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두한 작가ㆍ사진=강병두 작가]
안동시내에서 풍산 방향으로 가면 서의문을 만나게 된다. 이 서의문을 앞에 두고 오른편으로 가면 송암구택과 학봉종택을, 왼편으로 가면 청성산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서의문에서 5킬로미터 이내의 거리에 있다. 서의문을 앞에 두고 좌측으로 1.5킬로미터쯤 가면 왼편에 낙동강이 흐르고 오른편에 산이 하나 솟아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오른 편에 있는 이 산이 청성산이다. 송암은 이 산을 “마치 큰 거북이 바다에서 몸을 솟구치며 머리를 들고 서 있는 듯하다.”고 〈성산기(城山記)〉에서 말하고 있다.이 청성산 기슭, 낙동강이 굽어보이는 곳에 연어헌(鳶魚軒)이 있다. 송암이 그의 나이 43세 되던 해인 1574년에 지은 정자이다. 〈시경(詩經)〉의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鳶飛戾天魚躍于淵)’라는 구절에서 ‘연어’ 두 글자를 취했다고 〈연어헌기(鳶魚軒記)〉에는 적혀 있다. 이 연어헌에는 주세붕이 한자로 쓴 편액과 이동환이 1778년에 한글로 쓴 편액이 정면에 걸려 있다. 그리고 1570년 11월 8일 퇴계가 운명하기 한 달 전에 지은 〈성산에 오르다〉란 시(“절은 산 높은 곳에 있고 멀리 강물이 흐르는데(蘭若山高水逈臨)/ 흰 구름과 푸른 대나무 찾아 유람하기에 좋구나(白雲靑竹好遊尋)/ 오십 년 전의 일을 누가 알겠는가마는(誰知五十年前事)/ 사무쳐 시 지으니 생각을 금할 길 없네(感慨題詩思不禁)”)를 새긴 시판이 걸려 있다. 퇴계는 송암이 태어나기 전인 1520년께 성산사를 찾은 적이 있었는데 병석에서 50년 전의 일을 떠올리며, 이곳에서 처사의 삶을 사는 송암에게 이 시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송암의 어머니는 퇴계의 맏형 이잠(李潛)의 딸로서, 퇴계는 송암의 외종조부가 되는 관계에 있다. 연어헌의 왼편에는 진원사라는 굿당이 있고, 연어헌과 진원사 사이에 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나 있다. 이 오솔길을 따라 가면 청성산의 내밀한 곳을 만날 수 있다. 그 내밀한 곳에 고려 시대에 지은 성산사라는 절의 터가 있다. 이 절터 위에 세워져 있던 절, 즉 성산사에 송암 권호문(1532 ~ 1587)과 학봉 김성일(1538 ~ 1593)이 과거공부를 하러 들어간 적이 있다. 송암이 퇴계의 가르침을 받은 지 22년(송암의 나이 37세), 학봉이 퇴계의 가르침을 받은 지 12년(학봉의 나이 31세)이 되던 해인 1568년이었다. 그때 둘은 “올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청성산의 주인이 되자.”고 약조를 하였다. 그런데 학봉은 급제하고 송암은 낙방하고 말았다. 송암은 약조한 대로 청성산의 주인이 되는 길을 걸음으로써 김부필, 이숙량과 함께 계문삼처사(溪門三處士, 퇴계 문하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산 세 선비)의 한 사람이 되었고, 학봉은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벼슬길에 오른 학봉은 유성룡과 함께 군정의 개혁을 통해 유비무환의 태세를 갖추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590년 3월 통신사 부사 자격으로 정사 황윤길, 서장관 허성 등과 함께 이듬해 2월까지 1년 동안 일본에 다녀와서 복명을 하였다. 그런데 정사와 부사의 복명 내용이 전혀 딴판이었다. 황윤길이 ‘필히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자, 학봉은 자신은 ‘병란의 조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서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이니 내치에 힘쓰라’고 반박했다. 동인이 집권하고 있던 당시의 조정은 그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김성일의 복명에 의심을 품은 선조는 왜란 발발 직전 조정의 중신이었던 그를 외직인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제수했다. 