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최성달 작가ㆍ사진=강병두 작가]
두물머리유장하게 흐르는 것이 강물이로되 호수는 흐르는 물을 잠시 가둔다. 요긴하게 쓰고자 잠시 가두었다가 다시 흘러 보내는 것인데 안동에는 이러한 큰 호수가 두 곳이나 있다.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낙강(洛江)과 영양 일월산에서 시작된 동강東江(반변천半邊川)의 물길은 각기 오랜 시간 따로 흐르다가 안동호와 임하호의 품에 안긴 후에야 비로써 하나가 된다. 안동 시내에서 용상동으로 넘어가는 법흥교 다리 아래가 양 방향의 물이 하나로 합쳐지는 두물머리다. 이 때문에 안동의 두물머리는 낙동강의 본류며 시발지로 인식된다. 낙동공원에 이를 보여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폭 3.8m, 높이 1.9m의 화강암 표지석에는 ‘낙동강 시발지’라는 다섯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안동의 엣 지명인 영가도 두물머리의 아름다움을 반영한 명칭이다. 영(永)자는 ‘이수(二水)의 합자이며 가(嘉)는 아름답다’는 의미다. 즉 낙동강과 반변천이 합쳐지는 두물머리 지세의 아름다움을 반영한 지명인데 이를 증명하듯 낙동강은 물산교류의 중심이었다. 남쪽으로부터 어류와 소금을 실은 거룻배가 강을 거슬러 안동을 지나 예안까지 이르러서 싣고 온 물건을 팔고, 내려갈 때는 이곳에서 생산한 물건을 싣고 갔다. 물산교역의 산 역사를 고스란히 지닌 곳이 바로 두물머리고 낙동강이다. 임청각임청각은 조선 중종 10년(1515)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이 낙강이 끝나고 두물머리가 시작되는 현재 자리에 99칸의 고택을 지었다. 이명은 우리나라 상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환단고기>의 ‘단군세기’편을 저술한 행촌 이암의 후손이다. 굳이 연보를 따지자면 이암의 손자가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이고 이원의 여섯째아들이 영산 현감 이증인데 이명은 바로 그의 3남이다. 2020년을 기준으로 보면 505년 전이고 종법의 내력으로 보아도 이창수(55세) 종손이 벌써 21대째 가문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임청각은 1942년 일제가 독립운동가의 정기를 끊어버리겠다며 마당 한가운데 중앙선 철길을 내고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 건물을 강제로 철거한 탓에 철길과 고택이 붙어있는 모습으로 남아 있는데 중앙선 복선전철화 사업이 마무리되는 2020년쯤이면 철로가 임청각에서 6km 밖으로 옮겨진다. 이와 더불어 예산 280억 원을 들여 2025년까지 안동 임청각을 중앙선 철로가 놓이기 이전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한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임청각 주변에 있다 사라진 분가 3동을 다시 짓고 철도 부설 당시 허물어진 주변 지형과 수목을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는 한편 석주기념관을 건립하고, 주차장, 화장실, 소방시설 등을 재정비할 계획이다. 임청각을 논하면서 반드시 짚어야할 3가지가 있다. 전술한 것처럼 이 집안에서 단군세기가 저술되었다는 것과 15대 종손 허주 이종악의 글씨와 그림이야기, 그리고 석주 이상룡과 이 집안사람들의 독립운동사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문재인대통령이 2019년 8.15광복절 경축사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귀감으로 임청각을 언급한 후 연이어 이낙연 국무총리와 김부겸 행자부 장관, 뒤이어 김현미 국토부장관과 김종진 문화재청장 등 여권의 핵심인물들이 모두 다녀가는 등 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 바쳐 배운 자의 도리를 다하고자 했던 임청각 정신은 이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혼으로 우뚝 섰다. 독립운동석주 이상룡(1858~1932)은 고성이씨 임청각의 17대 종손이다. 한일합방으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1911년 1월5일 99칸의 임청각과 전답을 모두 팔고 52세에 전 가족을 데리고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서간도에서 석주는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이회영과 함께 건립해 신교육에 앞장섰으며, 경학사를 만들고 한족회회장, 서로군정서 독판,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을 역임하다 1932년 만주에서 생을 마쳤다. 아들인 이준형은 1942년 자결로 일제에 항거했다. 이준형의 아들이면서 석주에게는 손자와 손부가 되는 이병화와 허은 여사 역시 선대의 뜻에 따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특히 허은 여사는 이육사의 어머니인 허길이 종고모가 되는 한말 대표적 의병장 왕산 허위, 허형 가문의 손녀이다 보니 독립운동은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시댁 친정 모두 서간도로 망명을 온 탓이었다. 