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두한 작가ㆍ사진=강병두 작가]
물이 태극형으로 도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 하회마을은 산과 물이 곱고 경치가 빼어나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살기 좋은 냇가 마을로 손꼽았다. 이 마을의 충효당(보물 제414호) 뜰에 있는 대나무의 잎을 보고 나서 눈을 감으면 거기서 이는 맑은 바람과 시원한 그늘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리고 그러한 바람과 그늘이 있는 서쪽 언덕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맑은(淸) 바람과 시원한 그늘(陰)은 ‘청음(淸陰)’이란 호를, 서쪽(西) 언덕(厓)은 ‘서애(西厓)’라는 호를 생각나게 한다. 청음은 김상헌(1570~1652), 서애는 유성룡(1542~1607)의 호다. 전자는 병자호란, 후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인물이다. 둘의 공통점은 외세가 끝내 정복할 수 없었던 ‘겨레의 불굴의 혼’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애 종택인 충효당의 댓잎에서 청음이란 호가 생각나게 된 것은 아마 무의식 속에 이러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청음이란 호가 먼저 생각났으니, 생각이 흐르는 대로 청음에 대한 얘기부터 먼저 해본다. 청음의 손자인 곡운 김수증(1624~1701)은 화산기라는 글을 남겼는데, 거기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저녁에 소산에 도착해서 곧바로 삼구정에 갔다. 정자 앞에는 교목 한 그루가 있었다. 세 개의 거북돌은 우뚝하지만 오래된 소나무는 거의 다 꺾이었다. 곧장 옛날 지내던 집으로 들어가니, 나무가 썩고 기울어 거의 지탱할 수 없었다. 동쪽 각 몇 칸은 서윤 선조께서 독서하셨던 곳인데, 우리 형제가 이곳에서 책을 읽었다. 작은 방은 할아버지께서 거처하셨던 곳인데, 지금은 하인이 지키며 살고 있었다. 방과 뜨락은 황폐해져 발붙일 곳도 없었다. 집 오른쪽에는 우물이 있으며, 우물가에는 대추나무 한 그루가 옛날 그대로 있었다.” 이 글 속에는 소산마을이 있고, 그 마을에는 ‘옛날 지내던 집’이 있다. 그 집엔 ‘작은 방’이 있고, 거기서 ‘할아버지’께서 거처하셨다. 여기서의 ‘할아버지’는 청음이고 ‘옛날 지내던 집’은 원래 청음의 증조부인 김번이 관직에서 은퇴하여 여생을 보낸 곳인데, 청음이 기존건물을 누각식으로 중건하고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이름 지은 것이다. 이 집은 17세기라는 시대성과 향촌사회 유력가문이라는 계층성이 반영된 건축 형태를 보이고 있음과 동시에 청음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강직한 성품이 조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어 2019년 12월 30일 보물 제2050호로 지정되었다. 연보에 의하면 청음은 두 차례에 걸쳐 총 7년 동안 안동에 머물렀다. 첫 번째는 1618년 2월 부친상을 당하고 부인과 함께 낙향하여 1621년 봄 양주 석실로 돌아갈 때까지의 만 3년간이다. 두 번째는 병자호란 당시 예조판서로서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가 척화를 주장하다가 최명길이 “조선국왕은 대청국 인성황제에게 말씀 올리나이다.”로 시작하는 항복문서를 쓰기에 이르자 그것을 빼앗아 갈기갈기 찢는 등 화친을 극력 반대하였음에도 끝내 항복이 정해지매 6일간 단식 후 스스로 목매어 목숨까지 끊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37년 2월 7일 남한산성의 동문을 나와 안동 서미로 내려왔다가 곧 소산으로 거처를 옮긴 뒤 1640년 11월, 명나라를 치는 데 군사를 보내라는 청의 요청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하여 청나라 심양에 끌려갈 때(이때 지은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는 너무나 유명하여 상술을 생략한다.)까지의 약 4년간이다. 