마을은 풍산류씨의 세거지로서 낙동강을 기반으로 한 빼어난 자연환경과 인문 전통을 갖추고 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다양한 유무형의 문화 가운데 선유줄불놀이는 양반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선유줄불놀이는 하회마을 안에서도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만송정과 부용대, 겸암정과 옥연정, 그리고 낙동강 지류인 화천을 배경으로 벌어진다. 하회마을에 전해온 선유줄불놀이는 매년 7월 기망(旣望)에 정례적으로 행해져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뱃놀이와 불꽃놀이, 그리고 달걀불과 낙화가 어우러진 선상의 시회(詩會)이자 교유의 장이었던 셈이다. 선유줄불놀이는 화천을 향해 깎아지른 듯 서 있는 부용대와 마을 비보숲인 만송정 쑤 사이에 줄을 거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된다. 길이가 약 600미터에 이르는 튼튼한 새끼줄을 만들어 만송정과 부용대 사이를 두 줄로 연결하는 것이다. 불꽃놀이의 핵심을 이루는 줄불의 재료는 뽕나무 숯이다. 뽕나무 숯을 한지로 감싸서 긴 모양의 봉지 형태로 수 백 개를 제작하여 새끼줄에 매달아 불을 붙이고, 부용대와 만송정 사이에 연결한 새끼줄을 움직여 그 불꽃이 천천히 화천을 뒤덮으며 떨어지도록 연출한다. 이것이 바로 선유의 공중을 장식하는 ‘줄불’이다. 다음으로 배 주변 강물에는 달걀 껍질이나 박 바가지에 기름을 넣고 심지를 박아 제작하는 ‘연화(蓮火, 달걀불)’가 있다. 불을 붙이고 겸암정 위쪽 상류에서 띄워보냄으로써 은은한 불빛이 선유하는 배 주변으로 유유하게 흘러가게 한다. 마지막으로 부용대 절벽 위에서 불붙인 ‘솟갑단(소나무 잔가지 묶음)’을 수직으로 떨어뜨리는 ‘낙화’가 있다. 선유줄불놀이의 절정이자 가장 강렬한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장관이다. 뱃놀이에서는 기녀들이 술시중을 들고 가무로 흥을 돋우면 선비들이 주어진 시제에 따라 다투어 시를 짓고 차례로 읊거나 기녀에게 시를 읊조리게도 하는데, 배 위에서 시를 지어 완성하고 읊조리고 나면 그 여흥에 취해 부용대를 향해 ‘낙화야!’ 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부용대 정상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이 마른 솟갑단에 불을 붙여서 절벽 아래로 던지고, 수직으로 떨어진 불덩이가 바위에 부딪히며 큰 불꽃들로 휘날리게 되는 것이다. 줄불이 강물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는 완만하고 정적인 가로선의 불꽃놀이라면, 낙화는 절벽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공중의 줄불과 강물 위의 연화를 잇는 급격하고 역동적인 세로선의 불꽃놀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선유줄불놀이에서는 여러 시선과 감정이 교차하게 된다. 배를 타고 시를 읊으며 선유를 즐기는 선비의 시선과 감성, 낙동강 양편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과 감동, 또한 눈처럼 쏟아지는 불비를 맞으며 선유를 즐기는 선비들과 양편의 구경꾼들을 함께 조망하는 만송정 백사장에 자리한 사람들의 시야와 정서는 결국 선유줄불놀이를 구성하는 핵심적 시선이자 감정인 셈이다. 근대 이후 선유줄불놀이는 1910~20년대쯤 두세 번에 걸쳐 놀이가 벌어졌고 해방 이후 1948년, 그리고 1968년 안동민속축제의 전신인 안동풍년제에서 선유줄불놀이를 재현했다. 그 뒤 1974년, 1981년, 1990년의 재현 행사를 거치면서 현재의 선유줄불놀이가 연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매년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이 개최될 때 2번의 주말을 이용해서 선유줄불놀이를 시연하고 있다. 선비와 민초의 상부상조로 완성된 별신굿탈놀이와 선유줄불놀이더불어 중요하게 살펴볼 측면은 선유줄불놀이가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짝을 이루며 마을사회의 안정과 통합을 유지하는 데 일정한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선유줄불놀이는 마을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상하층이 협력해서 이룬 놀이로서 상층의 미적 문화적 취향이 중요하게 반영됨과 동시에 하층의 노동력이 생산해낸 ‘상부상조’의 놀이문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도 조그만 축제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필요하다. 선유줄불놀이 역시 줄불을 제작하기 위해 튼튼한 동아줄을 600m 이상 길게 꼬고, 수 백 개의 숯가루 봉지를 만드는 일은 민초들이 오랫동안 준비해야 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연화(달걀불)을 준비하여 물 위에 띄우는 일이나, 부용대 위에 올라가 위험을 무릅쓰고 낙화불을 던지는 일도 모두 민초들의 노력 봉사로 이루어진다. 민초들이 별신굿탈놀이를 벌일 때 선비들이 경제적으로 후원을 하듯이, 선비들이 선유줄불놀이를 할 때는 민초들이 나서서 봉사하는 방식이다. 결국 선비들의 풍류를 대표하는 선유줄불놀이와 민초들의 문화를 대표하는 별신굿탈놀이는 일정한 짝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즉 별신굿탈놀이와 선유줄불놀이를 통해서 하회마을의 지배적 성씨인 풍산류씨와 민초들로 구성된 타성들 간의 갈등을 무화시키고 모둠살이를 이룰 수 있는 상생의 장이 마련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선유줄불놀이는 하회마을의 문화가 복합적으로 집약된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마을의 우수한 문화로서 손색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나루터 뱃사공이 부르던 뱃노래도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지만, 그것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일도 안타깝다.                                                                                                                                       글: 조정현 작가 사진: 강병두 사진작가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 제보하기
[메일] jebo@ksmnews.co.kr
[카카오톡] 경상매일신문 채널 검색, 채널 추가
유튜브에서 경상매일방송 채널을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