시할아버지 이상룡, 시아버지 이준형, 남편 이병화 선생의 독립운동에는 허은 여사의 뒷바라지가 있었다. 말년에 독립운동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의 바람소리가’를 출판했는데 독립투쟁 때 실생활들을 기록한 것이었다. 1915년부터 1932년까지 17년을 만주에서 서간도 독립운동 지원에 헌신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아 임청각이 배출한 10번째 독립운동가가 되고 뒤이어 석주의 부인 김우락(1854~1933)여사까지 서훈되어 이 집안에서만 11명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했다. 이종악 허주 이종악은 임청각 15대 종손이다. 호가 빈 배라는 뜻인데 우리시대의 유명한 정치인 김윤환의 허주라는 호의 연원이 실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적 재능이 뛰어나 토지와 세금제도를 궁구하는 한편 당시 풍조가 중국 역사에 치중하는 것을 보고 『동사분류휘편(東史分類彙編)』저술에 착수할 정도로 역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병법(兵法)과 진법(陳法)을 비롯하여 학식이 전 분야에 두루 미칠 만큼 박식했으나 1762년 사도세자의 참변이후 출사의 꿈을 완전히 접고 초야에 묻혀 문예활동에만 전념했다. 그는 특히 해서 · 행서 · 예서 · 전서 등 모든 서체를 섭렵했는데 『난정첩(蘭亭帖)』, 『안진경필첩(顔眞卿筆帖)』, 『동파필적(東坡筆蹟)』, 『조한림필(趙翰林筆) · 조맹부필첩(趙孟頫筆帖)』, 『석봉서법(石峯書法)』, 『척주동해비첩(陟州東海碑帖)』 등 그의 애장본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중 그의 행서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1766년 정박(鄭璞) 등 사우들과 시회를 개최하고 작성한 시첩인 『유희첩(遊戱帖)』이다. 예서의 대표작인 「사수선유록(泗水船遊錄)」은 1776년 4월 6일 허주가 18명의 사우들과 함께 사수(泗水)에서 선유(船遊)하고 남긴 제명록(題名錄)이다. 행초제의 대표작은 외증조인 조덕린(趙德隣)의 10조소(條疏)를 필사한 「허주부군수필(虛舟府君手筆)」이다. 하지만 역시 허주 글씨의 백미는 전서다. 전서의 종장인 허목의 대표작 「섭주동해비(陟州東海碑)」의 탁본을 교본으로 삼아 「사물잠(四勿箴)」과 「금명(琴銘)」 등에서 전서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인각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다. 300여개에 달하는 인장의 명문이 날인되어 있는 『허주인장(虛舟印章)』은 고려대학교 석주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허주는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소질이 남달라 친족 간의 화목을 상징하는 <9세동거도九世同居圖>를 그리는 등 일찍부터 그림에 관심을 보였으나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간 것은 1763년 4월 《허주부군산수유첩》에 있는 12폭의 선유도를 그린 이후다. 《허주부군산수유첩》은 낙동강 일대 12경승을 선유의 관점에서 그린 작품인데 선유를 시작한 날짜는 1763년 4월 4일이며, 이로부터 5일이 지난 4월 8월 반구정에서 선유를 마감했다. 화첩은 바로 이 5일간의 여정을 담은 것이다. 선유의 경로는 화첩의 순서와 다르게 동호해람東湖解纜 – 양정과범羊汀過帆 – 칠탄후선七灘候船 – 사수범주泗水泛舟 – 선창계람船倉繫纜 – 낙연모색落淵莫色 – 선사심진仙寺尋眞 – 망천귀도輞川歸棹 – 운정풍범雲亭風帆 – 이호정도伊湖停棹 – 선어반조鮮魚返照 – 반구관등伴鷗觀燈의 순이다. 음식절조와 탑동종택 음식디미방과 수운잡방, 온주법에 이어 안동지역에서 또 하나의 고조리서 음식절조가 발견되었다. 음식절조는 국가민속문화재 제185호인 고성이씨 탑동파의 종가집에서 150년 전 남성에 의해 한글로 기록된 희귀한 자료인데 후손인 이재업 경북유교문화원 이사장이 몇 해 전 우연히 선대 간서공(1798~1871)의 책 고리를 들춰보다가 한글 고어체로 된 이 책을 발견했다고 한다. 소장자인 이재업회장과 고성이씨 탑동파 문중에 따르면 이 책은 고성이씨 탑동파에서 대대로 전해오는 음식조리법이라고 한다. 지질, 필적, 책 표지에 적힌 간지 등을 종합적으로 살피고 판단한 결과 음식절조는 간서공이 죽기 6년 전 선대로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조리법을 정리한 자료라는 것이다 이재업 이사장은 음식절조를 국문학자 안귀남 박사에게 국역 주해를 부탁, 지난 8월15일에 책이 발간되었다. 향후 포럼과 음식재연을 통해 음식절조에 담긴 다양한 음식들을 세상에 내놓을 계획이다. 1700년대에 지어진 탑동종택은 안채·사랑채·북정 등이 자연환경과 잘 조화된 사대부가의 전형을 보여주는 집인데 현 소유자 이찬형(李贊衡)의 11대조인 이준식(李俊植)이 안채를 건립하고 이어 사랑채를 건축하던 중에 죽자, 그의 손자 이원미(李元美)가 완성했다. 대청의 북쪽에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는 북정(北亭)은 소유자의 7대조인 이종주(李宗周)가 1775년(영조 51)에 건립하였다. 1824년(순조 24년)에 대수리를 하였고, 1991년에는 안채의 정침을 고쳐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