이어서 1592년 왜란이 발발하자 국사를 그르친 죄인이라 하여 죽이려 했지만 동인인 유성룡의 변호로 마지못해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했다. 그 뒤 그는 경상우도관찰사 겸 순찰사를 역임하다가 진주에서 병으로 죽었다. 전란 중 그는 적극적으로 민심을 규합하고 통합과 조정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왜군의 후방을 교란시킴으로써 조선의 멸망을 막아낸 일등공신이 되어 사후 문충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그 공이 허물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평가하는 사가들이 적잖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가 부각되어 후세인에게 ‘역사의 죄인’으로 각인되는 불우한 인물의 대명사가 되고 있기도 하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례고증》·《해사록》·《학봉집》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이황의 《자성록》·《퇴계집》 등을 편집·간행한 학자로서 호계서원 등 여러 곳에 제향되고 있기도 하다.한편, 청성산의 주인이 되기로 한 송암은 청성산 아래에 무민재(無悶齋)를 짓고 그곳에 은거하며, 새벽마다 책을 읽으며 후학을 양성하면서 왕성한 집필활동을 했다. 그리하여 《송암선생문집》·《송암선생속집》·《송암별집》 등 14권 5책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다. 이 방대한 글들은 대부분 한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독락팔곡)〉(경기체가의 마지막 작품)·〈한거십팔곡〉(연시조) 등의 국한문 혼용체 작품도 있다. 이들 작품은 모두 퇴계의 훈도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다음의 일화는 그 훈도 방법 중의 하나이다.그의 나이 25세에 청량산을 유람하고 나서 108운의 장시를 지어 스승인 퇴계에게 올렸다. 퇴계는 시를 정독한 뒤 이렇게 말했다. “시를 자세히 보니 병폐가 적지 않다. 말을 길게 하고자 한 까닭에 지리하고 산만하게 되었다. 운을 가득 채우려고 어려운 운자를 끌어대다가 쓸데없이 길어졌다. 전고를 인용함에 어떤 것은 타당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하다. 대구를 이룬 것도 어떤 것은 적합하고 어떤 것은 군더더기다. 많은 것에 힘쓰다가 번잡하게 되는 것이 어찌 간략하고 정당(精當)한 것만 하겠느냐. 멀리 가자고 자주 넘어지는 것이 어찌 궤도를 따라 홀로 이르는 것만 하겠는가.”퇴계로부터 송암이 이러한 가르침을 받게 된 것은 공자가 학문에 뜻을 둔 나이인 15세 때부터였다. 이후 퇴계가 별세할 때까지 24년이란 세월 동안을 그는 퇴계를 곁에서 모시고 이러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런 만큼 그는 퇴계를 속속들이 배워 알게 된 제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퇴계는 청량산을 ‘오가산(吾家山)’으로 부르며 틈만 나면 들러 시를 짓고 제자들과 문답하곤 했다. 그 결과 청량산은 ‘퇴계의 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퇴계의 제자로서 퇴계의 이러한 점을 본받아 청성산에서 퇴계와 같은 삶을 삶으로써 청성산이 ‘송암의 산’으로 불리어가고 있을 즈음에 송암은 정탁으로부터 벼슬길에 나오라는 편지를 받았다. 그러자 그는 〈독락팔곡〉을 지어 사양의 뜻을 나타냈다. 또 이조참판 구봉령이 품계를 올려 천거하자 〈한거록〉을 보이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동문수학한 서애 유성룡은 그러한 그의 뜻을 알고 그를 ‘강호고사(江湖高士)’라 부르며 천거하지 않았다.세월은 흘러 ‘청성산의 주인이 되자’고 학봉과 약조한 지도 17년이 지났다. 1585년 어느 날 학봉은 “청성산의 절반을 저에게 기꺼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편지를 송암에게 보냈다. 송암은 이를 받아들여 산의 절반 중 윗부분을 그에게 주었다. 그 이태 뒤 학봉은 그곳에 석문정사를 세웠다.