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강인순 작가ㆍ사진=강병두 작가]성리학 논쟁과 성학십도 조선시대 최고의 학문적 논쟁인 사단칠정논쟁에서 퇴계 선생은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다.사단 칠정은 인간의 본성인 측은, 수오, 사양, 시비지심의 네 가지 마음인 사단과 기뻐함(喜), 노여움(怒), 슬픔(哀), 두려움(懼), 사랑함(愛), 싫어함(惡), 욕망함(慾)이라는 일곱 가지 감정을 가리킨다. 이 논쟁은 실마리는 정지운이 자신이 지은 『천명도설』을 퇴계 선생에게 보여 준 데서 발단이 되었다. 『천명도설』에는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퇴계 선생은 이 구절을 “사단은 이(理)가 발하는 것이고, 칠정은 기(氣)가 발하는 것이다”라고 고쳐 주었다. 당시 정지운이나 퇴계 선생 누구도 자신들의 이런 주고받음의 내용이 장차 조선 성리학계를 커다란 논쟁으로 몰고 가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논쟁의 본격적인 시작은 퇴계 선생에 의해 수정된 『천명도설』을 기대승이 보고 나서, 퇴계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면서부터이다. 기대승은 퇴계 선생이 고친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는, 문구를 논박하기 위해 편지를 띄웠다.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을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이황과 다른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분명 사람에게는 윤리적인 마음도 나올 수 있고, 혹은 그렇지 않은 현실적인 마음도 실현돼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이든 이(理)와 기(氣)는 동시에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대승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단을 “본성이 발할 때 기(氣)가 잘못 작용하지 않으면 본연의 선이 곧 이루어지는” 경우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의 경우도 이(理)와 기(氣)라는 두 가지 계기가 함께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대승의 편지를 받고 나서 퇴계 선생은 그의 비판을 일정 부분 수용한 가운데 자신의 사단칠정론을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사단은 이(理)가 드러날 때 기(氣)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드러날 때 이(理)가 타는 것입니다.” 이와 기를 사단과 칠정의 경우 모두에 동일하게 적용하면서도, 사단은 이(理)가 중심이 되어 실현되고 칠정은 기(氣)가 중심이 되어 드러난다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타협책은 그리 오래지 않아 이황의 사단칠정론을 옹호하는 성혼과 이와는 다른 견해를 가진 이이가 논쟁하면서 이이는 자신의 정신적 멘토이기도 했던 퇴계 선생의 주장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반론은 계속되어 오늘날 이기일원론, 이기이원론으로 일컬어지는 논쟁은 어느 한쪽도 굽힘없이 이어져 퇴계 선생의 계열과 기대승의 반론을 그대로 수용한 이율곡의 계열은 학문적 입장에서 커다란 차이를 갖고 조선의 성리학은 성장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가운데서도 퇴계 선생이 성리학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성학십도’이다.1568년 명종이 승하하자 선조가 즉위하였다. 이때가 퇴계 선생이 대제학으로 있을 때였다. 퇴계 선생은 임금에게 당장 힘써야 할 일을 상소문 형태로 올린 것으로 성리학을 10폭의 그림 형태로 요약 정리한 것이다. ‘인과 효를 온전히 할 것’, ‘양궁을 친하게 할 것’, ‘성학을 돈독히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울 것’, ‘도술을 밝혀 인심을 바로잡을 것’, ‘신하들을 미루어서 생각하고 귀와 눈을 다 바르게 활용할 것’, ‘수심과 반성을 열심히 하여 하늘의 사랑을 이어받을 것’ 등 6조로 요약하여 올리고, 나머지 유학의 핵심적 부분을 그림과 설명을 곁들여 해석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렸다. 이 책을 통해 주자학 전체의 체계를 모두 열거하며 이를 성학으로 보아 군주 스스로 여기에 응하도록 유도하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으며 수기치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비록 여러 선현 유학자들의 글 속에서 채택한 것이지만, 그것을 취사선택하는 하나의 철학적 구성을 이루어놓은 점에서 『성학십도』는 퇴계 선생의 성리학적 학문을 집대성한 것으로 정치를 공부로 이해하는 유학의 사회 철학적 의식이 깃들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시인으로서 퇴계 선생 퇴계 선생은 뛰어난 시인이었다. 퇴계 선생이 읊은 시는 문집에 전하는 시는 2,000수가 넘으며 제목을 아는 것을 포함하면 3,000 여수에 이른다. 도산의 주변 자연과 청량산에 이르는 절경을 완상하며 노래한 시들이 많이 있다. 누구보다도 매화를 좋아한 퇴계 선생은 104수의 매화시로서 「매화시첩(梅花詩帖)」을 엮은 바 있어 「퇴계문집」에 실린 10여 수의 매화시를 합치면 모두 110여 수의 매화시를 지으신 샘이다. 일찍이 매란국죽은 사군자로 각기 지닌 고매한 품성으로 선비들이 좋아했지만 퇴계 선생만큼 매화를 사랑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선생은 도산서당 뜨락에 핀 매화를 보며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라는 제목으로 여섯 수를 읊었다.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 도산의 달밤에 매화를 읊다 步躡中庭月趁人 뜰을 거니노라니 달이 사람을 좇아오네.梅邊行遶幾回巡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夜深坐久渾忘起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香滿衣巾影滿身 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그림자 몸에 닿네. 