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두한 작가ㆍ사진=강병두 작가]새벽이 와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면 새끼 노루가 눈을 뜨듯 눈을 뜨는 호수가 있다. 1971년에 착공하여 1976년에 준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양수 겸용 발전소인 안동댐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안동호가 그것이다. 이 호수 주변을 안동시는 2002년부터 문화관광단지로 개발해오고 있다. 그 결과 현재 세계물포럼기념센터, 유교랜드, 온뜨레피움, 전망대, 골프장, 드라마 <태조 왕건> 촬영장, 호텔, 상가 등이 듬성듬성 열린 포도송이처럼 들어서 있다. 안동호의 물은 안동댐을 빠져나가 그 보조 댐에 갇혀 강 모양을 유지한 또 하나의 작은 호수를 이룬다. 안동호에서 보아 이 호수의 왼쪽에 안동민속박물관이 있고, 오른쪽에 진모래와 임청각이 있다. 그리고 이 호수를 가로질러 월영교가 있다. 병산전투 필자가 초현실주의 화가라면 이 건조하게 나열된 이 이름들 가운데서 지렁이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조그마한 모래밭을 그리겠다. 그 모래밭은 석산과 병산 사이를 흐르는 개울이 강 모양의 작은 호수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주민들은 이 모래밭을 진모래라 일컫는다. 견훤(진훤)이 진을 친 곳이라 하여 그렇게 일컫는다고 한다. 밤이 와 안동호가 눈을 감으면 어둠에 묻힌 진모래 속에서 신라 말 지렁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진모래의 오른쪽에 있는 산의 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와룡면 서지리에 솟아 있는 산봉우리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병산 봉우리이다. 그리고 진모래의 왼쪽에 있는 산의 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병산의 맞은편에 솟아 있는 산봉우리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석산 봉우리이다. 이 두 개의 봉우리가 거느린 산, 즉 병산과 석산에서 천 년도 더 넘는 시간의 저 편에서 역사적인 병산전투가 있었다. 그 광경을 떠올려본다. 927년 공산전투에서 패한 왕건은 후퇴하여 죽령에 진을 치고 있었고, 견훤은 고창을 포위하여 이러한 왕건의 남하를 막고자 하였다. 이 상반된 두 힘이 맞부딪혀 929년 12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약 두 달 동안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먼저 유금필이 이끄는 고려의 선봉대가 예안 지역의 저수봉에서 견훤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고려의 선봉대가 승리하였다. 견훤군은 후퇴하여 고창의 석산에 진을 치고, 왕건의 본대는 진격하여 석산 맞은편의 병산에 진을 쳤는데, 그들 사이의 거리는 약 50보였다. 두 군사는 낮 동안 치열하게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 때 고창 성주였던 김선평이 왕건을 도움으로써 신라의 경애왕을 죽인 견훤을 응징하고자 하였다. 밤이 되자 그는 이 지역에 사병을 많이 거느리고 있던 김행, 장정필과 힘을 합쳐 견훤을 기습 공격을 함으로써 견훤의 팔천 군사를 함몰시켰다. 이것이 저 유명한 병산전투이다. 이 병산전투의 소식을 전해들은 영안·하곡·직명·송생 등 30여 군현이 고려에 귀부하였으며, 다음 달에는 강릉 지역에서 울산 지역에 이르기까지의 110여 개 성이 고려에 귀부하였다. 이로써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돌이킬 수 없는 대세를 잡게 되었다. 이에 고려 태조 왕건은 고창군 성주였던 김선평에게 대광, 김행과 장길에게는 대상의 벼슬을 내렸으며, 김행에게는 권씨 성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고창군을 “해동을 평안하게 하였다”고 하여 안동부로 승격시켰다. 오늘의 안동이란 지명은 여기서 비롯하였다. 김선평, 권행, 장길은 각각 안동김씨, 안동권씨, 안동장씨의 시조이며, 이들의 족보를 보면 그들은 모두 그 벼슬이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태사 아부에 이르렀다. 이 세 고려개국공신을 후인들은 삼태사라 일컬으며, 그 공덕을 추모하여 왔다. 안동시에 위치한 태사묘는 그 추모의 물적 증거이며, 차전놀이는 그 추모가 예술로 승화한 무형문화재이다. 이러한 병산전투는 민중의 상상력과 결합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낳았다. 병산과 석산 사이 개울이 휘돌아 병산자락을 여근 모양으로 만드는 곳이 있다. 이곳 속에 남근 모양의 석산자락이 뻗어 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여근 속에 든 남근은 죽기 마련이므로 남근을 가진 석산에 진을 친 견훤이 여근을 가진 병산에 진을 친 왕건에게 패하였다는 이야기가 그 하나이다. 그런가 하면 석산 뒤의 밥박골에 사는 안중 할머니가 고삼 뿌리를 섞은 독한 술을 빚어서 후백제군의 장수들에게 먹여 크게 취하게 한 후, 이 사실을 삼태사군에게 알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 이야기의 일정 부분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서의 민초의 역할을 강조하고자 하는 민중의 의식이 이 이야기의 밑바닥에 깔려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또 그런가 하면, 진모래에 얽힌 이야기도 만들어져 전해온다. 견훤은 원래 지렁이의 화신이었기 때문에 위태로우면 모래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삼태사가 병산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견훤은 그 동쪽 낙동강 변 모래땅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견훤은 싸우다가 불리해지면 모래 속으로 숨어들곤 하였다. 