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동백 작가ㆍ사진=강병두 작가] 낙동강의 발원지에서 대략 110여㎞를 흘러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광석나루에 다다른다. 낙동강은 그 긴 여정을 거쳐 온 힘으로 왼쪽 자락에 산 하나를 돌올하게 세워 두었으니, 영남의 소금강이란 일컫는 청량산이다. 나분들 앞 청량로에서 바라보면, 낙동강은 청량산을 옆구리에 끼고, 청량산은 낙동강을 품어 안는다. 낙동강이 있어 청량산이 생겼는지, 청량산이 존재하므로 낙동강이 존재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나, 시원에 닿으면 이 둘은 하나였을 터이다. 그러므로 낙동강을 언급하면서 청량산을 빼놓을 수 없다. 청량산 청량사청량산은 열두 봉우리를 거느리는데, 지형에 따라 이 봉우리들을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능선을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장인봉, 선학봉 자란봉, 연적봉, 탁필봉, 자소봉, 경일봉, 탁립봉이 늘어선 것이 그 첫 번째이다. 두 번째는 청량정사와 청량정사를 외호外護하듯 둘러싼 형세를 취한 향로봉, 연화봉, 금탑봉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들 봉우리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남쪽에 자리 잡은 축융봉이다. 청량산은 예로부터 불교의 자취가 산재한 산이어서 봉우리의 이름도 보살봉, 의상봉, 금탑봉, 연적봉, 대봉 등으로 불교 색채가 짙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불교의 흔적을 지우고 고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청량산은 금강산에 빗대어 소금강이라 일컫는 바와 같이 기암괴석이 천인절벽을 이루면서 자아내는 풍광이 장관을 이룬다. 시인 묵객은 이 산의 형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대개 이 산은 그 둘레가 백 리에 불과한데 봉우리와 산꼭대기, 층층이 중첩되어 모두 가파른 절벽이다. 가파른 절벽을 이고 안개와 남기嵐氣와 수목이 그림 같고 누각 같으니 참으로 조물주가 특별히 기량을 베푼 것이다. 주세붕이 「청량산록遊淸凉山錄」에서 묘사한 청량산의 모습이다. 자연은 형상대로 그렇게 존재할 뿐, 뜻을 지어 무엇을 의도하지 않는다. 강이 그러하고, 산이 그러하다. 청량산도 이와 같다. 이러한 자연이 인문학적인 범주 안으로 들어오면 의지를 드러내고 뜻과 정서가 자신 안에 깃들이게 한다. 이로써 자연은 역사를 이룬다. 같은 이치로 청량산에도 사람이 듦으로써 그 안에 역사가 존재한다. 후세에 전하는 기록과 사람의 흔적을 살펴보더라도 청량산에는 신라로부터 이어온 역사가 존재한다. 김생굴과 치원대가 그것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청량산에는 청량정사와 청량사, 응진전, 산꾼의 집이 있다. 청량정사는 퇴계 이황이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고,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천년 고찰로 약사여래불을 모신 유리보전이 유명하다. 산꾼의 집은 옛 주인이 바뀌어 지금은 시인이 깃들어 산다. 주세붕을 시작으로 권호문, 허목, 김득연, 이상룡 등 많은 이들이 청량산을 유람한 견문을 글로 남겼다. 이들이 남긴 글에는 청량산의 경치를 감상하는 가운데 의취(意趣)와 정서를 끌어내어 격물치지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였고, 아울러 강호 한정을 노래했다. 그리고 이 청량산에서 벗과 어울려 취흥에 젖어 들기도 했다. 퇴계 이황은 청량산을 오가산吾家山이라고 할 만큼 사랑하여 50여 편의 시를 남길 정도인데, 퇴계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청량산가」에서 청량산을 무릉도원으로 인식했다는 점이 자못 흥미롭다. 이렇게 산이 사람을 품으면서 산은 역사를 이루어낸 것이다. 청량산은 산행지로도 이름난 곳이라서 등산객이 사철 분빈다. 그에 따라 등산로도 다섯 개 코스로 개발해 놓았는데, 입석, 청량사, 뒷실고개, 하늘다리, 장인봉, 청량폭포로 이어지는 코스가 선호도가 높다. 청량사를 관람하고, 하늘다리를 건너면서 아찔한 쾌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산행을 마치고 입석 방면으로 하산하면 거기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2.6㎞쯤 나온 지점에서 낙동강을 만나고, 이어서 나분들 마을에 닿는다. 그리고 미슐랭 그린가이드가 한국에서 아름다운 도로로 선정한 국도 35선에 올라서게 된다. 이 길은 활처럼 휘어 낙동강과 나란히 군계(郡界)를 넘어 도산면 가송리 삼거리에 이른다. 북쪽에서 흘러내린 낙동강은 청량교 밑을 빠져나오는 찰나에 깎아지른 학소대 절벽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여울을 타고 빠르게 흐른다. 겨울이면 바위틈으로 새 나온 물이 얼어 학소대는 빙폭을 이루어 장관을 연출하는데, 여름이면 여울을 이룬 낙동강의 유속이 빨라 래프팅하기에 좋다. 낙동강과 고산정가송리 삼거리에서 방향을 왼쪽을 잡아가면, 쏘두들 마을을 거쳐 고산정과 농암종택에 닿는다. 고산정은 쏘두들 마을에서 낙동강을 건너 맞은편, 하늘에서 곧장 내리꽂히는 내병산 아래 자리 잡았다. 