선생의 매화와의 인연은 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사후까지 이어진 듯하다. 학봉 김성일이 쓴 선생의 연보에 의하면, 선생은 1570년 12월, 70세로 운명하시던 날 아침에도 주위 사람에게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일렀다고 적고 있다.이토록 매화를 생각하는 지극한 정성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돌아가시기 한 해 전에 쓴 憶“陶山梅(억도산매) : 己巳年(69세) 도산서당의 매화를 생각하다”.에서도 매화에 대한 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지금의 도산서원 경내에는 여러 그루의 매화가 해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 선생은 이렇듯 한시뿐만 아니라 우리 문학사에서 불후의 명작인 연시조 ‘도산십이곡’을 남겨 도학자로서의 면모와 자연을 사랑하는 고아한 정취를 격조 높게 나타내었다.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와 짝을 이루는 이 작품은 모두 12곡으로 전 6곡은 자연사물에 접하여 일어나는 심정과 감흥을 읊은 언지(言志), 후 6곡은 학문과 수양애 임하는 자세를 나타낸 언학(言學)으로 나눠진다. 이 가운데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다음을 들 수 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러타 어떠하리?하물며 천석고황(泉石膏肓)을 고쳐 무엇하리 <언지 1>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아니하는가?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상청(萬古常靑) 하리라.<언학5> 퇴계 선생께서 이 작품의 끝에 붙인 발문(跋文)에는 “가곡이 무릇 음란한 노래가 많아서 이야기할 만한 것이 못 되며 이별(李鼈)이 육가(六歌)를 본떠 이 노래를 짓는다고 밝히고 있고, 또한 이를 아이들로 하여금 익혀 부르게 하여 나쁜 마음을 씻어 버리고 서로 마음이 통하게 하고자 한다”고 밝혀 자신이 이 노래를 짓게 된 연유와 문학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퇴계 선생의 시는 도학자로서의 사색과 성찰을 바탕으로 급박하지 않고 항상 온화하며, 또한 시심이 두터워 너그러웠던 것이다. 때문에 선생의 시는 자신만의 오롯한 성정을 바탕으로 청량산을 비롯한 선생이 늘 가까이 접했던 주변의 자연 환경이며 숱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이뤄낸 시가 작품들이기에 더욱더 소중한 것이었다. 고결함을 잃지 않은 마지막 길의 퇴계 선생 퇴계 선생은 벼슬길보다는 학문 연구에 일생을 바치신 분으로 기억된다. 벼슬길에 올랐어도 70여 차례나 사직을 청하였을 만큼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려는 그의 진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관직에 있으면서 요양을 위해 고향에 내려와 있던 1570년. 나이 70세에 이르러 임금께 다시 사직을 청하였으나 도리어 조정으로 돌아오라는 간곡한 교지를 받을 뿐이었다. 점차 병으로 쇠약하고 기력이 다해 감을 느낀 퇴계 선생은 주변을 정갈히 하게하고 “빌려온 책을 돌려줄 목록을 만들라”든지 “매화 화분에 물을 주어라”, “유언을 받아 쓸 지필묵을 준비하라” 등 마지막 가는 길에도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국장을 사양할 것”,“비석을 세우지 말고 그저 작은 돌에 전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 새기고 후면에는 향리와 조상의 내력과 지행과 출처만을 새기도록 하라”는 유훈을 남기고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선생의 묘소는 현재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건지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선생의 유훈대로 조성된 묘소는 우리 역사에 남긴 선생의 업적에 비하면 소박하기 짝이 없는 경관이다.
도산서원이 세워지다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고 3년 상이 끝나자 제자들은 스승의 위패를 모시고 학덕을 기릴 서원을 짓게 되었다. 그래서 제자들과 유림들이 힘을 합해 후학을 가르치던 도산서당 뒤편에 계단을 쌓고 서원의 강학소인 전교당과 기숙사인 동재, 서재와 사당을 세웠다. 선생의 사후 4년 뒤인 1574년에 착공 1년 만에 도산서원은 완공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선조 임금이 한석봉 친필인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현판을 하사하여 사액서원이 되었다. 1576년 서원이 공식적으로 완공되고 퇴계 선생의 위패가 서원 사당인 상덕사에 봉안되었으며, 퇴계 선생에게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15년에는 월천 조목이 종향되었다. 1819년 도산서원 정문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동광명실이, 1930년 서쪽에 자리 잡은 서광명실이 완공되었다. 정부는 1969년에 선생의 학덕을 길이 추모하고 국민 교육의 장으로 보존하고자 사적 제170호로 지정하였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선비문화수련원을 개설하여 학교는 물론 공공기관, 기업체를 대상으로 정신문화에 대한 전국적인 연수기관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2019년 7월에는 세계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존재 가치가 더욱 빛나고 있다. 더욱이 올해 추계향사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기념하여 여성이 초헌관으로 참배하기도 하였다. 퇴계 선생은 실천윤리를 최우선시하는 교육이념으로 당대 문하에 300여명의 제자와 인재를 국가의 동량으로 길러낸 실로 위대한 스승이다. 오늘도 퇴계 선생을 추앙하는 이들의 숱한 발길이 도산의 기슭으로 이어지고 있다.흐르는 것은 강물만이 아니다. 그러나 숱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견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성현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새삼 나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