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강인순 작가ㆍ사진=강병두 작가] 도산구곡의 마지막이 청량산. 산의 기운을 담아 이 골 저 골을 씻듯이 흘러내려 휘돌아 흐르는 물이 한 곳에 이르러 알프스 못지않은 감탄의 절경을 빚어내니 바로 가송협이다. 산세와 물이 어우러져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곳에 조물주는 절벽을 둘러두고 여기에 마땅히 어울리는 정자하나 두었으니 바로 고산정이다. 정자 주인은 성재 금난수이다.가송을 지난 물이 단천을 거쳐 온갖 모양새로 흘러 40여 리 아래쪽 지금의 도산서원 앞을 지나 넓디넓은 부포들을 적실 즈음 달애에 이르러 아담한 서당 하나 두었으니 월천서당이다. 월천 조목이 후학을 기르던 곳이다. 고산정이나 월천서당은 도산구곡 가운데 8곡과 2곡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퇴계 선생의 일화 속에 자주 언급되는 곳으로 주인공 두 분 모두 퇴계 선생이 아끼던 제자로서 월천 조목은 성재 금난수의 손위 처남이다. 두 사람은 여섯 살 차이의 처남 매부 지간이지만 살아온 행장을 살펴볼진대 상통하는 점이 너무나 많다. 퇴계의 애제자 월천 조목은 조선 중종 19년(1524) 예안현 월천리에서 태어났다. 지금 이곳은 안동댐으로 대부분 수몰 되고 마을 뒤쪽의 부용봉 기슭에 월천서당이 아직 남아 있어 옛 마을의 위치를 짐작케 한다. 월천리는 도산구곡에서 두 번째 곡이다. 서당이 있는 곳에서 물 건너 부포 마을이 마주보이는 절경이다.그의 자는 사경(士敬)이며 호는 월천(月川) 또는 동고산인(東皐山人), 부용산인(芙蓉山人)이라 하였고, 본관은 횡성(橫城)이다. 그의 호가 ‘월천’이 된 것도 그가 나서 자란 곳일 뿐 아니라 일생의 생활 근거지였던 이곳의 지명을 취한 것이다. 조목은 5세에 처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으며 12살이 되던 해 이미 경전을 독파했고, 15세때 퇴계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하였다. 이때 퇴계 선생은 38세로 정6품의 지위에 있었다. 당시에 퇴계 선생은 모친 박씨의 상을 당하여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월천리는 퇴계의 고향인 온계와 가까웠기 때문에 그는 이를 계기로 퇴계와의 끊임없는 교류를 계속하여 조목은 학문에 정진 수양하는 처사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조목은 명종(明宗) 7년(1552)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고,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그러나 진작부터 벼슬에 뜻이 없어 45차례에 걸쳐 재수되었으나 대부분은 부임하지 않아 40여 년 동안 실제 봉직한 기간은 봉화현감과 합천군수로 있었던 기간인 4년 남짓할 정도였다. 학문에 대한 정진의 자세는 그의 일생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21세 당시에는 풍기 군수로 재직하면서 백운동 서원을 창건한 주세붕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고 이 고을 향교에서 공부하게 된다. 이후 26세 되던 해인 1549년(명종 4년) 당시 퇴계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자 역시 찾아가서 배움을 청하고 백운동서원에 머물며 공부를 했다. 당시 이웃 고을에서 향시가 있어서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가려고 하지 않자 그 연유를 물으니 조목은 “본래 독서를 하고자 공부를 한 것이지 문장을 지으려는 게 아니었습니다.”고 했다. 이에 퇴계가 독서가 근본임을 말하자 “학문함에 독서에 전념하지 않으면 마땅히 사우(師友)와 더불어 견문을 통한 배움을 넓혀야 할 것입니다.”고 했다고 한다.29세에는 현사사라는 절에서 동문수학하던 권대기ㆍ김팔원ㆍ구봉령ㆍ금난수 등과 함께 경서강독을 위한 독서를 위한 계를 만들었다. 이때 “.우리 친구들이 바쁘게 모이고 헤어지느라 서로 강론하며 절차탁마하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제 매 계절마다 혹은 산사에서 혹은 정사처럼 조용하고 가까운 곳을 찾아서 경사(經史) 서적 중의 하나를 택해 가지고 와서 통독하기로 한다.”는 등의 규약을 정하기도 하였다하니 학문에 대한 열의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조목이 퇴계 선생의 애제자로 불리어지는 까닭은 ‘월천선생문집’이나 사제 간에 주고 받은 편지 모음인‘사문수간(師門手簡)’에 잘 나타나듯이 그가 일생동안 가진 퇴계 선생과의 남다른 숱한 학문적 교유에서 드러난다.도산서당에 유숙하면서 경학을 논하고 강론과 필사를 하였으며 퇴계 선생을 모시고 가까운 산천의 승경을 유람하기도 하고 , 심경(心經)에 대한 주자의 주석에 대한 강론을 펼치기도 했다. 이 뿐만 아니라 독조동에 청원대라는 정사를 축조하기도 하고 경전의 주석에 대한 질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40세 되던 해에 조목의 집안에 양식이 떨어졌는데 퇴계 선생이 이 소식을 들은 퇴계 선생이 양식을 부쳐왔다. 이러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하니 스승의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유는 퇴계 선생이 1570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후 조목은 스승이 남긴 학문적 유업을 더욱 현창하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안동 지역 최초의 서원인 역동서원을 창건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금난수와 더불어 서원을 지을 터를 지정했으며, ‘역동서원사적’(易東書院事蹟)을 짓고 우탁 선생을 서원에 봉안하였다. 