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강인순 작가ㆍ사진=강병두 작가] 농암의 삶과 문학의 자취를 더듬어 그가 태어난 고향 마을이 있었던 분천을 찾았다. 장마 뒤 분천은 어디가 어딘지 쉽게 구분할 수 가 없다. 이미 옛길도 물에 잠기거나 숲이 우거지고 허물어져 시조 작품 속에 나오는 바위며 정자가 있던 자리도 쉽게 찾을 수 없다. 안동 지방의 옛 글귀 속에 나오는 도산구곡 가운데 제4곡에 해당하는 명소였지만 지금은 안동댐으로 인하여 물에 잠겨 대충 그 언저리를 짐작할 뿐이다. 강을 건너 청보리 축제가 개최되는 도산서원의 건너편 의촌리 들판 쪽에서 보면 영지산 자락의 분천의 옛 형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 한 인물의 생애를 살펴보면 주변 환경이 성품이나 문학적 성과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농암의 일생을 볼 때 목민관으로서 선정과 어버이에 대한 남다른 효행이며 시가 작품의 창작은 그 성정의 바탕이 이러한 환경에서 비롯한 것이라 짐작해 본다. 새내기 사관의 당찬 언행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는 조선 초기인 1467년, 당시 안동대도호부의 속현인 예안현 분천리(현재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서 인제 현감을 지낸 아버지 이흠(李欽)과 안동 권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 본관은 영천이다. 20세 때 당대의 대표적 문장가 홍귀달의 문하생으로 수학하고, 32세 되던 1498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여러 직을 거쳐 35세 되던 해 사관으로 일컫는 예문관 검열에 추천되었다. 새내기 사관 시절, 사관은 임금의 용상 가까이에서 사초를 자세히 기록할 수 있어야한다고 청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2년 뒤, 사간원정언으로 언관이 되어 세자가 공부하는 서연관의 실수를 아뢰었는데 이때 보고의 잘못을 빌미로 안동의 안기역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다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혀 갖은 고초를 겪었으며 처형을 기다렸다. 김일손이 사초에 올려놓은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발발한 무오사화 4년 뒤의 일이었고, 갑자사화가 일어난 해이다. 연산군은 자신의 심사를 자주 거스른 농암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얼굴이 검붉고 수염이 긴 자’로 부르며 별렀다고 한다. 그런데 연산군이 석방할 죄수 명단에 점을 잘못 찍는 실수로 농암은 기적적으로 죽음을 면하고 안기역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사관 친구들은 강직하고 공명정대하게 공무 수행을 하는 그를 보고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 했다. 이는 외모는 검으나 심성이 냉엄하다는 뜻이었다고 하니 농암의 성품을 짐작할만하다.30여 년 외직의 청백리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물러나고 조정으로 다시 돌아온 농암은 이듬해 사헌부지평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조정의 내직을 거치다가 42세 되던 해 자청하여 영천군수로 나왔다. 특별 승진 코스요 출세의 지름길인 청요직에 올랐지만 농암은 지방의 외직을 선택했다. 이후 밀양, 충주, 안동, 성주, 대구, 영주, 경주, 경상도관찰사로 이어지는 아홉 고을에 30여 년간 군수, 부사, 목사, 부윤을 역임하면서 우수한 목민관으로 선임되어 조정으로부터 포상을 받기도 했다. 우부승지를 비롯한 몇 번의 중앙보직을 받았지만 얼마 못가서 지방으로 다시 나와 버렸다. 30여 년 이 고을 저 고을의 목민관으로서 지내면서 선정과 준법의 표상인 청백리로 녹선 되었다는 것은 농암의 성품과 천성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모두가 중앙 요직인 내직을 선호하는 풍토 속에서도 지방의 목민관을 자청한 것은 바로 남다른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암은 목민관으로 여러 고을에 재임 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여 자제나 친구, 친지들이 함부로 자신을 만나러 관아에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만큼 자신에게 엄격하고 백성들에게는 관대했다. 