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두한 작가ㆍ사진=강병두 작가] 마애마을·소산마을·가일마을마애마을은 ‘마애선사유적지’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마애솔숲공원’을 조성하던 중 2007년 4월, 이곳에서 주먹도끼, 찌르개 등 기원 전 3만~4만년쯤 구석기 시대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371점이 출토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그 유물들을 보기 위하여 마애마을을 찾은 적이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마을에서 놀라운 절경과 마주했다. 그것은 ‘망천절벽’과 그 밑을 흐르는 강물이었다. “서리 묻은 단풍이 비단보다 붉은데/ 비온 물결이 쪽과 같이 푸르구나./ 두보의 곡강이 응당 멀지 않고/ 소동파의 적벽이 부끄럽지 않네.” 이 절경을 송암 권호문(1532 ~ 1587)은 이렇게 노래했다. 선사시대부터 이곳 주민들에게 젖줄이 되어 온 마애마을의 강물은 망천절벽 아래를 돌아 풍산들을 적시며 흐른다. 풍산들녘에는 안동김씨 집성촌인 소산마을과 안동권씨 집성촌인 가일마을이 있다. 안동김씨의 소산마을 입향조는 비안현감을 지낸 김삼근(1419~1465)이다. 그는 안동김씨 시조인 태사공 김선평의 대종손으로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 김계권과 김계행이 그들이다. 김계권은 한성부 판관을 지냈고, 김계행은 대사간을 지냈으며 벼슬에서 물러난 후 묵계에 은거하였다. 김계권은 서울에서 벼슬을 하면서 지금의 청와대 일대인 장동에 터전을 잡고 살았는데, 다섯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세조조에 국사를 지낸 학조대사이고, 2남은 사헌부 감찰을 지낸 김영전, 3남은 진사 김영균, 4남은 수원부사를 지낸 김영추, 5남은 사헌부 장령을 지낸 김영수이다. 이 가운데서 왕비 3명, 정승 15명, 종묘배향 6명 등을 배출한 5남 영수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한 사람들은 모두 김영수의 후손이다.소산마을은 김영수의 세 아들 중 장남 김영의 후손이 나중에 낙향하여 세거함으로써 안동김씨 오백 년 세거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 소산마을에서 우리는 경상북도 중요 민속자료 제99호인 양소당, 보물 제2050호인 청원루,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11호인 돈소당,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93호인 동야고택 등의 고택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3호인 삼구정,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272호인 태고정 등의 누정을 만날 수 있다. 이 가운데서 양소당은 안동김씨 대종택이고, 삼구정은 김계권의 아들 4형제가 대제학 제평공 권맹손의 딸인 노모의 장수를 기원하며 지은 정자로서 효의 상징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리고 청원루는 병자호란 때 척화파의 영수였던 청음 김상헌(좌의정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됨)이 본향인 이곳 소산마을에 잠시 머물면서 그의 증조부 김번(김영수의 차남, 평양서윤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됨)이 지은 집을 증축한 것인데,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에서 그 이름을 ‘청원루’라 하였으며 충의 상징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소산마을 입구에는 인구에 회자되는 청음 김상헌의 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를 새긴 시비가 서 있다.소산 마을을 지나 하회나 구담으로 가는 길의 오른쪽에 가일이란 마을이 있다. 영주군수를 역임한 권항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이 집성촌에 권주라는 이가 있었다. 권항의 손자로서 경상도관찰사, 도승지 등을 지냈다. 그런데 성종이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릴 때 그 약사발을 들고 갔다고 하여 갑자사화 때 사약을 받았으며, 그의 부인은 그 기별을 듣고 자결을 하였다. 후일 중종반정으로 신원이 되었으나 이번에는 중종 조에 벼슬을 하던 권주의 둘째 아들 권전이 기묘사화 2년 뒤에 일어난 신사무옥 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권주의 장자인 권질은 안동 예안으로 유배되었다. 이 참혹한 변을 당한 집의 권질의 딸이 퇴계의 둘째 부인이다. 그러니까 이 마을은 퇴계의 처가 동네가 되는 셈이다. 퇴계의 둘째 부인 이야기퇴계의 둘째 부인 권씨는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집안의 참극을 목격하고, 그 충격으로 실성하더니 영영 회복되지 않았다고 한다. 퇴계가 만년에 제자 이함형에게 준 편지에서 "그저 애써 잘 지내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것이 십 수 년, 그 사이 더러 마음이 흔들리고 번민과 고뇌로 견디기 어려운 때도 없지는 않았네"라고 한 것은 불행한 아내로 인한 퇴계 자신의 불행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퇴계는 첫 번째 부인이 병사하고 난 후 3년 만에 재혼하였다. 그 경위는 이러하다. 예안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권질이 어느 날 퇴계를 불러 놓고 딸로 하여금 차 대접을 시키면서 입을 열었다. “오늘 내가 자네에게 부탁할 것은 저 실성하고 과년한 딸을 좀 맡아 달라는 것이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네 밖에는 믿고 맡길 사람이 없네.” 