봉화현감으로 재임 시에는 봉화향교를 옛 터에 회복 중수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난 이후 조목 역시 후학 유생들에 대한 경전을 강의 하거나 청량산을 제자들과 함께 유람하고 월천서당, 도산서원, 역동서원 곳곳에서 ‘심경’에 대한 계몽 활동을 이어나갔다.조목이 생전에 편집하고 간행하거나 서술한 주요 문집으로는‘주자대전(朱子大全)’을 초록해서 엮은 ‘주서초 (朱書抄)’와 선현들의 말씀을 가려 실은 ‘곤지잡록(困知雜錄)’을 엮고, 61세 되던 해에는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을 엮었고, 퇴계 선생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모아 8권으로 된 ‘사문수간(師門手簡)’을 엮었다. 이외에도 ‘한중잡록(閒中雜錄)’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서책을 편찬해 내면서 스승의 유업을 잇는데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뿐만 아니라 조목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동생 및 두 아들과 함께 망우당 곽재우와 합세하여 왜적을 물리치고 국난을 극복하는 데 공헌을 했다. 1594년(선조 27) 군자감 주부를 제수하자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또 선조가 의주로 몽진했다는 소식을 듣자 광현에 올라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향중인사들과 상의하여 식량과 병사를 모아 적을 토벌했는데 김해(金垓)에게 그 일을 통괄하게 했다고 한다. 당시의 의병활동 상황을 담았을 것으로 보이는 『임진왜변일기 壬辰倭變日記』 기록을 조목이 남겼다고 한다.동계 정온(桐溪 鄭蘊)은 조목의 신도비문에 “본래 벼슬에 뜻이 없어 해매다 임명하고 달마다 옮겨 40여 관직에 이르렀으나 취임한 적이 얼마 없었으며, 혹 나갔다 해도 또한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모두 여덟 번 수령에 임명되었으나, 다만 봉화ㆍ영덕ㆍ합천에만 부임하였고, 그것도 곧 버리고 돌아왔다. 늘 호문정(胡文定)의 ‘차고 덥고 주리고 배부른 것은 스스로 짐작해 알아야 한다.’는 말로 스스로 경계하여 나아가기를 어렵게 하고 물러서기를 쉽게 함이 이와 같았다.”고 하여 그의 삶에 대한 자세를 짐작할 수 있으며, “선생의 아름다움 품성은 퇴계를 만나서 완성되었고, 퇴계의 도학은 선생을 얻고서야 빛을 발하였다. 선생이 아니라면 누가 퇴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며, 퇴계가 아니라면 누가 선생의 깨달음을 간직할 수 있게 이끌어 주었겠는가!”하고 사제지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후세 사람들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달애의 월천 서당 월천서당은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이 중종(中宗) 34년(1539)에 건립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수학하던 곳이다. 현판은 퇴계 선생이 썼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목조단층 기와집으로 중앙에는 2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통간방(通間房)을 배치한 홑처마집으로 아담한 편이다. 1590년에 개수되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건물은 훨씬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기둥은 방주이며 흘림을 두고 그에 따라 벽선이 그렝이가 되었다. 어간 대청 전면의 문얼굴에는 당판문이 달렸는데, 중반과 하반에 널빤지를 끼우고 윗부분엔 넉살무늬를 구성하였다. 이는 쉽게 볼 수 없는 고형에 속한다. 대청의 좌측 방 북벽에 감실(龕室)이 고미다락처럼 구성되어 신위(神位)를 봉안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가난한 선비의 가묘 형태이다.서당 옆에는 450여 년 된 은행나무가 그 옛일을 전해주듯 우람한 자태로 서있다. 서당 뜰에 서서 앞을 내다보면 지금은 안동댐 물에 잠긴 다래 마을과 부포 마을로 건너가는 선착장이 보인다. 선착장의 북쪽으로 건너다보이는 곳이 넓은 들판과 풍광이 아름다웠다는 옛 부포 마을이 있었던 곳으로 지난 시절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하다. 지금 이곳은 안동의 선비문화순례길 중 1코스인 ‘선성현 길’의 끝이요, 2코스 ‘도산서원 길’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조목은 1606년 10월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면서 온후하고 겸양하며 독실한 실천을 지향하였다. 제자로는 김중청(金中淸)·이광윤(李光胤)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월천집(月川集)』과 『곤지잡록(困知雜錄)』이 있다. 묘소는 월천리 옛 고향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서당 뒤편 부용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조목은 퇴계 선생을 모신 도산서원 상덕사에 그 숱한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함께 배향되어 있다. 생을 마친 다음에도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는 조목의 삶에 대한 평가는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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