가는 곳마다 향교를 재정비하여 예절 교육과 도덕적 기풍 진작을 위해 열성을 다했다. 이러한 선정의 결과로 다른 고을로 전출시에는 고을 사람들이 길을 가로막거나, 떠나는 날 쫓아와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길을 메운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퇴계 선생이 적은 행장에도 “자제와 비복들을 편애하지 않았고 혼인도 문벌 집안을 찾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함에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았다”고 밝혔듯이 휴머니즘 넘치는 공복의 길을 걸었다. 이렇듯 오랜 외직 생활을 하였음에도 청백리의 표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치적과 청렴과 결백이라는 자기 관리의 바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70에 색동옷 입고 춤을 추다 농암 이현보의 효심은 지극했다. 효절공이라는 시호가 말해주듯 처음으로 영천 군수로 부임한 것도 어버이를 자주 뵙고자하는 효성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효성을 바탕으로 1512년 46세 되던 해 고향의 영지산 자락 분강의 기슭 농암 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애일당(愛日堂)`이다. 정자의 편액을 ‘애일’이라 함은 ‘날을 아낀다’는 뜻으로 일신의 즐거움을 위함이 아니라 오직 부모 효도에 날(日)이 부족함의 뜻이 거기 있다고 했다. 1519년 53세 때, 안동대도호부사로 재임 시 귀천을 가리지 않고 부내의 80세 이상 노인들과 양친을 모신 경로잔치를 열었다. 이른바 ‘화산양로연’인데 이 때의 광경이 ‘기묘계추화산양로연도’ 그림에 고스란히 남아 전한다. 이 뿐만 아니라 1533년 홍문학 부제학 시절 고향에 내려와 선친이 94세일 때 향중의 80세 이상 노인을 애일당에 초청해 잔치를 여니 무릇 아홉 사람이었다. 이른바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를 개최했는데 이후 구로회는 농암가문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이 잔치에서 농암은 70세 늙은 몸으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며 마치 중국 고사의 노래자처럼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림을 실천했다. 농암의 이러한 효행과 애일당 건립을 축하하는 동료, 친구 등 당대 명현들의 다양한 친필 시편 40여 편이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에 전해질 뿐만 아니라, 선조 임금이 하사한 어필 ‘적선(積善)’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1542년, 76세에 이르러 농암은 정계를 은퇴했다. 더 이상 벼슬을 바라지 않고 참판의 신분으로 조용히 물러나니 임금은 금서대(金犀帶)와 금포(錦袍)를 하사하고, 실록은 명리에 뜻이 없어서 벼슬을 내놓고 물러난다는 뜻의 ‘염퇴(恬退)’라고 기록했다. 강호가도의 창시농암은 우리 국문학사에 시인으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효빈가’, ‘농암가’, ‘어부가’, ‘생일가’를 비롯한 한시 작품까지 시가문학에서의 문화사적 업적이 아주 크다.농암이 은퇴 후 한양을 떠나는 배 안에서 시조 한 수를 읊었는데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받은 ‘효빈가(效顰歌)’이다.귀거래(歸去來) 귀거래(歸去來) 말 뿐이요 가는 이 없네 전원(田園)이 장무(將蕪)하니 아니 가고 어쩔꼬 초당(草堂)에 청풍명월(淸風明月)이 나명 들명 기다리나니벼슬길에서 염퇴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작자의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농암은 고향에 돌아온 후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는 생활의 단편을 작품으로 남겼는데 ‘농암집’에 전해 온다. 귀먹바위인 ‘농암’에 올라 그 감회를 시조로 읊었으니 ‘농암가’이다. 