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강인순 작가ㆍ사진=강병두 작가]고산정 주인금난수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하고 보면 아래로는 조목의 월천 서당이 있고 위로는 청량산 가까이 고산정이 있다. 두 곳 모두 도산구곡의 절경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러나 월천 조목은 자신의 호에서 말해주듯 월천리, 다래에서 태어났고 성성재 금난수는 도산구곡중 제3곡인 오담에서 태어났다. 금난수(1530-1604)는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재(惺齋)·고산주인(孤山主人)으로 월천 조목과는 처남 매부지간이다. “금난수가 자랐던 마을 가까이 있던 부라원루 앞 강변에는 성재가 심은 소나무가 있는데, 월천은 이 솔밭을 ‘사평송’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성재는 일찍이 청계(靑溪) 김진(金璡)에게 수학하면서 김극일(金克一), 김수일(金守一), 구봉령(具鳳齡), 이국량(李國樑) 등과 교유를 맺고 서로 강론하면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의미를 터득하게 되었으며, 처남 조목과 함께 『심경(心經)』, 『주서(朱書)』, 『역학계몽(易學啓蒙)』 등의 경전을 읽고 토론하는데 정진하였다. 이후 퇴계 선생의 강의를 들으면서 유학자로서의 자질을 더욱 높여나갔다. 『심경』은 금난수가 평생 동안 가장 심복한 책으로써 이황으로부터 직접 전수를 받아 강학에 힘쓴 책이었다고 전해진다. 금난수는 손위 처남인 조목의 권유로 퇴계 선생의 제자가 되었으나 여기에 일화가 있다. 제자 되기를 몇 번이나 청했으나 퇴계 선생은 점점 쇠약해지는 신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그러나 금난수는 오랜 나날에 걸쳐 퇴계 선생을 찾았으니 마침내 허락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하에 들어간 후 성재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청량산에 들어가 독서에 골몰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아 고민을 하며 자책하는 것을 보고, 퇴계 선생은 성재를 위한 시를 지어 학문 수양에 정진할 것을 격려 했다고 한다. 성재는 1561년(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또 <성재일기>에는 같은 해 4월 남명 조식을 만난 일화를 기록해 놓았다. 1577년(선조 10) 제릉참봉을 비롯하여 몇 몇의 관직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에 은거하다가 정유재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해 성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1599년 봉화현감에 임명되었다. 문집으로 『성재집(惺齋集)』이 있는데 시, 서(書), 잡저, 부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권3에 있는 「도산서당영건기사(陶山書堂營建記事)」에는 도산서당 건립시의 전말이 상세히 기록되어 전한다. 성재의 성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글귀가 있다. 월천이 퇴계로부터 받은 편지를 가려서 책으로 묶은 ‘사문수간(師門手簡)’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월천이 37세 때, 금난수와 함께 퇴계를 모시고 오담烏潭에서 뱃놀이를 할 때의 일이다. 오담 소沼의 이름을 고치는 문제로 퇴계와 금난수와 몹시 다투었다. 발단은 퇴계가 ‘오烏’자가 아무 근거 없이 붙었다는 말을 듣고 새롭게 ‘풍월담風月潭’으로 고치자고 제안하자, 월천이 “어찌 다시 (제가 소유한) 이 소沼마저 가지시려고 하십니까?” 하며 거칠게 항의했다. 퇴계는 말없이 돌아갔고 이 일에 대하여 곧 편지를 보내왔는데 편지 내용은 이러하다. - “어제 배 위에서 한 말과 그대의 얼굴을 살피니 나의 제안은 조금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사람 기질의 약점은 강함[剛]과 유약함[柔]에 많이 나타난다. 내가 보니 두 사람 모두 학문을 한다고 하면서도 약점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쓸데없는 객기로 다투기만 하네. …… 바로 말하면 금군(琴君)은 비록 유柔함에 가까우나 유연한 데는 이르지 못하며, 가끔은 바름에 이르려고도 하네. 