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강인순 작가ㆍ사진=강병두 작가] 안동 땅 어느 곳에서나 퇴계 선생을 만날 수 있다. 청량산에서부터 안동 시가지 앞을 흘러가는 낙동강 주변의 이곳저곳에는 선생의 학문적 위업만큼 삶의 자취를 찾을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노송정에서 태어난 퇴계태백산의 지맥인 용두산이 그 기세를 북에서 남으로 뻗어가는 형상인 도산면 온혜리, 와 토계리는 퇴계 선생이 태어나고 생전에 거처하시고 생을 마감하시고 묻힌 마을이기도하다. 예로부터 온천이 있었던 마을인 온혜의 노송정 종택에서 퇴계 선생이 태어났다 .조부 이계양이 봉화훈도로 있을 때, 굶주림으로 실신한 승려를 구해주었는데, 그 승려가 집터를 잡아주면서 " 이 곳에 집을 지으면 귀한 자손을 얻는다." 고 해서 이 곳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이후 이곳에서 퇴계가 태어남으로써 퇴계 태실(胎室)로 불리는데 노송정은 진성 이씨 온혜파의 종가이기도 하다.종택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ㅁ자형 안채와 사랑채인 노송정 및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솟을 대문에는 " 성인이 든 문" 이란 뜻의 편액인 성임문(聖臨門)이 걸려 있다. 퇴계 선생의 모친이 ‘꿈에 공자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는 태몽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니 일찍부터 큰 인물의 탄생을 예감한 듯하다. 다른 고택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구조다. 일곱 줄기 기운이 하나로 모이는 명당이라는 태실은 가끔 젊은 부부나 가족들 가운데는 성현의 좋은 기운을 받고자 숙박 체험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허락하지 않고 언제든 편하게 볼 수 있게 개방한다. 곱게 바른 한지창을 통해 은은하게 비치는 볕을 보노라면 이 작은 공간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심오한 분위기에 저절로 젖어든다. 지금은 종손 내외분이 집을 지키고 있는 노송정의 안채 대청마루 선반 위에는 십여 개의 소반이 나란히 정돈되어 있어 드나드는 손님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았다.따스한 가을볕 아래 노송정 태실을 나서 발길은 다시 토계로 향한다. 태실 앞을 흐르는 온혜 개울은 토계리를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도산은 지명 그대로 퇴계 선생의 삶의 흔적을 더듬어 보고 그 위업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그리고 퇴계가 살았던 퇴계종택은 토계리(兎溪里) 상계에 묘소는 하계에 있다. 모두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학문과 벼슬의 길퇴계 선생은 태어난 지 일곱 달 만에 부친을 여의게 된다. 선생이 학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인근 분천의 농암 이현보, 봉화 닭실의 충재 권벌 등 선배 문인들의 영향이 많았을 것으로 본다. 또한 12세 때부터 숙부인 송재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퇴계는 청년 시절 두 차례에 걸쳐 성균관에 유학을 다녔다. 이때 송나라 진덕수가 경전과 도학자들의 심성수양에 관한 격언을 모아 펴낸 ‘심경(心經)’을 접하는 게 되었는데 퇴계의 학문적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퇴계는 두 번의 결혼을 하게 된다. 21세에 의령 허씨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두었으며 7년 뒤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30세에 다시 안동 권씨 부인을 맞이하였으나 가일의 사락정 권질의 딸인 부인은 친정 집안의 변고로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태로 혼인을 하였다. 그러나 이마저 선생의 나이 43세에 부인을 여의었으니 크나큰 학덕을 갖춘 선생의 처복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그러나 이런 가정사 속에서도 34세 되던 해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퇴계의 모친은 아들의 품성을 고려한 판단으로 벼슬길의 풍파를 염려하여 고관대작보다는 지방 관리가 되기를 주문하였다. 퇴계는 20세 전후에 기묘사화를 겪었고 45세 되던 해 을사사화의 광풍이 휘몰아치자 이를 피해서 부인도 없이 쓸쓸히 온혜로 귀향하여 칩거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정쟁은 다를 바가 없지 않았나 보다. 이로 인하여 어수선한 마음을 가다듬고자 온혜에서 남쪽으로 십 여리 아래쪽에 있는 토계로 옮겨서 거처를 새로 정하여 칩거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정에서 칩거 중인 선생에게 안동부사를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홍문관응교 직을 다시 내리니 상경하게 되었다. 이때 역시 조정은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으니 48세 되던 해 지방 관리를 자청하여 단양군수로 부임하였다가 형인 이해가 같은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자 8개월 만에 다시 풍기군수로 이임하게 되었다. 이때 단양을 떠나며 그의 봇짐 속에는 들었었다는 단양의 괴석 두 점과 매화 화분 하나. 관기 두향과의 애틋한 정담은 퇴계 선생의 인간적인 면모를 되돌아보게 한다.서원 교육에 대한 관심단양에서 풍기군수로 옮겨온 퇴계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만나게 된다. 