안동에 머무는 동안 청음은 금산촌(金山村)이란 지명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느낌이 들어 온당치 못하다며 소산촌(素山村)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으며, 시조 산소 찾기와 제례정비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서미와 소산 두 곳에서 강학을 하였는데, 손자 김수증(당시 14세) · 김수흥(당시 12세) · 김수항(9세)과 삼종질 김진원 · 김희진 등 일족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배움을 구하여 모여들었다. 이들 가운데서 손자 셋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김수증은 공조참판, 김수흥과 김수항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김진원은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개성경력을 지냈고 전적으로 있을 때 심기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이 있어 영국원종공신 일등에 책록되었다. 그는 삼구정에 올라 풍산들을 바라보며 시를 짓곤 하였는데, 〈삼구정팔경〉은 그 중의 하나다. 그가 노래한 삼구정 팔경은 학가산의 비갠 봉우리(鶴嶠晴峯), 마애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馬崖峭壁), 현리의 자욱한 꽃(縣里烟花), 역동의 겨울 소나무(驛洞寒松), 넓은 들판 가득 누렇게 익어가는 벼의 모습(長郊觀稼), 굽이도는 물가에서 고기잡이하는 풍경(曲渚打魚), 삼복더위의 피서(三伏避暑), 한가위에 바라보는 달(中秋翫月) 등이다. 그는 청에 대한 조선의 굴욕적인 항복에 대한 회한의 정을 씻을 수 없어, “나라는 다 깨진 뒤 몸만 남쪽으로 내려와/ 사람 만나 당시 일 말하려니 부끄럽기 한이 없네./ 사립문에 기대어 새로 뜬 달 바라보노니/ 산중에 있는 이 늙은이의 마음을 그 누가 알랴.”라는 시를 이 시기에 짓기도 하였다. 1640년 심양으로 압송되었다가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한 뒤 석실로 낙향하여 은거한 그는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는 추앙을 받았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효종의 묘정에 종묘 배향되었다. 저서​에 《야인담록(野人談錄)》 《독례수초(讀禮隨)》 《남사록(南錄)》 《청음전집》 40권 등이 있다.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북학파 실학자인 이덕무는 조선에서 제일가는 인물로 덕으로는 퇴계 이황, 전략으로는 충무공 이순신, 절의로는 청음 김상헌을 꼽았다. 이 가운데서 절의의 표상인 청음 김상헌은 청 태종이 끝내 정복하지 못한, 조선의 마지막 영토였다. 그 굴하지 않는 혼은 외세의 끊임없는 바람에 부대끼는 겨레의 마음속에서 민족자존의 올곧은 대나무가 되어 영원히 푸르게 살아 있을 것이다.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극복한 명재상으로, 국보 징비록의 저자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러한 그와 관련된 다음의 일화는 멸망의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려는 조선을 붙잡은 역사적 사실이자 그의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서애의 나이 51세가 되던 1592년 4월에 일본 군사가 대거 조선에 침입하자 조정에서는 이일, 신립 등 여러 장수를 남쪽으로 파견하여 방어케 하였다. 그러나 신립의 충주 패전으로 도성이 위태로워지자 신하들은 왕인 선조를 모시고 북으로 피란하기로 결정하고 서울을 떠나 개성으로 향했다. 5월 1일 개성에서 난국 타개를 위한 조정 회의가 열렸는데, 신하들은 한결같이 명나라에 빌붙거나 함경도로 피란을 하자고 주장했다. 이때 서애는 “임금께서 우리 땅을 단 일보라도 떠나신다면 조선 땅은 우리 것이 안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끝까지 우리 국토를 지키면서 의병의 궐기를 촉진시켜 왜를 몰아내자고 역설하였다. 