퇴계는 오랫동안 침묵한 후 “네, 고맙습니다.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이렇게 하여 퇴계의 부인이 된 권씨는 퇴계의 마음고생을 많이 시켰다. 하루는 퇴계가 조회에 나가기 위해 도포를 입는데 헤어진 부분이 있는 것을 보고 부인에게 기워 달라고 하자 부인은 빨간 헝겊을 대어 기워 왔다. 퇴계가 그것을 입고 궁궐로 갔더니, 모두들 그것이 예법인 줄 알고 그 뒤로 도포에 빨간 헝겊을 대어 기워 입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제삿날 온 식구들이 큰집에 모여, 제사상을 차리느라 정신이 없는데, 상 위에서 배가 하나 떨어졌다. 퇴계의 부인이 얼른 그것을 치마 속에 숨겼다. 이를 본 큰형수가 말했다. “이보게, 동서. 제사상을 차리는데 과일이 떨어진 것은 우리들의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인데 그것을 왜 치마 속에 감추는가?” 이 소란에 퇴계가 나타나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퇴계는 큰형수에게 정중하게 말하였다. “형수님, 죄송합니다. 앞으로 제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그리고 손자며느리의 잘못이니,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도 귀엽게 보시고 화를 내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퇴계의 말에 동서를 꾸짖던 큰형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하였다. “참으로 동서는 행복한 사람이야. 서방님 같이 좋은 분을 만났으니 말이야.” 퇴계는 아내를 불러 치마 속에 배를 숨긴 이유를 물다. 아내는 먹고 싶어 숨겼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 배의 껍질을 손수 깎아 아내의 입에 넣어 주었다. 풍산들이 낳은 풍산소작인회,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발판이 되다 가을이면 누렇게 익은 벼의 물결이 바다를 이루는 풍산들의 풍요 뒤엔 수탈하는 자와 수탈당하는 자의 대립과 갈등이 숨어 있었다. 1923년 5월 1일에 이르면 그것이 표면화하여 안동지역 최초로 풍산소작인회의 결성을 가져오게 되었다. 풍산읍을 중심으로 약 삼천여 명이 군집하여 집회를 가진 이 소작인회는 권오설, 이용만, 이회승 등이 중심에 되어 소작료와 지세 등 현실적 문제를 제기하고, 농촌부인과 농민들의 교양교육과 소작대장의 작성, 농사개량과 부업장려 등의 문제를 거론하였다. 이러한 소작인회의 요구가 집단적인 쟁의로 발전하자 지주 측에서도 강력하게 대응하여 한인 지주들은 일본인들의 협조 하에 풍서농무회를 결성하고 소작인회를 압박하였다. 그들은 소작료를 높이고 불응하는 사람들에게서 소작권을 박탈하였으며 대항하는 사람들은 경찰에 고발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소작인회는 공동으로 품을 팔아서 그 돈으로 구금된 사람들을 도와주었으며 쟁의에 참여하여 토지를 경작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벼를 거두어 부조하기도 하였다. 이 회오리 속에서 권오설(1897~1930)이란 인물은 풍산소작인회를 발판으로 하여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총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됨으로써 조선노농총동맹을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하였다. 그는 조선노농총동맹을 이끌면서 1925년 2월 김찬, 김재봉, 김단야, 박헌영 등과 조선공산당 창당을 결의하였고, 동년 4월 조선공산당과 그 산하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가 창설되자 고려공산청년회 조직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해 말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이때 그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들어오는 자금을 관리하며 조직을 총괄하는 한편, 6.10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는 만세시위 때 사용하기 위한 `격고문`과 그 밖의 전단 등을 직접 작성하였는데, 당시 그가 작성한 격고문을 보면, 총체적으로 식민지 민족을 무산자계급,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계급으로 규정하면서 민족적·정치적 해방과 계급적·경제적 해방을 동일한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결국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분리된 것이 아닌 통일적인 것으로 파악한 그의 민족해방이론은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민족혁명을 위해 자유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형성하게 하는 이론적 단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거사 직전인 6월 7일 계획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30년 옥중에서 순국하였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날이 밝으면이렇게 마애마을의 망천절벽 밑을 돌아 풍산들을 적시며 흐른 강물은 사람들로 하여금 돌을 깨뜨려 논밭을 일구어 살게 한 이래 삼구정과 청원루를 지어 효와 충을 나타내는 문화를 낳게도 하고, 무산자계급의 해방을 통한 민족 해방의 횃불을 높이 들게도 했다. 날이 밝으면 이 강물 또한 새로이 흘러 이 유역을 새롭게 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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