마당 밖에다 비스듬히 소나무를 거느리고 선 고산정의 자태가 고독한 군자 같다. 이 정자 주인의 성정性情이 아마 이러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 주인은 퇴계의 제자로 봉화 현감을 지낸 성성재 금난수이다. 고산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집인데, 3m가량의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후, 얕은 기단 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다. 가운데 놓인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꾸미고, 전면과 측면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뒤로는 취병산이 병풍처럼 에워싼 이 고산정은 예부터 예안 지역의 이름난 명승이었다. 자연과 어우러진 경관도 절경이려니와 여름이면 상사화를, 가을이면 노랗게 익어가는 탱자를 이 정자 마당에서 보는 운치도 있다. 퇴계 이황도 일찍이 여러 차례 제자들과 함께 방문하여 시를 짓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이때 퇴계가 지어 널리 알려진 시로,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성성재에게 남긴 「서고산벽書孤山壁」이 있다. 고산정 언저리에 이르러 물은 바위를 썰고 갈아 하나를 둘로 나눠 가송협이란 협곡을 지었다. 그 나뉜 것이 고산이고 취병산이다. 물은 석벽을 둘로 갈라 높이 솟구치도록 해 놓고 자신은 낮게 깔려 유유히 그사이를 뚫고 흘러간다. 물은 고산정을 자신의 품에 들여놓기 위해 취병산 아래에서는 한없이 부드러운데, 여울목에 곧장 이르러서는 딱딱하게 굳은 채로 남으로 빠르게 내닫는다. 이쯤에서 예던길이 시작된다. 가사리를 지난 낙동강은 여울을 타고 직선으로 흘러 앞을 가로막고 나서는 절벽을 날카롭게 깎아내고, 절벽 맞은편에다가는 이끌고 온 부유물을 쌓았다. 깎인 곳은 깊은 물웅덩이를 이루고, 쌓인 곳은 모래톱을 이룬다. 달빛이 밝게 비췬다 해서 이 물웅덩이를 가리켜 월명담이라 하는데, 이 소에는 용이 산다는 전설이 있다. 월명담에서 한 굽이 휘돌아 나가면, 저만치 강의 북쪽 개활지에 늘어선 농암종택과 그 부속 건물들과 맞닥뜨린다. 농암종택은 조선 중종 때 문신이며, 학자인 농암 이현보의 생가이다. 종택 안에는 본채가 있고, 서쪽으로 치우친 곳에 궁구당이 들어서 있다. 종택 주변에는 농암 사당을 비롯하여 분강서원, 애일당, 명농당, 농암 바위가 자리 잡고 있는데, 수몰되면서 분천에서 옮긴 것이다. 현재 종손이 민박을 운영하고 있어, 이 종택은 청량산 일대를 둘러보고, 예던길을 걸으며 쉬어갈 수 있는 좋은 공간이다. 낙동강은 농암종택 맞은편 절벽에 바투 붙어 내닫다가 다시 건너편 절벽에 부딪히며, 흐름을 크게 바꾸어 남동쪽으로 쭉 뻗어 단천리 끝단에 다다른다. 그 사이에 학소대, 한속담, 벽력암, 경암, 미천장담이 차례로 자리 잡고, 몇 년 전에는 이 부근에서 공룡 발자국이 발견됨으로써 자연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이 되었다. 퇴계 이황은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시로 읊어 남겼다. 미천장담을 벗어난 낙동강은 예던길 아래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둥글게 휘어나가, 단천리를 가로질러 단사협에 이른다. 농암종택에서 미천장담에 이르는 사이에는 길이 끊겨 단천리로 갈 수 없다. 부득이 단천리 쪽의 예던길로 가자면, 농암 종택에서 돌아 나와 온혜리에서 백운로로 들어가야 한다. 이 길을 약 8㎞를 밟아 들어간 곳에서 만난 단천교가 예던길 들머리이다. 이 지점에서 예던길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단천교를 건너 가재미골, 장구목, 월명담을 거쳐 월명담 가사리에 이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단천교에서 곧바로 나아가 미천장담, 학소대, 농암종택, 올미재를 넘어 쏘두들에 이르는 길이다. 단천교에서 곧바로 난 예던길은 내왕이 쉬운 곳까지의 거리는 약 5㎞이다. 이 길은 시멘트 포장로인데, 낙동강을 거슬러 가는 코스이다. 얼마간은 낙동강에 붙어 가다가 길이 오르막을 타기 시작하면서 강은 길을 비껴나간다. 오르막을 오르는 길섶에 팔각정과 전망대가 나선다. 전망대에 올라 전면을 바라보노라니, 하늘빛과 산빛을 받아 안고 흐르는 낙동강이 손에 잡힐 듯하고, 청량산 축융봉이 이마에 와서 부딪힌다. 전망대 주변에는 퇴계 이황의 시, 「경암」, 「한속담」, 「미천장담」을 새긴 빗돌이 있어, 고인(古人)의 가던 길을 가늠해 볼 기회도 얻는다. 장구목으로 이어지는 예던길의 일부 구간에도 목책 탐방로와 전망대를 설치해 놓았다. 이 전망대는 학소대, 경암, 미천장담을 조망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티끌 세상에 심신이 찌들었다면, 서둘러 신들매를 고쳐 신고 청량산 하늘다리를 아찔하게 건너볼 일이고, 고산정 마당에 서서 낙동강에 어리어 비취는 취병의 비췻빛을 호젓이 감상한 후, 예던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걸어 꿈속으로 들어가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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