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강인순 작가ㆍ사진=강병두 작가] 한 손에 막대 들고...’로 시작하는 탄로가와 대역학자로 널리 알려진 우탁의 역사 속 자취를 따라가 본다. 안동에는 고려 말에 예안으로 와 은거하던 역동 우탁 선생과 관련된 유적들이 낙동강 주변에 몇 군데 남아있다. 먼저 안동시내에서 봉화로 이어지는 35번 지방도. 일명 퇴계로를 따라가다가 오천군자마을을 지나서 한국국학진흥원이 있는 서부리에 못 미쳐 도로의 왼편 산기슭에 우탁 선생의 옛 집터를 알리는 유허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호)가 있다. 원래 이 비석은 집터의 북쪽 십리허 강가인 예안면 부포리(현재 와룡면 선양동(지삼의)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안동댐 건설로 1976년에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1227-2로 이건하고 1998년 다시 물에 잠긴 예안 면 소재지의 옛 터가 건너다보이는 도로변의 현재 위치로 옮겼다.  비석의 앞면에는 ‘고려제주역동우탁선생유허(高麗祭酒易東禹倬先生遺墟)’라고 되어 있고 비문에는 ‘지삼리(知三里)’라는 마을 이름이 우탁 자신의 학덕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퇴계 선생이 우탁을 기리기 위해 예안에 역동서원을 세웠다는 것도 밝히고 있다. 도끼를 들고 극간하다 우탁은 원종 3년(1262) 지금의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신원동(품달촌)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탄생해서 3일간을 계속 울어대기만 했다. 집안과 마을 사람들은 아기가 잘못되었다고 수군거렸는데, 지나던 노승이 그를 보고 “그 녀석 벌써부터 주역을 외우고 있구만. 큰 인물이요.”하면서 지나갔다고 한다. 그런 이후 아기가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우탁의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보(卓甫·卓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이며 세상에서 그를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일컬었는데 시조인 우현(禹玄)의 7대손으로서 고려의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증직된 우천규(禹天珪)의 아들이다. 우탁은 1278년(충렬왕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다. 이 무렵 영해에는 팔령(八鈴)이라 이르는 신사(神祠)가 있었다. 백성들이 그 영험을 믿고 팔령신(八鈴神)을 극진히 받들고 있었으며, 자주 제사 지내고 재물을 바쳐 폐해가 막심했다. 이에 우탁은 팔령신을 요괴로 단정하고는 신사를 과감히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白衣)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온다.  " 그런데 이 자리에서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며 상소(上疏)를 읽어 올리는 신하가 상소를 펴 들고는 감히 읽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걸 보자 우탁이 낯빛을 엄(嚴)히 보이며, `경이 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로서 왕의 그릇된 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여 이에 이르니 경은 그 죄를 아느냐?` 하고 소리를 질러 꾸짖으니 좌우에 있던 대신들이 크게 놀라고 왕도 부끄러워하는 빛을 보였다." 위와 같은 지부상소(持斧上疏)의 기개는 고려는 물론 조선 왕조를 거치면서 사대부나 유생들에까지 이어져 국정과 기강, 풍속을 바로 잡고자하는 충성심에서 올린 상소는수 만 건에 달하며 오늘날 청와대의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상소문 형태의 글이 올라와 회자되고 있다. 우탁은 상소 이후 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지내다가 나이가 많아 스스로 벼슬을 물러났다고 한다. 주역을 동쪽으로 옮기다 우탁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 만년을 안동 예안현 서남쪽 5리쯤 되는 곳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역동은 은거하면서 인근의 마을을 중심으로 도학, 예의, 절조 세 가지를 중시하여 가르쳤는데 뒷날 세상 사람들이 이 마을을 ‘지삼의(知三宜)’ 또는 ‘지삼리(知三里)’라 불렀다고 한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새로운 유학인 정주학(程朱學)이 우리나라에 수용되고 있었는데, 이를 깊이 연구해 후학들에게 전해주었다. 정이(程頤)가 『주역』을 주석한 『정전(程傳)』은 처음 들어왔을 때 아는 이가 없었는데,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기를 달포 만에 터득해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었다고 한다.