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동백 작가ㆍ사진=강병두 작가]병산서원 가는 길은 낙동강이 화산에 부딪히는 지점에서 언덕바지로 치켜 오른다. 이 길은 5리 비포장의 병산길이다. 차를 타고 간 것이라면, 서원 전방 5백m에 마련된 주차장에 주차하고 걸어서 병산서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과 그의 아들 류진을 배향한 서원이다. 병산을 안산으로 화산 동남쪽에 자리 잡은 서원이다. 고려 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던 풍악서당을 1572년에 서애가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1613년에 존덕사를 창건하면서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2019년 7월, 도산서원 등 아홉 서원과 함께 병산서원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복례문 안으로 들어서면 우선 만대루와 맞닥뜨린다. 병산서원은 진입 공간, 강학 공간, 배향 공간으로 구성되는데, 만대루는 진입 공간의 주체가 된다. 만대루는 병산서원이 지어질 때, 함께 지은 누각으로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翠屛宜晩對’에서 취하여 그 이름을 지었다. 해 질 무렵에 만대루 다락에 올라 바라보는 낙동강과 병산의 경치를 병산서원의 으뜸으로 친다. 굳이 해 질 무렵이 아니더라도 여름날 늦은 오후쯤에 이곳을 찾는다면 병산의 검은 바위와 푸른 숲이 절묘하게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만나게 될 것이고, 낙동강에 반사된 햇살이 병산에 비춰서 일렁이는 물빛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마음에 둘 일은 자연을 만대루 안으로 끌어들여 바라보는 것이다. 만대루의 여덟 개의 기둥이 만들어주는 일곱 개의 프레임은 그대로 산수진경을 담은 화폭 일곱이다. 이 화폭에 그려지는 그림은 시간에 따라 변하고, 계절에 따라 다르다. 만대루 관람을 마치고 다락 밑을 지나서 몇 개의 계단을 오르면, 바로 강학 공간인 입교당 마당이다. 입교당은 원장과 유생들이 모여서 강론하던 곳으로 병산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배향 공간인 존덕사는 입교당 돌아 들어간 후원, 열두 계단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계단 옆으로는 오래된 배롱나무가 무리 지어 벌여 서 있다. 이 꽃이 한창 피어나는 여름은 ‘書院’은 일순 ‘花院’으로 변한다. 배롱나무 꽃이 필 무렵에는 병산 산마루에 올라 병산서원을 내려다보아야 한다. 병산서원은 수천의 꽃으로 치장한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화원花園이 되어 있을 테니까 말이다. 관람을 마치고 나서는 길에 보고 가야 할 곳이 또 하나 있다. 달팽이 뒷간이란 이름을 단 서원 뒷간이다. 채 여미지 못한 누런 치맛자락 같은 바람벽으로 가린 이 뒷간은 병산서원의 마침표 같은 존재이다. 병산서원 앞에 이를 즈음 병산의 아랫도리를 깊이 파서 소를 이룬 낙동강은 키 낮은 풀들이 깔린 모래톱을 거느리고 구렁이처럼 소리 없이 흘러간다. 그 물낯바닥의 한쪽에는 병산이 푸르게 내려앉고, 다른 한쪽에는 구름 몇 장 거느린 파란 하늘이 슬며시 자신의 모습을 비춘다. 반공에 떠서 가파른 병산이 서쪽으로 기울어 잦아들면서 골짜기 하나를 내놓는다. 그 골짜기 안에는 평해 황씨 오랜 세거지인 인금 마을이 들어 있다. 인금은 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라 옛날엔 바깥출입이 여의치 않았다. 장 보러 풍산까지 나가는데도 꼬박 한나절이 걸렸다. 나룻배로 낙동강을 건너서 병산서원 앞을 지나 풍산들 들머리까지 산길을 걸었다. 허기도 지고 다리도 아파오는 그 어름에 장꾼들을 기다리는 주막, ‘쪽배기’가 자리 잡고 있다. 거기에 들러 쉬면서 더러는 술추렴도 했다. 아침 여덟 시에 마을을 떠나 정오 사이렌이 울리는 시각에 풍산장에 닿아 장보기를 마치고, 서둘러 되짚어 회정의 길에 올라도 마을에 도착하면 저물녘이 되기 일쑤였다. 옆 마을 하아리를 다녀오더라고 병산 허리를 가로지르는 벼룻길을 타야 했고, 어담을 가려도 산을 넘어야 했다. 인금 마을에서 하회 쪽으로 치우친 골짜기에는 월애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의성 김씨와 청송 심씨가 터를 잡아 6백 년을 살아온 이 마을에는, 일제강점기 심규화가 김국진, 태석과 함께 신간회 안동지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은 월오헌 고택이 있다. 병산서원과 하회 마을 사이에는 유교문화길이 나 있다. 병산서원에서 출발한 길은 낙동강과 7백여m쯤 나란히 이어지는데, 쑤[藪]를 이루는 강섶의 습지가 앞을 가려 길에서 강의 물을 바라볼 수 없다. 습지에는 떡버드나무가 군락을 이르는 가운데 뽕나무, 미루나무, 시무나무 등이 그 틈에 끼어 자란다. 강섶을 벗어난 길은 꽃뫼[花山] 벼랑을 타고 5백m쯤 목책에 기대어 나 있다. 벼랑길은 나무로 된 계단을 내려오는 지점에서 끝나고, 완만한 경사를 따라 길은 다시 하회로 들어간다. 길섶에 설치한 안도현과 김남주의 시판을 지나서 거묵재 정자에 닿는다. 