그 뒤 선조는 압록강 근처로까지 몽진하였는데 그때 명나라로 망명을 할까 말까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에도 유성룡은 “임금께서 우리 땅을 단 일보라도 떠나신다면 조선 땅은 우리 것이 안 될 것입니다.”라는, 마음속 깊이 있는 말을 절실하게 하였으리라. 전란의 체험을 읊은 그의 장편 고시인 〈감사(感事)〉에서 그는 그때의 일을 “압록강 맑은 물 두루미 날갯짓처럼 넘실거리고(鴨水淸彌彌)/ 요동의 산 눈에 또렷했네(遼山明刮目)/ 그 때의 심한 낭패감(當時狼狽甚)/ 차마 말하기 어려운 일이었네(事有不忍說)”라고 읊었다. 어가가 서울로 동아온 뒤인 1593년 10월에 그는 영의정이 되었고, 그에게는 전란 수습의 큰 임무가 주어졌다. 그는 관서도체찰사·호서호남영남의 삼도 도체찰사의 임무를 겸하여 띠고 외교·군무·민정 등에 걸쳐 종횡무진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며 국난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1598년 11월 19일, 마침내 칠 년간의 왜란이 종식되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기도 한 이 날,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에 대하여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그는 영의정에서 파직되고 모든 관직이 삭탈되어 낙향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직책을 내려 불렀지만 매번 상소문을 올려 사양하고 다시는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낙향 후 그는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면서 저술 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가 남긴 저서에는 《초본징비록(草本懲毖錄)》, 《서애집(西厓集)》, 《난후잡록(亂後雜錄)》, 《진사록(辰巳錄)》, 《근폭집(芹曝集)》 등이 있다. 여기에 실린 글들을 통해 본 그의 시문은 전아청결(典雅淸潔)하고, 그의 산문은 실학파 문장의 선구자 구실을 하였다. 특히 《초본징비록(草本懲毖錄)》은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그의 학문은 퇴계의 성리학을 이었으되 그것의 규범적 가치에 매몰되지 않고 실용적 학풍을 지녀 17세기 초기 실학사상과 연결된다. 그의 학통은 안동의 병산서원·상주의 도남서원·군위의 남계서원·의성의 빙산서원·용궁의 삼강서원을 중심으로 이어졌으며, 정경세·이준·김식·김봉조 형제·김태·김윤안 형제· 장흥효·권기·홍위·이민환·정윤목·조형도·노경임·이보·조익·이형남·유진·정도응·유원지·홍호·조광벽·정영방·홍여하·유세명·유규·유종로·유심춘·유주목 등이 그의 학맥을 이었다. 그는 1605년(선조38)에 풍산군 서미동으로 이사한 다음, 이듬해에 자그마한 초당을 짓고 농환재라고 이름 지어 살다가 1607년(선조 40) 5월 6일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살아생전에 그의 제자였던 김태(1561 ~ 1609, 자는 사열이고 임진왜란 시 의병을 일으켰으며 승정원좌승지의 증직을 받았음)와 김윤안(1562 ~ 1620, 자는 이정이고 대사간을 지냈음)이 퇴도 선생 연보를 편차하기 위하여 옥연서당에 가 있었을 때 병들어 만나지 못하고 절구 네 수를 써서 보내었는데 그 중의 한 수가 떠오른다. “어스레하게 저무는 산에 구름 일고 (薄暮山雲起)/ 한밤중 물 가운데는 달도 밝구나(中宵水月明 )./ 외로운 집에 베개 높이 베고 누웠으니(一軒高桃臥)/ 많은 대나무 바람에 씻겨 깨끗도 하네(萬竹受風淸).” 그는 조선 시대 양대 전란의 하나였던 임진왜란이라는 눈보라 속 어둠을 헤쳐 온 ‘한밤중 물 가운데의 달’이었다. 후손과 문하생들이 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집인 충효당의 뜰에는 ‘바람에 씻겨 깨끗한 대나무’가 있고, 그 대나무의 잎을 보고 나서 눈을 감으면 거기서 이는 맑은 바람과 시원한 그늘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리고 그러한 바람과 그늘이 있는 서쪽 언덕이 마음속에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