우탁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주역(周易)이라는 책을 처음 접하고 읽어보니 탐나는 책이라 구하여 본국에 가지고 오려 했으나 내어주지 않으므로 탐독하여 머리에 외워서 귀국했다고 한다. 그 까다롭고 방대한 분량을 외우다니 실로 수긍이 가지 않을 일이다. 그가 "주역을 동쪽으로 옮겼다"는 뜻으로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오늘까지 그를 가리켜 `우역동(禹易東)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고려사』 열전에는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될 만큼 아주 뛰어난 역학자였다. 시조 2수와 몇 편의 한시가 전하고 있다. 역동서원이 세워지다 조선조에 와서 퇴계 이황의 발의와 지방 유림의 공의로 우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567년(선조즉위) 예안 부포리 오담에(현재 계상고택 자리) 안동 최초의 서원인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역동서원기를 통해 당시의 위치와 경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역동서원은 선생이 사시던 댁에서 동북쪽으로 십여 리 쯤 떨어진 곳에 있다. 1558년 금난수(부포거주)가 이황선생과 서원건립과 장소를 협의하여 낙동강은 태백 황지에서 원류를 시작하여 청량산을 거쳐 남쪽으로 흘러 여기서 오담(鰲자라 오 潭못 담)을 이루었으니 산의 동쪽은 병풍과 같이 둘러온 것이 뱀처럼 굽이쳐 서쪽으로 가다가 담(潭)에 임하여 멈추고 이에 언덕이 마련되니 산을 의지하고 담을 굽어보아 심오하면서도 널리 트이어 스스로 좋은 형세를 이루어 먼 것 같기도 하고 가까운 것 같기도 하며 나열한 산봉우리는 읍하는 듯 강이나 못은 따로 두른 듯 하여 서원의 기지로 정하기에는 이와 바꿀 곳이 없었다. 북은 영지산, 남은 파둔산, 서는 부용산, 동은 취병산이 있어 사방 운산이 겹겹이 고리처럼 둘러싸고 앞으로는 큰 대에 임하였으니 시내는 큰 분천(汾川)의 하류이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명칭은 서원이 건립되는 지역의 명칭이나 봉향을 하게 되는 주된 인물이나 명현의 호를 사용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역동서원의 경우에는 지명이나 호를 따르지 않고 “역동”이라 붙여지고 있다. 이것은 퇴계 선생께서 우탁이 주역을 해득하여 일찍이 이 땅에서 강학하여 널리 교수한데서 명명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서원 상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 도산서원에 머물던 김광계(金光繼)가 쓴 매원일기(梅園日記)에 잘 나타나 있다“ 역동서원 친구들과 배를 묶어 뱃놀이를 하다.1608년 5월 5일, 며칠 전부터 도산서원에 머물고 있던 김광계는 이임보(李任甫)와 여원(汝遠), 그리고 막내아우인 광악(光岳)과 함께 역동서원에 가기로 했다. 며칠 전 역동서원에 갔던 광악이 어제 돌아와서는 그 곳에 있는 친구들이 놀러 오라고 했다는 말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역동서원은 도산서원이나 예안향교와는 거리가 매우 가까운데 강을 건너야만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마을을 돌아다니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래서 한동안 역동서원에 가질 못해 한 번 날을 잡아 가려고 했는데, 때마침 광악이 친구들의 말을 전하니 김광계는 바로 길을 나선 것이다. 배를 하나 불러 다 함께 배를 타고 출발했는데, 한 군데 여울에 이르러서 갑자기 배가 멈춰서고 말았다. 물이 얕아 배가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김광계와 일행들은 모두 옷을 벗고 배에서 내려 배를 밀기로 했다. 다 같이 힘을 모아 밀고 당기고 하였으나 역시 배는 꼼짝을 하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소식을 들은 역동서원의 여러 친구들이 노를 저어서 물결을 거슬러 위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김광계와 일행들이 있는 곳에 다다른 역동서원의 친구들은 배에서 내려 다 함께 힘을 합쳐 배를 끌어서 겨우 그 곳을 빠져 나왔다.역동서원에서 나온 친구들은 구경립(具景立), 이의경(李毅卿), 권진보(權進甫)·신재(臣哉)·인재(鄰哉), 이광전(李光前), 임종보(任宗甫), 윤응이(尹應易)였다. 이들은 자기들이 타고 온 배와 김광계 일행이 타고 온 두 배를 묶어 강 가운데로 나가기로 하고 배를 묶었다. 묶인 두 배를 타고 하류로 내려갔더니 역시 더욱 재미있었다. 경치도 일품이어서 다들 흥이 넘치고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뱃놀이는 즐거웠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서 예안으로 돌아올 수 없어 다 함께 역동서원에서 잤다“. (출전-한국국학진흥원, 테마스토리) 이후 1684년(숙종10)에 ‘역동(易東)’이라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당했다가 1969년 안동시 송천동에 복원되었다. 숙종이 사액한 현판은 유실되고 퇴계 선생이 쓴 ‘역동서원’과 ‘광명실’ 등의 현판이 전한다. 