거묵재 정자에서 1.5km 정도 내리막길을 걸어가면, 하회 마을과 부용대를 뚜렷하게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에 도착한다. 이 유교문화길은 왕복 8km, 쉬엄쉬엄 걸어 두 시간 반쯤 걸린다. 병산을 지나서 저만치 월애 마을을 떨어뜨리고 지구의 껍질에 달라붙어 무장무장 흘러가던 낙동강은 하회 마을로 감돌아든다. 마침내 강은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섭리를 인간보다 명철하게 알아서 물태극산태극의 하회 마을을 자신의 곁에 지었다. 한편 마을의 건너편에다는 창검을 세우듯 부용대를 세워 놓았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 봐도 경승⋅길지이다. 유네스코는 하회를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했다. 거기다가 1999년에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우리나라 전통문화 체험을 위해 특별히 하회 마을을 방문했다. 강의 역사役事가 이렇게 하회의 지형을 형성했다면, 인간의 역사役事는 하회의 문화를 이룩했다. 그 문화의 중심에서 서애 류성룡과 같은 선비가 났고, 그 가장자리쯤에 허 도령과 같은 민초가 존재했을 것이다. 그 문화는 충효당, 양진당 같은 전통 가옥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 하회별신굿탈놀이를 연행한 힘으로 작동한 것이다. 하회 마을 사람들은 물의 이치를 알아, 넌지시 그 물을 다스려 왔다. 사람들은 강과 어울려들 때 부용대 절벽에 줄 불을 내리고, 강에 배를 띄워 선유船遊했다. 그 참에 강도 흥에 겨워 너울너울 그 몸을 흔들어댔다. 양진당과 충효당에서 하회 선비의 삶을 들여다보았다면, 내친 발걸음으로 만송정 솔숲으로 들어가 낙동강과 멋지게 어울리는 소나무의 운치에 젖어봐야 한다. 그리고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만송정과 마주보고 선 부용대 언저리를 거닐어 볼 일이다. 부용대는 하회마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높이 64m의 절벽이다. 부용대 허리춤에는 옥연정사, 겸암정사, 화천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옥연정사는 류성룡이 『징비록』을 저술한 곳이고, 겸암정사는 류성룡의 맏형인 류운룡 세운 정사이며, 화천서원은 류운룡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하회 관광의 백미라면 국가무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하회별신굿탈놀이일 것이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기 위하여 마을굿의 하나로 연희되는 탈춤으로 풍자와 해학이 넘친다. 물돌이동을 휘돌아 나온 낙동강은 서애의 종숙인 류중엄의 정자 파산정 밑을 깊게 흘러 광덕교에 이르러 여울을 탄다. 강은 유유히 흐르던 흐름을 벗어나 빨라진 유속이 돌을 갈아 여울은 비로소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 유속도 습지를 거쳐 가는 동안 다시 느려지고, 강은 습지에 찢겨 그 틈을 비집고 흐른다. 광덕교를 사이에 두고 풍천면 도양리와 광덕리가 나뉜다. 도양리는 지대가 높은데, 광덕리는 낮다. 지금은 수리 시설이 잘 갖춰서 문제가 없으나, 과거에는 한 마을은 물이 모자라 애를 태우는데, 다른 한 마을은 물이 넘쳐 애를 태웠다. 도양리 북쪽 들 끝에는 검무산이 솟아 있다. 이 산의 형상이 서울의 북악산을 닮아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검무산을 뒤에 두고 경상북도 도청이 들어섰다. 어찌 보면, 낙동강과 검무산이 신도청 시대를 연 주역이 된다. 광덕리 남쪽에는 기산들이 넓게 형성돼 있다. 과거에는 뽕나무밭이던 이 들이 문자 그대로 상전벽해가 되어 지금은 비닐하우스가 들어서서 참외나 딸기를 재배하고 있다. 비닐하우스를 비껴난 노지에는 마와 우엉을 재배하고 있다. 광덕교 밑을 지난 낙동강은 구담까지 습지를 뚫고 나간다. 이 습지에 떡버드나무, 갈대 등이 들어차는 바람에 은모래 십 리 구담 백사장을 잃은 이곳 주민들은 구답 습지 제거를 주장해 왔다. 2011년에 4대강 유역 사업으로 구담 습지를 뜯어내고 구담보를 지었으나, 지금은 거의 복원되어 버드나무 등이 습지에 꽉 들어차고, 고라니, 뱀, 수생 조류들이 서식하고 있다. 이 구담보는 길이 423m, 높이 2m의 작은 보이다. 비록 작고 소박할망정 모양이 하회탈 눈썹을 닮은 유선형을 취함으로써 그 미관이 수려하고 날렵하다. 구담 마을은 예천군 지보면 암천리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갈리는 안동 서쪽 끝에 자리 잡은 마을로 순천 김씨와 광산 김씨 집성촌이다. 옛날엔 부산에서 올라온 소급배가 정박하던 나루터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곳에는 구담교가 낙동강을 가로질러 기산들로 들어가는 길을 이어주고 있다. 안동 권역 97.4㎞를 일사불란하게 흘러 내려온 낙동강은 구담교에서 비로소 예천군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구담교 밑을 빠져나온 낙동강은 서쪽 멀리 의성군 다인의 비봉산 쪽으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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