그런데 그대는 강하다고 자부하나 굳건함에는 이르지 못하며, 도리어 몹시 사납고 조금도 겸손함과 공손함이 없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일 뜻이 없어 보이네. 그러니 덕을 해치고 일에 방해됨이 금군의 행위보다 여간 심한 것이 아닌가”-. 하고 두 사람의 행동에 대한 간접적인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퇴계 선생의 교육 방법이 드러나 있다.성재 금난수의 종택은 안동댐 건설로 옮겨져 지금의 예안면 부포리에 있으며 그의 묘소는 안동시 도산면 단천리에 있다. 성재는 사후에 좌승지에 추증되고 예안의 동계정사(東溪精舍)에 제향 되었다.8곡에 자리한 고산정 성재 금난수를 거론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산정이다. 원래 일동정사(日東精舍)였다. 도산구곡의 제8곡이요 안동팔경(安東八景)의 하나인 가송협(佳松峽)의 절벽 아래 자리 잡고 있다. 여름날 비가 그친 뒤 병풍처럼 둘러선 외병산(外屛山)과 내병산(內屛山)을 안개가 감싸고 있는 정경은 마치 신선의 세계라 일컬을 절경이다. 1554년(25세)에 부포에 성재라는 정자를 짓고, 1563년(35세)에 가송협에 고산정을 지었다. 성재의 연보에는 “가을에 일동정사를 지었다. 바로 고산정이다. 치솟아 있는 절벽을 끼고 깊은 물웅덩이를 내려다보니, 수려하고 깊고 그윽하여 선성 명승 중의 하나이다.로 나타나 있다.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뒤 정자를 지었는데 물과 바위와 주변의 산과 숲이 어우러져 자연의 질서를 조화롭게 연출해 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앞에 물가에 약간은 휘어지고 오래된 소나무는 정자의 운치를 한결 더해 주고 있다. 물을 건너가기 전 맞은 편 강둑에서 바라보는 고산정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이러한 고산주인의 정자의 아름다움에 취해 시인 묵객들이 내왕이 잦았다. 청량산을 자주 찾았던 스승인 퇴계 선생도 길목에 있는 이 정자에 시 한 편을 주저하지 않으셨으니 시 ‘서고산벽(書孤山璧)이 있다.일동이라 그 주인 금씨란 이가 日洞主人琴氏子(일동주인금씨자) 지금 있나 강 건너로 물어보았더니 隔水呼問今在否(격수호간금재부) 쟁기꾼은 손 저으며 내 말 못 들은 듯 耕夫揮手語不聞(경부휘수어불문) 구름 걸린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네. 愴望雲山獨坐久(창망운산독좌구) 산수화 한 폭을 떠올린다. 성재를 찾는 퇴계 선생의 모습과 못들은 채 밭가는 농부 그리고 구름 걸린 산을 보며 기다리는 퇴계 선생. 시 한 수에서 탈속한 은사들의 유유자적하는 삶과 고상한 기품을 느낀다. 성재 금난수도 고산정에서 독서를 하고 자연을 즐기는 가운데 여러 수의 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한 수를 보면천 길 벼랑 아래 아름다운 그대는 遙憐絶壁千尋下(요련절벽천심하)강가의 띠집에서 옛 책을 읽는다지. 茅屋臨流讀古書(모옥임류독고서) 조용한 가운데 공부는 잘되고 있는지 靜裏工夫能會未(정리공부능회미) 책 가운데서 느끼는 참맛은 어떠한가. 書中眞味問如何(서중진미문여하) 자문자답하는 형식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일동정사에서 독서를 하고 자연을 즐기는 자신을 스스로 독려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예로부터 정자는 선비들이 학문을 수양하고 교유하는 장소로서 애용되었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뤄서 심신 수양의 거처로서 높이 평가 되었던 것이다. 고산정을 널리 알린 이는 퇴계 선생일지 모르다. 청량산을 오르내리며 제자의 정자를 가끔씩 찾는 스승의 발걸음에서 한 편의 시가 나오고 거기에 연이은 제자들과 묵객들의 숱한 방문으로 차운을 한 수백 편의 시들이 전한다. 계절 따라 느끼는 자연의 감흥이 같을 수는 없다. 강을 건너 찾아든 정자 마루에 걸터앉아 보는 경치도 어디 비할 데가 없다. 맞은편에도 솔숲이 우거진 작은 산이 예쁘게 솟아 있고, 강물은 오늘도 도산구곡 예던길을 또 굽이쳐 흘러간다. 조금은 굽은 소나무가 그렇게 흘러가는 강물을 굽어보며 서있다. 옛날의 정자 주인과 이곳을 드나들던 숱한 유학자들의 발걸음을 떠올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