백운동 서원은 주세붕이 일찍 이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서원이란 본디 지역의 사림들이 주도하여 건립한 교육기관으로 선현의 제향 기능과 지역 인재를 가르치는 강학 기능을 가졌다. 지역의 향교보다는 수준이 더 높은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서원은 조선후기 사회에서 정치와 문화의 지형 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는 근원이 되기도 하였다.퇴계 선생은 청년 시절 관직에 오르기 전 성균관에 유학을 한 적이 있다. 그때의 경험과 목민관의 입장으로서 서원의 교육방법과 운영 형태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볼 수 있다.선생이 풍기 군수로 있을 때 배순이라는 대장장이를 가르쳤는데 향학열이 뛰어났으며, 선생이 풍기를 떠나자 그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책을 읽었고,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배순이 살았던 동네를 배점이라 하고 현재까지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배순을 효성과 향학열이 극진한 동신으로 모시고 동제까지 지낸다고 하니 선생이 끼친 영향력을 짐작할 만하다벼슬길을 떠나 칩거하다선생의 호가 ‘퇴계’인데 이는 ‘작은 개천가에 물러나 앉는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호가 말해주듯 어쩌면 선생께서는 어지러운 벼슬길보다는 조용한 가운데 심신을 수양하고 인재를 기르고 학문을 연구하는데 더 마음을 두셨을 것이다.벼슬길에 들어선 지 15년이 지난 49세 되던 해. 선생은 백운동 서원을 사액서원으로 해주기를 청한다. 그러고 난 뒤 1년 2개월의 풍기군수 직을 그만두고 두 궤짝의 책 짐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선다.고향에 돌아와 지금의 퇴계 종택이 있는 상계의 개울 건너 산기슭에 한서암을 짓고 수양과 학문에 정진하며 칩거하는 중 제자들이 이곳저곳에서 찾아와서 배움을 청하였다. 그러다 보니 한서암이 협소하고 금방 퇴락하여 다시 지어진 것이 계상서당이다.수 년 전에 새로 다듬어진 계상서당은 도산서당 이전 선생의 수련과 도학전수의 수도처로 선생의 도학이 시작되고 꽃피워진 곳이다. 일찍이 농암선생께서 자주 방문하셨고 율곡선생도 23세시에 이곳에서 사흘 동안 머무르면서 학문을 논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셨다. 계상서당은 비록 작은 집이지만 만물일체라는 선생의 사상은 우주를 아우르는 크고 넓은 것이다. 서당 앞을 흐르는 실개천은 선생이 은퇴하여 퇴계수(退溪水)가 되었고 주변에 거처하시던 집과 자연은 선생의 깊은 학문과 사상이 깃든 도학의 연원이 되는 곳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선생의 자취가 모두 없어져 안타깝게 여겼는데 1715년 창운재(蒼雲齋) 권두경 선생이 앞장서서 지금의 퇴계 종택인 추월한수정을 짓고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유적 고증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계상서당, 한서암, 계재 등 옛 유적을 중건하여 계상학림이라 하고 이 마을 전체를 계상도학연원방(溪上道學淵源坊)이라 부르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선생의 도학을 체득케 하여 참다운 삶의 길로 이끌어 주고 있다.지금 이 건물들은 다시 고쳐지어져 개울가에는 2011년 계상학림중건비가 세워져서 이곳을 찾는 이에게 그 내력을 소상히 알려주고 있다.도산서당을 짓다낙동강을 앞에 두고 도산의 기슭에 또 다른 강학의 터인 ‘도산서당’을 마련한 것은 계상서당이 좁고 낡아서 더는 미룰 수 없어서였다. “물과 돌이 있지만 멀리 바라 볼 수 있는 빼어난 경관을” 선생께서는 찾으셨던 것이다. 계상서당에서 멀리 앞에 보이는 나즈막한 산을 넘거나 토계천을 따라 걸어서 하계 마을 지나 낙동강변에 이르러 우측으로 강을 따라 걸어 내려가다가 분천에 가기 전에 이곳의 경관을 보고 정한 것 같다. 이곳에서는 물이 있고 돌이 있고 넓은 들판이 보이고 멀리까지 훤히 트인 경관을 볼 수 있어 심신수양과 도학을 강학하는 곳으로 더없는 곳으로 선택되었다.도산서당은 지금의 도산서원 건물의 앞쪽 열정 우물 옆에 있는 건물이다. 일찍이 퇴계 선생이 기거하며 공부를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집이다.처음에는 법연 스님이 집짓기를 시작하여 정일 스님이 다섯 해 만에 지었으니 3칸 건물로 1칸은 자연을 즐겨 완상한다는 ‘완락재’요 동쪽의 1칸은 ‘암서헌’으로 바위틈에 숨어 지낸다는 뜻이 서려 있다. 그리고 암서헌의 처마 밑 동쪽에 덧달아 놓은 마루처럼 생긴 살평살 방이 서당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제자인 이덕홍의 조부 집에서 보고 와서 꾸민 것인데 모름지기 선비로서 욕심내지 않고 검소하게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여기 덧붙여 서당의 제자들이 기숙하며 공부할 수 있는 공간으로 농운정사를 마련하였는데 공부의 공(工)자를 본 떠 지었다고 하며, 농운정사 아래쪽에는 제자인 정사성이 서당에 입학할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서 기부했다는 역락서재가 있는데 이 건물도 공부하러온 제자들이 묵는 곳이었다고 한다.1560년 서당이 완성되고 이로부터 퇴계 선생은 7년간 이곳에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비록 500년 전의 일이지만 그날의 유생들이 글 읽는 소리가 지금도 서당의 뜨락에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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