이에 삼태사군은 흐르는 물을 막아 못을 만들고, 못 속에 소금을 부어 넣었다. 싸우다가 불리해진 견훤은 지렁이로 둔갑해서 모래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때 삼태사군은 소금물이 든 못의 둑을 터뜨렸다. 모래 속에 숨어 있던 견훤은 소금물을 견디지 못하여 목숨만 겨우 건진 채 도망갔다. 이것이 진모래에 얽힌 전설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진모래를 본다. 병산을 향해 보아 진모래의 왼쪽에 영남산이 있다. 영남산 자락에 낙동강, 즉 아까의 그 강 모양을 유지한 호수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고택이 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귀래정, 영호루와 함께 고을 안의 명승이다.”라고 한 임청각이 바로 그것이다.월영교 안동시내에서 차를 몰아 안동댐 방향으로 가는 사람에게는 왼쪽 철길 너머 산에 큰 규모의 고택이 보이는데, 이것이 이 임청각이다. 이 임청각을 뒤로 하고 안동댐 방향으로 좀 더 나아가면 오른쪽에 넓은 주차장과 함께 월영교라는 다리가 나타난다. 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필자와 함께 월영교를 거닐어보자. 2003년에 개통된 월영교는 바닥과 난간을 목재로 만든 인도교로서 폭3.6m, 길이 387m에 이른다. 5세기 초 안학궁 앞쪽에 설치하였던 고구려나무다리(북한 국보급 제160호)보다는 총길이가 12m 길고, 너비가 5.4미터 짧은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나무다리로 알려져 있다. 다리는 원래 “물이나 협곡 따위의 장애물을 건너거나 질러갈 수 있도록 두 지점을 연결한 구조물”로서 실용적 목적에 따라 고안되었다. 이 실용적 목적을 벗어나 심미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다리를 하나 소개해달라면,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이 월영교를 들겠다. 월영교가 있는 이 지역의 명칭은 달골이었다. 월영교를 건너면 엄달골이란 마을과 이어지고, 강 건너 산 중턱에는 옛 선비가 시를 읊었던 곳인 "월영대"가 옮겨져 있다. 월영교란 명칭은 공모에 의하여 이런 연유로 정하였다고 한다. 달빛이 호수를 비출 때, 그 달빛 속 월영교를 거닐면 한 폭의 그림 속을 거니는 듯한 느낌 속으로 빠져든다. 안동민속박물관월영교를 건너면 안동민속박물관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1982년 4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92년 6월 26일에 개관한 안동민속박물관은 옥내 박물관과 옥외(야외) 박물관으로 이루어진, 총면적 5만 2,000평의 민속 전문 박물관이다. 옥내 박물관은 연건평 935평의 직사각형 콘크리트 건물이다. 건너편의 고색창연한 임청각이 고전적 미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라 한다면, 이것은 현대적 미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이 박물관은 전시실·수장실·기계실·작업실·시청각실·영상실·마당놀이장·휴게실·연구실(사무실) 등을 갖추고 있는데, 특히 전시실에서 기자·산속·어린이의 성장 과정·관례·혼례·회갑례·상례·제례 등 사람의 일생과 관계되는 전통적 생활양식, 화전놀이·놋다리밟기·차전놀이 등 안동문화권의 주요 민속놀이, 고려 공민왕의 친필 현판 등을 만날 수 있다. 옥외 박물관은 기존의 민속 경관지를 보완한 것으로 석빙고·안동댐 건설 시 수몰 지역에 산재하던 전통 고가옥·육각정·전통 연못 등을 이건하여 전시하고 있으며, 이육사 시비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 석빙고는 보물 제305호로 낙동강에서 잡히는 은어를 국왕에게 진상하기 위하여 1737년(영조 13)에서 1740년 사이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안동댐의 건설로 인하여 1976년 본래의 위치에서 보다 높은 곳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안동댐 건설 시 수몰 지역에 산재하던 것을 이건한 고가옥으로는 이원모 ㅁ자 기와집· 박명실 초가겹집·이춘백 초가겹집·박분섭 초가까치구멍집·이필구 초가토담집(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4호)·초가도토마리집(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호)·돌담집·통나무집 등이 있다. 월영교에서 보아 왼쪽에 옥내 박물관이 있고, 오른쪽에 옥외 박물관이 있다. 두 개의 장승이 양 옆에 서 있어 열린 대문 역할을 하는 옥외 박물관을 들어서면, 왼편에 시비가 하나 서 있음을 볼 수 있다. 앞면에는 ‘陸史詩碑’라는 글자가 김충현의 전(篆)으로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이육사의 시 <광야>가, 뒷면에는 조동탁의 찬(撰)이 배길기의 서(書)로 새겨져 있다. 이 시비 앞 안내판에는 “그는 윤동주 시인과 함께 일제 암흑기를 밝힌 찬란한 별이었다. 일제에 항거하는 강렬한 민족의식을 서정적으로 노래하고, 상징적 기법과 세련된 언어로 청초하고 고고한 세계를 구축했다.”고 적혀 있다. 육사시비를 뒤로 하고 드문드문 고가옥들이 들어서 있는 마을 언덕길을 넘어가면, 드라마 <태조 왕건> 촬영장을 만날 수 있다. 고려시대의 관아, 옥사, 민가 등 20여 채의 건물이 이곳에 들어서 있다. 여기서 발길을 안동호의 선착장으로 돌리면 물 위에 목선 여섯 척이 정박해있다. 주변에 두 채의 초가·깃발·망루·접안시설 등이 있는 이곳에서 치열한 해상 전투 장면을 촬영하였다. 이렇게 둘러보면 어느덧 하루해가 저문다. 어둠이 깔리면 새끼 노루가 눈을 감듯 안동호는 눈을 감는다. 눈을 감은 안동호의 꿈속에 달이 뜨면, 고즈넉한 동양화 속 진모래에서 지렁이 울음소리가 들려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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