이렇게 하여 청성산의 주인은 송암과 학봉, 두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학봉은 청성산의 주인으로서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려보지도 못한 채 벼슬살이를 하다가 병사하였고, 송암은 청성산에 들어 살았지만 현실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축묘설(畜猫說)〉이란 글을 남겼다. 그 내용은 이렇다. 가을에 곡식을 거두자 쥐떼가 곡식을 훔치러 벽을 뚫는 것을 보고 더는 그냥 둘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이웃집의 작은 고양이를 데려와 사랑으로 길렀다. 고양이는 두서너 달이 지나자 큰 쥐를 잡는 꾀를 알아냈다. 아침에는 담장 구멍 곁에 있고 저녁에는 항아리 사이를 엿보다가 반드시 쥐를 잡은 뒤에야 만족했다. 나라에서 벼슬하는 자들이 도성의 여우와 사직의 쥐를 제거하지 못한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세상 사람들 중에는 쥐와 같은 자가 많다. 임금이 준 관복을 입고 임금이 준 곡식을 먹으면서 직분을 다하지 않는 자들은 어찌 내가 기르는 고양이에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송암은 이러한 사상과 퇴계로부터 물려받은 학문을 후학들에게 물려줌으로써 그의 뜻을 실현코자 하였다. 그리하여 36세 무렵에는 하연, 권기, 박경중, 진종주, 금관조 등의 제자를 두게 되었고, 48세 이후에는 병산서당, 경광서당, 여강서원, 청성정사 등지로 강학의 폭을 넓혔다. 이 결과 그의 사후인 1608년엔 그의 학덕을 기리고자 하는 문하생과 사림의 발의로 연어헌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에 청성서원(靑城書院)이 세워졌다. 서원 오른쪽에 그의 위패를 모신 사당 ‘청풍사(淸風祠)’가 있고, 사당 뒤쪽 산중턱에 그의 묘소가 있다.그가 태어난 집인 송암구택에는 오른쪽 사랑채 안에 그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 중의 하나인 관물당이 있다. 관물당은 송암이 이름 붙인 ‘관아당(觀我堂)’을 보고 퇴계가 고친 뒤 직접 써준 이름이라 한다. 사물을 관찰함에 있어 대상을 눈으로 보는 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만 못하며, 마음으로 보는 것은 이치로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 관물당 앞에 서면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 부사로 일본을 다녀 온 학봉의 복명 장면이 떠오른다. 그도 퇴계로부터 대상을 이치로 보아야 한다고 배웠을 텐데, 어떤 이치로 대상을 보았기에 그의 눈에 보인 대상이 이토록 실상과 달랐단 말인가?그의 이치는 물론 퇴계로부터 배운 성리학적 이치였을 것이다. 이 세계는 형이상지도(形而上之道)인 이(理)와 형이하지기(形而下之器)인 기(氣)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가 발하면 기가 따르고 기가 발하면 이가 올라탄다는 유의 이치였을 것이다. 그런 이치로 그가 바라본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관념이었다. 이치라고 하는 관념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한계인 동시에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하고 있던 조선의 한계였으리라. 조선이 생존하고 발전하려면 이 한계를 뛰어넘어야 했다. 그러려면 사물을 관찰함에 있어 기존에 이치라고 믿고 있던 관념으로 볼 것이 아니라, 기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다 세밀히 보고, 거기서 이치를 발견해내는 방법을 취했어야 했다. 그러했더라면, 조선의 성리학은 과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을 것이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풀벌레를 살리는 것은 풀잎이지 관념이 아니라고 외치는 듯하다. 풀잎이 싱그러운 산이 그립다. 청성산에 오른다. 앞에 낙동강이 흐르고, 저 멀리 안동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