그러나 안동대학교가 송천동으로 이전하면서 이 서원이 학교 경내 부지에 포함되어서 1991년 단양 우씨 문중에서 안동대학교에 기증을 하고 서원 관리도 대학 측에서 맡게 되었다. 우탁을 배향하는 또 다른 서원으로는 단양에 단암서원, 최초의 사관지였던 영해에 단산서원과 안동에 구계서원 등이 창설되었다. 구계서원은 현재 영남대학교 구내로 옮겨졌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상현사(尙賢祠), 8칸의 명교당(明敎堂), 신문(神門), 입도문(入道門), 1칸의 전사청(典祀廳), 1칸의 장서각(藏書閣), 10칸의 주소(厨所) 등이 있다. 사우인 상현사에는 우탁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인 명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전사청은 제수를 장만하여 보관하는 곳이며, 주소는 서원을 수호하는 고자(庫子)가 사용하고 있다.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과 8월 하정(下丁-음력 매달 하순에 드는 정일(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안동에서 봉화로 이어지는 또 다른 도로인 933번 지방도를 따라서 예안면 행정복지센터에 못 미쳐 안동시 예안면 정산리 속칭 솥우물 마을에 역동 우탁의 묘소와 학덕을 기리는 재실인 정정재와 신도비가 있다. 정정재 재실 앞에는 시조와 한시를 새긴 시비와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 쓰인 큰 표석이 세워져 있다. 한편 역동서원의 옛터를 알리는 유허비가 안동시에서 조성한 안동선비순례길 6코스 중 역동길로 이름 지어진 부포리 계상고택 부근에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보면 옛날 역동 서원이 자리했던 곳의 풍광은 그지없이 아름답다. 북쪽의 청량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도산서원 앞을 지나 역동서원이 자리했던 넓은 부포들을 가로질러 월천서당이 있는 달애로 이어짐을 볼 수 있는데 이 강에 이웃한 서원의 옛 유생들이 함께 뱃놀이를 즐기던 웃음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우탁 선생은 성리학자이면서 문인으로서 시조 3수와 한시 여러 편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데 없다적은 덧 빌어다가 머리 우에 불리고자귀밑의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우탁(禹倬:1262-1342)- 탄로가      <청구영언> 이 시조는 국문학사에서 전해오는 시조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우탁의 탄로가이다. `탄로가(嘆老歌)`는 문자 그대로 `늙어 감을 한탄하는 노래`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월 속에 늙어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심리는 다 같은가 보다. `막대기`와 `가시덩굴`로 늙어 감을 막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음을 노래하고 있다. `백발`과 `늙음`을 의인화하여 자연의 섭리를 `막대`와 `가시`로 막으려는 모습이 익살스러우며 감각적이다. 늙음을 한탄하는 작자의 소박한 표현이 인간 능력으로는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친 여유와 대학자로서의 면모와 달관의 경지를 표현해 주고 있다. 둘째 수도 늙음을 한탄하면서도 삶을 달관하는 여유와 관조의 자세를 드러내고 있는데 눈과 바람, 해묵은 서리 등 자연 현상을 인생에 비유하여 인간 본연의 원초적 소망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탁이 남긴 한시 중에는 영남의 4대 누각 중 하나인 안동의 영호루에 올라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작품이 있는데 칠언율시 형식으로 되어있다.영호루에서  영남에 여러 해 동안 두루두루 놀았으나영호의 좋은 경치 가장 사랑하였네.방초 짙은 나루터에 나그네 길 나눠지고수양버들 푸른 둑 가에 농가가 있네.바람 잔 수면에는 푸른 연기 비끼었고오래 된 담 위에는 버섯이 자랐구나.비 갠 뒤 들판에는 격양가 부르는 소리앉아서 저 수풀 끝에 밀려 있는 뗏목 보노라. 嶺南游蕩閱年多 最愛湖山景氣加 芳草渡頭分客路 綠楊堤畔有農家 風恬鏡面橫煙黛 歲久墻頭長土花 雨歇四郊歌擊壤 坐看林杪漲寒槎   이렇듯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도학자이자 조정의 충성스런 관료로서 남다른 평가를 받은 역동 선생은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퇴계 선생은 역동서원기문에서 “선생의 충의대절은 천지를 움직이고 산악도 흔들 만하다. 경학의 밝음과 진퇴의 올바름은 후인의 사표가 되니, 백세의 제향을 받을 자 선생이 아니면 그 누구이겠는가!” 라고 역동 선생을 높이 기리고 있다. 우탁 선생이 가신 지 400여 년이 지났어도 그 숭고한 학덕과 자취는 오늘도 빛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 제보하기
[메일] jebo@ksmnews.co.kr
[카카오톡] 경상매일신문 채널 검색, 채널 추가
유튜브에서 경상매일방송 채널을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