이 작품을 새긴 ‘농암가비’가 현재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세워져 있다 농암(聾巖)에 올라보니 노안(老眼)이 유명(猶明)이로다 인사(人事)가 변(變한)들 산천(山川)이야 변할까 안전(眼前)의 모수모구(某水某丘)는 어제 본 듯 하여라이렇듯 귀거래 후 분강의 강가에서 물아일체의 경지에 몰입하여 강호 풍류의 진락을 얻게 된다. 교류하던 문인 동료, 후배들과 더불어 애일당, 분강의 바위 등 구체적인 자연 공간을 무대로 한 시회를 통해 자연에 대한 감흥과 풍류가 작품으로 승화되어 분강가단(汾江歌壇)을 형성하여 강호가도(江湖歌道)를 이루는데 기여하게 되었다고 본다. 농암은 예로부터 전해오던 ‘어부사’ 12장 가운데 3장을 버리고 9장으로 장가를 만들어 읊을(詠)수 있게 하고, 또 한편 ‘어부사’ 10장을 단가 5장으로 다듬어 창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퇴계 선생은 ‘어부가’ 발문에서 “-벼슬을 버리고 분수가로 염퇴했다....강호지락의 진(眞)을 터득한 것이다. .....이를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은 신선과 같았다. 아! 선생은 이미 그 진락(眞樂)을 얻었다”라고 찬양했다. 어부단가(漁父短歌) 5장 가운데 2장을 보면 이러한 점이 잘 나타나 있다.굽어보면 천심녹수(千尋綠水) 돌아보니 만첩청산(萬疊靑山)열 길 티끌세상에 얼마나 가렸는가. 강호(江湖)에 월백(月白)하거든 더욱 무심(無心)하여라.어지러운 세상사를 멀리하고 자연에 묻혀 그 즐거움을 누리는 작자의 강호 생활의 정신과 풍류를 엿볼 수 있다. 농암의 ‘어부가’는 이후 퇴계의 ‘도산12곡’에 영향을 주었고, 이한진(李漢鎭)의 ‘속어부사’, 이형상(李衡祥)의 ‘창보사’ 등에 전승되고 어부가의 걸작으로 꼽히는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졌다. 농암은 이 뿐만 아니라, 오늘날 문학동호인회 격인 ‘월란척촉회(月瀾躑躅會)’를 통해 퇴계를 비롯한 자신의 자제들과 퇴계의 제자들이 함께하여 수많은 작품들을 발표하여 강호문학의 크나큰 성과를 이루어내기에 이른다. 이러한 활동은 이른바 영남가단(嶺南歌壇)이 형성되는 기틀이 되어 송순-정철-윤선도로 이어지는 ‘호남가단(湖南歌壇)’과 더불어 국문학사의 전통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농암은 만년에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인 기로소(耆老所)에 입소되는 영예를 얻었으며, 은퇴 이후에도 지중추부사에 제수되는 등 나라에서 품계를 내려 예우할 만큼 주변으로부터 효와 충절의 표상이었다. 1555년 89세에 세상을 떠나니 퇴계 선생이 그의 행장을 쓰고 효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농암 선생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유적은 원래 자리했던 분천리를 떠나 2001년부터 조성한 현재의 도산면 가송리 올미재 부근으로 모두 옮겨 이건, 복원해 왔다. 선생의 학문과 덕향을 제향하는 분강서원이며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가득한 애일당, 조상의 유업을 이어간다는 뜻이 담기고, 조선 중종 때 시·서·화 삼절로 뛰어난 신잠의 글씨가 걸린 긍구당, 원래 분천의 강가에 있던 농암 각자 바위, 학문을 논하던 강각, 신도비, 선조가 하사한 ‘적선(積善)’ 현판이 걸린 종택 등 강호문학의 고향 분강촌의 유적 조성 사업이 주변 환경과 조화롭게 이뤄지고 있다. 안동의 선비문화순례길 6코스인 ‘퇴계 예던길’을 따라 나서 가송리 올미재에 이르면 산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과 그 속에 자리한 농암선생의 유적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여름날 비온 뒤, 소나무가 아름답다는 가송리의 풍경은 마치 한 폭의 한국화를 감상하듯 안개와 구름으로 둘러싸인 산이며 굽이쳐 흘러가며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물소리는 일순간 비경에 빠진 신선의 감흥을 맛보게 된다. 계절마다 바뀌는 산수의 아름다운 모습에 심취해 걷노라면 농암 선생의 시조 한 수 쯤 저절로 읊어지고, 강호문학의 창시자요 남다른 효행을 실천한 선생의 학식과 덕망이며 문학적 성과에 다시금 고개 숙여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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